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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6/08
    [사진] Pride parade,(3)
    하노이
  2. 2007/05/13
    제 2회 여성인권영화제,
    하노이
  3. 2007/03/11
    소모임 소개글
    하노이
  4. 2007/02/12
    <당신은>
    하노이
  5. 2007/01/12
    새맞이 시기의 반성폭력 담론은 어째서 찜찜한가.
    하노이
  6. 2006/12/21
    KTX 승무원 투쟁 승리를 위한 300일 촛불 문화제
    하노이
  7. 2006/12/13
    “KTX승무원 문제 연내해결을 촉구하는 2000인 선언” 투쟁에 연대합시다(2)
    하노이

[사진] Pride parade,

 

 

제8회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

 

 

 

 

 

프리게이허그



 

존 카메론 미첼 씨를 무려 직접 보고 ,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는 것! 초감격 T_T♡

 

 

존카메론미첼_퀴어문화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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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회 여성인권영화제,


 

 

 

영화제 홈페이지 : www.fiwom.org

 

 

 

 

“아는 사람에 의한 성폭력 80% 육박

결혼한 부부 중 30%가 아내 구타를 경험

데이트 폭력을 경험한 20대 여성 32.1%“

여성에 대한 폭력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보다 훨씬 더 빈번하게, 어떤 때에는 ‘폭력’이라고 인식되지 못한 채, 그녀가 일상적으로 맺고 있는 관계들 속에서 끈덕지게 일어난다. 가족들, 연인, 동료, 친구, 선후배 등 매일 만나고 마주치는 ‘친밀한’ 사람들이 그녀에게는 가해자가 되곤 한다. 친밀한 관계 속에서 그녀가 겪게 되는 폭력의 피해들은 폭력(가해행위)=사랑(관심)이라는 끔찍한 공식 안에서 외면당하기도 하고, 일상적이라는 이유로 아예 ‘피해’로조차 인식되지 못하기도 한다. 이처럼 ‘친밀한’ 관계 속에서 곪아가는 피해들을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된다. 이에 여성 폭력에 대한 가슴 뜨거운 보고서이자 여성 폭력 근절에 대한 강력한 지지 성명서인 제2회 여성인권영화제가 오는 5월16일부터 19일까지 나흘 간 성북구에 위치한 <아리랑시네센터>에서 열린다.

주제 하나. 나, 마주하다.
- 폭력이 아니라고 이야기 되는, 그러나 분명 폭력적인 불쾌한 경험들과 마주하다.

주제 둘. 그래도, 살고있다
- 폭력 관계에 놓인 여성들에게는 살아남기 위한 어떤 방식들이 분명히. 있다.

주제 셋. 오늘, 피어나다
- 폭력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을 꾸려나가는 여성들의 힘차고 당당한 이야기.

제2회 여성인권영화제에서는‘친밀한’관계들 속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다룬 영화들을 통해 우리가 몰랐던, 혹은 친밀하기 때문에 일부러 외면해 왔던 그 상처들을 바라보게 될 것이며 피해 여성의 목소리를 따라가면서 폭력 인식하기, 싸우기, 협상하기, 복수하기, 일탈하기, 생존하기 등 피해 여성들이 폭력 관계 속에서 대처하는 방식에 초점을 맞춘 영화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또한 ‘주제가 있는 영화제’, ‘소통하는 영화제’, ‘함께 만들어가는 영화제’, ‘행동하는 영화제’, ‘즐기는 영화제’라는 구호 아래 영화뿐만 아니라 부대행사, 토론회, 평화마을축제 등 다양한 방식으로 여성폭력 근절에 대한 소통과 참여의 장도 함께 만들 예정이다.

지난해 ‘여전히, 아무도 모른다’ 라는 주제 아래 일상 속에 은폐되어 있는 가정 내 여성에 대한 폭력의 현실을 드러내고 그 근절에 대한 사회적 담론을 확산시키기 위해 ‘제1회 여성인권영화제’를 개최한 바 있는 서울여성의전화는 올해 ‘친밀한’ 관계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문제에 집중하는 ‘제2회 여성인권영화제’를 개최, 피해 여성의 경험을 마주하고 이를 남의 일이 아닌 나의 문제로 받아들임으로써 각자 일상 속의 작은 변화들을 일으키고자 한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에 가해지는 폭력을 다루는 제2회 여성인권영화제의 주제는 아이러니하지만 서글프게도 ‘친밀한, 그러나 치명적인’이다.

