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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맞이 시기의 반성폭력 담론은 어째서 찜찜한가.

[2007 새맞이 프로젝트 컴티에 올린 글]

 

 

새맞이 시기에 범람했던 각종 세미나 커리와 교양 자료들을 살펴보다가, 문득 '반성폭력'이란 이름을 달고 있는 텀들이 참 많다는 걸 발견했다. 대부분이다. 새맞이 시기에 여성주의는 반성폭력과 거의 동일시되고 있었다.  

 

어째서 였을까.

 

새로운 관계맺음, 이제 처음으로 시작하는 관계맺음이 많은 새맞이 시기에 반성폭력이라는 주제가 가장 시급하게 필요하기 때문에, 라는 일반적인 이유를 생각해내보지만, 

 

또한, 성폭력이 일상화되어 있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확실히 다른 캘린더들보다는 훨씬 많은 사람들이 여성주의라는 담론, 반성폭력이란 주제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이 새맞이 시기에 반성폭력이란 주제를 심화, 확장시키고자 하는 활동가적 마음을 떠올려보지만,

 

그런데도 어딘가 모를 찜찜함.



 

- 공동체라는 (남성적) 주체와 새내기 (여학우)라는 피해자의 이분법의 성별화

 

기존의 새맞이상에 대한 논의들을 살펴보면서, 새맞이 시기에 다양한 새맞이 주체들 사이의 차이들이 드러나기 보다는 '공동체'의 존속을 필요근거로 집단적 주체를 가정하게 되고 과정/결과적으로 단일한 공동체의 목소리만이 주로 재현된다는 것을 느꼈었다.   

 

이러한 기존의 새맞이 상과 연결시켜 생각해볼 때, 공동체의 건설 혹은 재구성이 (공공연한 동시에 암묵적일지라도) 위계적으로 가장 중요한 목표를 차지하고 있는듯한 새맞이 시기에 여성주의들의 이야기 중 가장 많이 논의되는 주제가 ('독자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반성폭력이라는 건 의미심장하게 여겨진다. 어딘가 찜찜하다. 아주아주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새맞이 시기 신준위에서 논의되는 반성폭력이란게, '우리 공동체에 일어나면 골칫거리/말썽/수치스러운 일이 될 성폭력 사건을 기왕이면 미리 예방하면 좋겠다', '우리 공동체에 들어올 새내기 학우들은 되도록이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도의 인식이 아닐까 하는 우려가 된다.

 

주체와 피해자라는 이분법, 그리고 이러한 이분법의 성별화는 남성 주체의 이해()와 환상 속에서 구성된 '침묵하는 피해 여성'이란 관념을 낳기도 한다(이 문장은 정희진 씨 글에서 인용). 새맞이 시기 새맞이의 주체-새맞이상 논의를 바라보며 느꼈던 새맞이 시기에 형성되는 단일한 목소리로서의 '공동체'라는 집단적 주체-와 잠재적 피해자로서의 새내기로 이분화되고 있지는 않은가. 동시에 이 이분법은 잠재적 피해자인 새내기를 주로 새내기 '여'학우로 사고하게 됨으로써 성별화되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찜찜함이 있다.   

 

 

 

- 성별화된 이분법의 의미와 가려지는 것들

 

여성들이 공동체에서 맡아왔던 역할들, 차지하는 부분들은 셀 수 없을만큼 많을 수 있고, 절반 이상의 중요함을 지니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위와 같은 이분법적 사고에서는, 공동체에서 여성들의 존재를 인식하는 틀이란 건, 기껏해야 '여성=성폭력의 잠재적 희생자/피해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결과아닐까. 피해자인 여성만 보인다는 것, 말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것, 피해자의 목소리만이 그들의 귀에 쉽게 들릴 수 있고, 쉽게 인정받을 수 있다는 슬픈 현실의 반영이 아닐까.  

 

특히나 지금 있는 구성원으로서의 여성들을 재사고하는 형태의 반성폭력 담론, 여성주의의 논