 

행사안내

1.행사명 : 제2회 여성인권영화제 ‘친밀한, 그러나 치명적인’
fiwom - film festival for woman rights
2.행사기간 : 2007년 5월 16일~19일
3.상영관 : 아리랑시네센터

4.주최 : (사)서울여성의전화
5.후원 : (재)한국여성재단, 성북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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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모임 소개글

 

2007년 새내기 자료집용.

무겁자면 너무나 무거운, 가볍자면 너무나 가벼운.

말 말 말 말 들.

 



<여우입술 소개글>


 


관계자 외 절대 환영~


여성주의 소모임 <여우입술>을 소개합니다! 




 안녕. 당신과 이렇게 글로 만나게 되어 -예상보다 더- 설레네요. 이 글을 누가 얼마나 읽어볼까, 내 마음의 천만분의 일이라도 제대로 전해질 수 있을까, 걱정스럽고 두려운 마음은 잠깐 꽁꽁 싸매어 키보드 옆에 던져두고, 곧 있을, 언젠가는 있을, 당신과의 만남을 상상하며 여성주의 소모임 <여우입술>을 소개하려 한답니다. 예의를 차리기 위해, 글을 쓰고 있는 나에 대한 몇 가지 단서를 드리자면, 나는 04년도에 새내기였고, 05학번들이 어설프게 새내기란 이름표를 떨어질듯 말듯 팔락거리며 붙이고 다니던 2005년 말경에 <여우입술>이란 모임을 제안해서 시작하게 된 사람들 중 하나이기도 하죠. 소모임 ‘대표’냐구요? 대략난감한 표정을 날려드릴 수밖에 없을 것 같네요. 내 성격 때문이기도 하고, 또 내 필요에 의해서, 나는 당신에게 아마도 되물을 거예요. “당신이 생각하는 ‘대표’란 어떤 의미를 가진 거죠?”, “당신에게 ‘대표’란 어떤 건가요?” 라고. 꺄울. 상대하기 싫은 사람이다, 그쵸? 변명을 하자면, 내가 위와 같은 식의 대화를 즐겨 하는 이유는, 소크라테스 씨를 따라 하기 위해서라거나, 상대방이 내게 왜 저런 걸 묻는 걸까 하는 상대방의 의도를 의심하기 때문은 아니랍니다. 정말로 난 궁금한 거예요.


 


 너와 나, 당신과 나는 ‘똑같은’ 언어를 쓰고 있는 게 맞나요? 얼핏, 같은 문자에 같은 문법 틀 안에서, 더구나 지구 반대편 사람도 아닌, 멀어봤자 꿈의 열차 KTX로 3시간 안이면 갈 수 있는 문화권에서 살아온 사람이면서 무슨 소릴 하는 거냐고 생각할 수 있겠죠. 그런데, 정말 ‘똑같은’ 의미를 지닌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면, 우리는 왜 대화를 하는 거죠? 어차피 다 아는 것들이 되는 게 아닌가요. 그런데, 아니잖아요. 우리는 대화를 하고, 오해를 하고, 다투기도 하고, 놀라서 감동 받기도 하고, 즐거워하기도 하죠. 그건 왜죠. 내가 하는 말, 그리고 당신이 하는 말. 그 속에는 나도 있고 너도 있고 쟤도 있고 걔도 있어서가 아닐까요. 같을 수 없는 <사람들>의 마법 같은 어떤 것이, 계속해서 서로를 궁금해 하고 대화하고 싶도록 하는 게 아닐까요. 내가 말을 하고, 당신이 말을 하고, 쟤가 말을 하고, 걔가 말을 하고, 그러다 <우리>의 말이 나올 수 있는 건 아닐까 생각을 해요.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왜 이리 서두가 기냐’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무례한 생각 짚기를 잠깐 해봐요. 그런데 난 처음부터 계속해서 여우입술 소개를 하고 있는 게 맞아요! 나, 너, 쟤, 걔.. 이들이 서로 대화, 소통 할 ‘꺼리’들이 너무나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는,  “자신의 것이 아닌 적당한 껍질에 싸여서 적당한 이름들 속에 나를 숨기고 몸을 움츠린 채, 그 이름들에 모독당하면서” 살기 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였답니다. 특히 여우입술은, 그 '소통'이 여성주의들(feminisms)에 있어서 무척 중요한 것이라 생각하며, 여성적인 것, 여성주의적인 사고를 매개로 소통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였답니다. 제인 프리드먼에 의하면 여성주의들(feminisms)은  여성의 사회적 위치가 열등하며 여성이란 섹스로 인해 직면하게 되는 차별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에서 '시작'한다는 공통적인 기반이 있지만, 페미니즘을 고민하는 사람들 수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수의 페미니즘들이 있을 수 있어요. 여우입술 속에도 그 다양함이 있지요. <반>구성원이면서 <여성주의>라는 끈의 관심을 공통분모로 해서, 이와 관련한 그 어떤 일이든 그 어떤 생각이든 나눠볼 수 있는 자리를 가질 수 있는 게 바로 여우입술이예요. 함께 같은 책을 골라 읽으며 공부를 하기도 하고, 온라인에서든 오프라인에서든 모여서 소란스럽게 영화를 보거나, 수다를 떨기도 하고. 그런 모임이에요. 더 궁금한 게 있다면, 이 글을 쓴 하노이를 붙잡고 <여우입술>의 “여우..”까지만 말을 꺼내면 너무 기뻐서 지구 밖으로 날아가 버릴지도 모르니, 이 분은 조심하시고, 주로 05학번 06학번 친구들을 붙잡고 물어주세요. 꺄하. 보고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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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졸렬해지자. 좀 더.

숨 막힐 것 같은 '공적'언어들에 대한 강제에 움츠러들지 말자.

졸렬해지자, 마음을 내뱉자.



<당신은>


 당신은, 새터 도중에 내가 누군가 챙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술 마시는 양을 조절해본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함께 있던 어떤 동기/후배/선배가 과반이 “모두” 모였다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을” 때, 눈치 챌 수 있었습니까?

 당신은, 그 사람이 혹시 어디선가 혼자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온 새터 장소를 뒤지고 다녔던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동기/선배/후배에게 “힘들지 않냐”고 마음을 담아 물어보는 일을 했었습니까?

 당신은, 아래와 같은 일을 겪고 난 뒤 새터 이후에 “미안하다”라는 말 한마디를 함으로써/들음으로써 기억에서 지워버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고학번 서포터즈’에서 실질적으로 인정받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아니었고 그것이 내 잘못도 아니었음에도 나는 ‘미안해’하고, 또 ‘고마워’해야 하는 감정의 혼란을 겪었다. 몸이 부딪쳐 튕겨나갔지만 그것은 몸이 약한 내 잘못인 것 같았고 낼 수 있는 목소리를 최대한 크게 내도 뒤처지는 것 역시 다른 반 서포터즈들과 비교해 ‘약점’이 될 수 있는 내 잘못이 될 수 있었다. (중략..) 폭력적인 언사임에도 불구하고 ‘선배/동기로서’의 미안함과 죄책감이 앞섰다.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투명한, 사라진 존재로 만드는 분위기. 자신이 발 딛고 서 있는 바로 그 곳이, 자신이 없어야 할 곳임을 느낄 때, 가슴까지 따끔한 가시밭 위를 걷는 기분이 든다.

 

- <2006년 사회대 새터의 분위기 폭력을 ‘느끼고’, 비판하며>, 작년 새터 직후 한 학우의 글


  “남자애들은 이렇게 응원하고 여자애들은 뭐, 옆에서 박수치면 되겠다.” , “응원을 하려면 높은 목소리는 효과가 없어. 낮은 목소리가 있어야지.”라는 말에서, 그런 말뿐이 아니라 응원에 남자들의 ‘우렁찬 목소리와 힘찬 동작들’이 ‘효과적’이라고 생각되는 분위기.. (중략) ‘저도 07,08,09 새터에까지 와서 선배들(대부분이 남자)처럼 멋진 고학번 서포터즈가 되고 싶어요’ 라고 다짐하는 학우도 있지만 화장실에서 겨우 조그맣게 ‘결국은 남자들만 남는 건가요’ 라고 묻는 학우도 있다는 걸 아시는지. (중략) 반의 열광적인 다른 반 쳐들어가기를 따라갈 수가 없어서 쉬러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있었다는 건 아시는지.

 - 2006년 사회대 새맞이 기획단 문화팀 평가서 중

 

 

 겨울딛기 디딤이들은 보았습니다. 과거 몇 년 동안 여러 비판의 목소리들이 끊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응원들이 2006년에는 ‘언터쳐블(untouchable)'한 응원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며 점점 더 손쉽게 고민을 놓게 되는 상황들을. 그 속에서 고학번 서포터즈의 영향력은 해가 갈수록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고, 심지어 응원을 주도하는 상황들을. 2006년 새터 이후에, 어떤 반에서는 반 이름의 사과자보를 내기도 하고 어떤 반에서는 반대표의 사과문이 타 반의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사후(事後)에 그리 야단스레 사과할 일을, 어째서 그 당시에는 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내 의지가 아닌, 술의 탓입니까. 아니면, 새터는 ‘원래 그러고 놀려고 가는’ 곳이어서 저지르고 보는 것입니까.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서 같은 사건을 공유한 사람들. 그러나 그 기억들은 각기 다를 수 있습니다. 또 기억이란 것이 왜곡되고 굴절될 수 있고, 기억은 쉽게 추억이 되고 추억은 쉽게 아름다운 색으로 칠해질 수 있습니다. 기억의 ‘차이’를 인정한다면, 이제 생각해봅니다. 누구의 기억은 쉬이 인정받고, 누구의 기억은 조용히 은폐되는지를. 누군가의 기억이 ‘대다수의 기억’으로, 새터에 대한 ‘보편적 기억’으로 인정받는 반면에 누군가의 기억은 개인적인 기억으로 묻혀 개인의 고통으로만 남게 되고 어디로도 들리지 않게 된다면, 어떤가요. 인정받은 기억과 인정받지 못하는 기억은 단순한 차이로 끝나지 않습니다. ‘모두가 즐거웠던’ 새터에서 ‘즐기지 못한’ 나는 사회대의 구성원이 아닙니까? ‘재미있었던’ 새터 이야기에 쉽게 끼지 못하고, 어색한 미소만 지으며 다른 이의 말을 듣고만 있는 나는 ‘우리’ 공동체의 일원이 아닌가요? 내년 내후년 새터에, 작년 재작년 새터의 기억을 떠올리며 다른 일정을 핑계로 씁쓸하게 불참하는 고학번 선배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까? 앞으로의 대학생활에서 새터의 기억은 편협되게-모든 개인의 기억은 편협하겠지만, 자신의 편협성을 인정하지 않는 그 편협함을 말하고자 해요-기억되고 비슷한 기억끼리 반복 재생산이 이어지기 쉽지 않을까요.

 

 내가 나의 기억을 말하고, 나의 기억을 기억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내가 나와 유사한 여러 기억들과 함께 <우리>의 기억을 드러내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사람의 기억, <우리>들의 기억도 존재하고 있음을 나 자신에게, <우리>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인정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기억과 다르다고 해서, ‘없었던’ 기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 기억과 우리의 기억이 알려짐으로써 당신과의 관계에 작게나마 ‘변화’가 있기를 바래봅니다. 당신에게 2007년 새터에서는 내가, 우리가 당신의 눈에 보이기를, 당신이 우리를 느낄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내가 나의 기억을 말하듯, 우리가 우리의 기억을 말하듯, 그리고 인정받기를 원하듯이 당신의 기억도 들려질 수 있기를 원해요. 재미있으셨나요? 즐거우셨나요? 우리와 비슷한 부분이 있으셨나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언제든 더 활발한 대화를 원하시는 분이라면, 겨울딛기 프로젝트 커뮤니티로 방문해주세요. 들려주세요. 당신의 기억도. 

 

2007 사회대 겨울딛기 프로젝트 온라인 커뮤니티 주소 http://club.cyworld.com/steponwi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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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맞이 시기의 반성폭력 담론은 어째서 찜찜한가.

[2007 새맞이 프로젝트 컴티에 올린 글]

 

 

새맞이 시기에 범람했던 각종 세미나 커리와 교양 자료들을 살펴보다가, 문득 '반성폭력'이란 이름을 달고 있는 텀들이 참 많다는 걸 발견했다. 대부분이다. 새맞이 시기에 여성주의는 반성폭력과 거의 동일시되고 있었다.  

 

어째서 였을까.

 

새로운 관계맺음, 이제 처음으로 시작하는 관계맺음이 많은 새맞이 시기에 반성폭력이라는 주제가 가장 시급하게 필요하기 때문에, 라는 일반적인 이유를 생각해내보지만, 

 

또한, 성폭력이 일상화되어 있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확실히 다른 캘린더들보다는 훨씬 많은 사람들이 여성주의라는 담론, 반성폭력이란 주제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이 새맞이 시기에 반성폭력이란 주제를 심화, 확장시키고자 하는 활동가적 마음을 떠올려보지만,

 

그런데도 어딘가 모를 찜찜함.



 

- 공동체라는 (남성적) 주체와 새내기 (여학우)라는 피해자의 이분법의 성별화

 

기존의 새맞이상에 대한 논의들을 살펴보면서, 새맞이 시기에 다양한 새맞이 주체들 사이의 차이들이 드러나기 보다는 '공동체'의 존속을 필요근거로 집단적 주체를 가정하게 되고 과정/결과적으로 단일한 공동체의 목소리만이 주로 재현된다는 것을 느꼈었다.   

 

이러한 기존의 새맞이 상과 연결시켜 생각해볼 때, 공동체의 건설 혹은 재구성이 (공공연한 동시에 암묵적일지라도) 위계적으로 가장 중요한 목표를 차지하고 있는듯한 새맞이 시기에 여성주의들의 이야기 중 가장 많이 논의되는 주제가 ('독자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반성폭력이라는 건 의미심장하게 여겨진다. 어딘가 찜찜하다. 아주아주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새맞이 시기 신준위에서 논의되는 반성폭력이란게, '우리 공동체에 일어나면 골칫거리/말썽/수치스러운 일이 될 성폭력 사건을 기왕이면 미리 예방하면 좋겠다', '우리 공동체에 들어올 새내기 학우들은 되도록이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도의 인식이 아닐까 하는 우려가 된다.

 

주체와 피해자라는 이분법, 그리고 이러한 이분법의 성별화는 남성 주체의 이해()와 환상 속에서 구성된 '침묵하는 피해 여성'이란 관념을 낳기도 한다(이 문장은 정희진 씨 글에서 인용). 새맞이 시기 새맞이의 주체-새맞이상 논의를 바라보며 느꼈던 새맞이 시기에 형성되는 단일한 목소리로서의 '공동체'라는 집단적 주체-와 잠재적 피해자로서의 새내기로 이분화되고 있지는 않은가. 동시에 이 이분법은 잠재적 피해자인 새내기를 주로 새내기 '여'학우로 사고하게 됨으로써 성별화되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찜찜함이 있다.   

 

 

 

- 성별화된 이분법의 의미와 가려지는 것들

 

여성들이 공동체에서 맡아왔던 역할들, 차지하는 부분들은 셀 수 없을만큼 많을 수 있고, 절반 이상의 중요함을 지니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위와 같은 이분법적 사고에서는, 공동체에서 여성들의 존재를 인식하는 틀이란 건, 기껏해야 '여성=성폭력의 잠재적 희생자/피해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결과아닐까. 피해자인 여성만 보인다는 것, 말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것, 피해자의 목소리만이 그들의 귀에 쉽게 들릴 수 있고, 쉽게 인정받을 수 있다는 슬픈 현실의 반영이 아닐까.  

 

특히나 지금 있는 구성원으로서의 여성들을 재사고하는 형태의 반성폭력 담론, 여성주의의 논의가 아니라, '우리 공동체'에 새로 들어올 '새내기 여학우'가 이상적인 잠재적 피해자상으로 굳어져, 이들을 희생양/인질로 삼은 채, 기존의 가부장적 인식에 편승해서 반성폭력 담론의 확장을 이루고자 하는 게 아닌가(그런 전략이 과연 가능한지가 의문이지만). 그게 찜찜하고 무서운 것이다. (실제로, 새맞이 시기에 '여자 신짱'/'남자 신짱'이란 이름으로 대표되는, 이와 유사한 각종 성역할 분리/분업이 이루어짐에도 불구하고 이런 분리/분업들이 기초하고 있는 생각에서 가부장적 신화와 공모할 위험성이나 여성노동에 대한 성격을 이해하고자 하는 학습에 대한 논의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단지, 폭력의 '피해자'가 되지만 않는다면, 여성들은 공동체 내에서 아무런 문제 없이 생활해나갈 수 있나? 성폭력적 상황에 대한 학습과 예방의 노력은 최소한의 안전망 정도가 아닌가? 새맞이 시기 반성폭력이란 주제를 가장 많이 택하게 되는 바탕의 생각이, 공동체 내에서 폭력의 '피해자'가 나타나는 순간, 공동체는 고난의 과정을 겪는다는 생각하는 것, 피해 자체에 주목하기 보다 공동체의 치부가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것, 성폭력 사건이 공동체의 수치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얼마나 벗어날 수 있는지를 되짚어 보자는 것이다. 여성주의자들이 성폭력 피해자들을 생산해냄으로써 공동체의 분열을 꾀한다는 그런 말도 안되는 음모론적인 이야기들이 비공식적으로는 여기저기서 공감받는 맥락과 연결시켜 생각해볼 수도 있다.  

 

이분법에서 각각의 범주들은 주로 겹쳐지지 않는 상호배타적인 것으로 설정되기에, 위와 같은 이분법은 공동체 내의 구성원으로서의 여성들의 문제, '성폭력'이란 개념논의만으로 설명해낼 수 없는 성별 권력관계를 보이지 않게하거나 개인간의 관계에서의 문제로 축소시키는 것과 동시에, 새내기 여학우들을 피해자화하기 쉽다는 데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반성폭력 세미나를 하면서 피해자화의 함정을 조심하자는 내용을 아무리 강조한다 한들, 새맞이 시기 위와 같은 이분법적 사고 속에서 이미 새내기 여학우가 피해자로 가정된 채 각종 논의와 실무들이 진행되고 있다면, 틀 자체가 이미 그렇다면, 세미나에서 피해자화에 대한 글을 몇 개 더 읽는다한들 그 의미가 얼마나 와닿을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정희진씨는 자신의 글에서 '피해자화가 여성에게 권력을 부여하기도 한다. 여성들이 '피해자 정체성'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은 피해자일 때만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예전에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나를 포함하여 여성주의자인 어떤 친구들이 새맞이 시기에 반성폭력 담론의 확장을 위해 노력하게 되는 주요 이유 중의 하나가 이 '피해자 정체성'에 매력을 느끼는 것과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있다. 이 시기에는 분명 우리가 우리의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이야기의 장을 만들기만 하면 '들어주려는/듣는' 사람들이 (평소보다) 많다. 그런데 그건 우리의 이야기가 피해자의 목소리에 가장 가깝기 때문이 아닐까. 나 자신만 해도 새맞이 시기 각종 반성폭력 세미나나 반, 문화팀 논의에서 이전 새맞이 시기의 내 '피해'들을 들추어 내어 예로 들면서 정당화를 시도했던 적이 많았다. 당시의 나 자신을 '새내기 여학우=피해자'로 고정시켜서 지금의 나와는 다르게 여겼던 느낌도 든다. "그때의 나같은 일을 겪는 새내기 여학우는 없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면서 나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에 대한 맥락보다는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분리시키면서 당시의 '피해'상황과 행위에만 주목했었던 게 아닐까. 그 때와 '같은' '상황과 행위'만 벌어지지 않으면 되는 건가. 비록 내가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피해자의 목소리를 내는 게 괴롭지만 어쨌든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고 실무에 반영이 된다는 데서 이를 '권력'이라고 여기기도 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정말 이것은 권력이었을까. 왜 나는 내가 내는 피해자 목소리에 스스로 소외되는 느낌과 무언가 나를 속이는 느낌을 계속해서 가져야 했던 걸까.

 

권력일까, 라는 생각을 잠시 미루고 또 생각해보자면,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머릿속에 있는 새내기 여학우를 위해서 그런 말들을, 일들을 해왔던 것일까. 새맞이 시기 반성폭력 논의들 중에서 내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스스로가 치유되고 있다고 여긴 적이 거의 없었다. "다만 이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올해 또 내 눈앞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나 비슷한 일을 듣는 것이 너무 두려워, 그 두려움이 내 활동의 주요 원동력은 아니었나.  

 

그랬기 때문에, 새맞이 시기에 새내기 여학우들에게 느끼는 어떤 종류의 '배신감'이 컸던 것은 아닐까. 내가 신준위를 할 때, '쟤는 저게 불편하지 않나.'라는 생각이나 여성주의에 덜 우호적인 여학우들을 볼 때에 드는 섭섭함은 어디서 나오는 것이었을까.  새내기는 대학의 여성주의 담론을 반성폭력 내규를 통해 처음 접하게 된다. 자신을 희생자/피해자의 틀과 일치시킬 수 없는 목소리들에도 좀 더 귀를 기울여야 했던 게 아닐까 싶다. 동시에 틀 자체를 다시 검토하고 재구성해내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한다. 내 일처럼 여기고 안심할 수 있는 목소리도 중요하지만, "이건 내 일이 아닌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며 반성폭력 내규 속 '여학우'에 자신을 대입시킬 수 없는 채 여성주의에 반감을 가지게 되는 목소리의 맥락도 더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엘리트 학생으로서의 반감 혹은 단지 여성주의의 정치성으로 인한 반감에서 비롯되었다고 치부해버릴 것이 아니라 개인 정체성에서의 차이를 부정당하고 젠더로 환원된 여성들의 목소리일 수 있는 것이다.

 

 

-글을 써놓고 다시 읽어보니, 자칫 새맞이 시기의 반성폭력 담론들과 학내 반성폭력 운동을 분리시켜 사고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고, 반성폭력 운동의 의미가 축소/왜곡되어 이해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서는 새맞이 시기의 반성폭력 이란 주제가 범람하는 현상을 학내 '반성폭력 운동'의 연속선상에서 위치시켜서 생각하기보다는 사회대 새맞이에서 '공동체의 시선'으로 여성주의에서 반성폭력 이란 주제를 절단하여 분리시키게 되는 맥락으로 생각해본 것이다.  

 나는 이 글을 겨울딛기 디딤이 친구들과 작은 세미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나와 그/녀들의 찜찜함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쓰게 되었다. 이 글은, 어떻게 보면, 지난 새맞이 과정에서 새맞이 주체로서의 나의 생각/행위들에 대해 스스로 비판적으로 다시 생각하고 반성하는 의미이기도 하고, 아직까지도 앙금져 남아 있는 내 감정들을 풀어내보려는 노력이기도 한 것 같다.

 새맞이 시기에 이루어지는 반성폭력 논의들은 학내 반성폭력 운동과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으며, 이 시기의 모순이나 문제점들이 개인 주체들의 역량 부족만은 아니라는 것, 반성폭력 운동 자체 내의 여러 논쟁점과 딜레마들과 맞물려 있다는 것-그리고 이것은 또 그 운동이 가진 내부 모순이라기보다, 가해자 중심의 사회, 여성들의 목소리를 존중하지 않는 사회에 영향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덧붙여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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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X 승무원 투쟁 승리를 위한 300일 촛불 문화제

 

“사회적 약자 돌아보는 나눔 경영, 철도공사가 몸소 실천해야”


KTX 승무원 투쟁 승리를 위한 300일 촛불 문화제


- 12월 22일(금) 늦은 6시 세종로 사거리 -



“국민의 다수가 철도공사는 틀렸고, KTX 승무원의 주장이 옳다고 합니다. 노동계와 여성계는 물론이고 학계, 시민, 종교, 법조, 문화예술 등 각계각층에서 KTX 승무원 문제의 해결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정부만 입을 닫고 있고, 철도공사는 모르쇠와 호도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합리적으로 문제가 해결되길 바랍니다.”

- 12월 19일, KTX 승무원 문제의 연내 해결을 촉구하는 각계각층 연대 선언 중 -



지난 19일 서울역 광장에서는 “KTX 승무원 문제 연내 해결을 촉구하는 2000인 선언” 기자회견이 열렸습니다. 기자회견을 주최한 승무지부에서는 2,000명을 훌쩍 넘어 2,828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연대 선언에 참여하였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기자회견 참석자들은 철도공사가 승무원들을 직접고용하여 시민들의 바램을 더 이상 외면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바로 이튿날, 철도공사 이철 사장은 “구세군 종소리와 ‘나눔’ 경영”이라는 제목으로 한 언론사에 <기고>를 했습니다. 날씨가 추워질수록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약자에게 눈길을 돌리는 마음 씀씀이가 살갑다며, ‘나눔’ 경영이라는 말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KTX를 타봤다는 어느 보육원생의 들뜬 목소리를 들으며 기차가 싣고 가는 것이 단순히 사람과 화물만이 아니라는 걸 알았”고, “기차는 어려운 이웃들의 꿈도 함께 싣고 달리는 것”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새해에는 모든 기업들이 더 많은 ‘나눔 경영’으로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를 기대한다며 기고문을 마치고 있습니다(출처: 네이버 뉴스).

옳은 소리입니다. 감동적인 글입니다. 그러나 이철 사장이 잊고 있는 것은 ‘사회적 약자’는 바로 당신 옆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고객들의 꿈을 실어 나르며 이들의 안전을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하루아침에 일터를 잃고 거리에서 외침을 한지 어느덧 300일을 맞이하는 승무원들은 바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운운하는 철도공사가 내몬 사회적 약자입니다. 이들은 일터로 돌아갈 수 있기를 기대하며 하얀 전지에 소망 한 자락을 남기고, 야광봉으로나마 ‘직접고용’을 만들어내고, 간절한 염원을 담아 풍등을 날리고, 노란 풍선에 꿈을 실어 보내는 사회적 약자입니다.

오는 금요일 세종로 사거리에서는 KTX 승무원 문제가 연내에 해결될 것을 기원하며 2000인 선언에 동참했던 그 마음으로, 새해에는 거리에서가 아니라 KTX에서 승무원들을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노란 풍선에 소망을 담았던 그 마음으로 열한 번째 촛불을 밝힙니다. 촛불문화제에 함께 하셔서 승무원 직접고용을 위한 의지와 연대의 힘을 모아주시기를 요청합니다. 감사합니다.



◎ 일시: 2006년 12월 22일(금) 늦은 6시~

◎ 장소: 세종로사거리 (동아일보사 맞은편, 동화면세점 앞)


◎ 프로그램

  ♠ 문화제 알리기

  ♠ 여는 마당 공연 : 풍물패 ‘삶터’

  ♠ ‘다시 시작이다’ : KTX 승무지부 조합원들의 희망 글 & 공연

  ♠ 페미니스트 가수 안혜경 공연

  ♠ 세종문화회관 합창단 공연

  ♠ 꽃다지 공연

  ♠ 문화제 정리


(문의: KTX 승무지부 010-7511-4868 / 여성노동네트워크 011-9894-2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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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X승무원 문제 연내해결을 촉구하는 2000인 선언” 투쟁에 연대합시다

여성노동네트워크(http://home.freechal/joynet)에서 가져왔다.

KTX 투쟁이 이번 겨울을 넘기지 않고, 기쁨의 마침표를 찍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

많은 단위들과 개인들이 함께 했으면 좋겠다.

 

 

 

*

 

2000인 선언과 당일 기자회견 및 행진에 참여자가 너무 적을까 걱정됩니다.

뜻 있는 많은 분들이 함께 할 수 있게, 여기 저기 많이 퍼뜨려주세요.

 

그리고 당일 기자회견과 행진에 참여할 수 있는 단위도 많이 조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할 수 있는 분은 개인이라도, 아무리 작은 단위라도 전혀 상관없습니다.

조금씩 모으면 큰 힘이 될것 같습니다.

당일 참석 가능한 단위나 개인들도 글을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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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X승무원 문제 연내해결을 촉구하는 2000인 선언” 투쟁 지지․연대 요청서


1. 상 황


  12월 25일은 KTX승무원 파업투쟁이 300일째가 되는 날입니다.

  300여일의 파업을 거치면서 370여명으로 시작한 승무원 대오가 이제 90여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노동법에 보장된 최소한의 권리조차 무시당하면서도 교섭과 대화의 상대조차 찾을 수 없는 하청 노동자의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KTX승무원으로서 보람과 긍지를 갖고 일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전제로 “철도공사 직접고용”을 쟁취하기 위해 우리는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파업투쟁 300일의 경험은 사회초년생 여성노동자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지난 3월1일 파업에 들어간 이후 우리는 단 한 푼의 임금도 받지 못했습니다. 5월15일, 전원이 정리해고 된 후에는 실업급여에 의지하거나 양말판매 등의 재정사업 수입금으로 간신히 생활과 투쟁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철도공사와 정부에 우리의 요구를 전달하고, 투쟁의 정당성을 사회여론에 호소하기 위해 우리는 정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습니다. 집회, 항의방문, 문화제, 기자회견, 거리행진, 단식, 삭발, 점거농성 등 말로만 들었던 것들이 어느덧 우리 스스로 실천해야 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눈물을 흘렸고, 눈물자리가 말라붙은 그곳에 돌멩이처럼 단단한 의지가 생겨났습니다.


  고소고발, 강제연행, 검찰․경찰 조사, 출입금지가처분, 개인 손해배상.....

  투쟁과정에서 생긴 상처는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혔습니다. 너무도 정당하고 소박한 우리의 요구와 희망이 무관심에 내팽개쳐지고, 왜곡하고 억지부리며 문제해결을 회피하는 대통령과 국무총리와 노동부, 그리고 수많은 권력자들의 행태를 목도하면서 우리는 한국사회의 부도덕과 타락의 현실을 생생하게 느끼고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겠습니다. 개인적 욕심으로만 판단하자면, 더 이상 우리사회에 한 치의 미련조차 갖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KTX승무원들이 주장하고 있는 “이 땅에서 더 이상 여성이라는 이유로, 하청된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이유로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정의로운 깃발이 허무하게 내려져서는 안 된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12월 19일을 시작으로 파업투쟁 300일 시점까지 2006년 KTX투쟁의 마지막 집중투쟁을 실천하려 합니다. 한해의 마지막을 감사와 축복 속에 아름답게 마무리지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뜻을 함께 하는 동지들과 “정의로움이 끝내 승리한다”는 신념을 지키고 계실 우리 모든 양심세력들에게 호소합니다.

  “KTX 승무원들의 “12월 19일 선언과 300일 집중투쟁” 함께 해 주십시오.

  비록 많이 힘들고 지쳤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승리의 순간까지 변함없이 투쟁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 투쟁 일정


 1) 2000인 선언

 참가 단위 : 노동, 농민, 학계, 정치, 문예, 종교, 여성, 학생 등 지지․지원 단위

 일     시 : 2006년 12월 19일(화) 오후1시 (일부 변경 가능)

 장     소 : 서울역

 발     표 : 주요 일간지에 발표

 참     조 : 2000인 선언 명단은 12월 16일까지 KTX승무지부에서 취합


 2) 2000인 선언 후 행진


 참가 단위 : 선언 참여자 모두

 일     시 : 2006년 12월 19일(화) 오후1시 2000인 선언 후 곧바로

 장     소 : 서울역 -> 종합청사 -> 청와대 -> 마무리 기자회견.

 참     조 : 집회(행진)신고 과정에서 일부 구간 변경가능


3) 촛불문화제


 일     시 : 2006년 12월 22일(금) 오후6시

 장     소 :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

 참     조 : 장소와 행사내용은 추후 변경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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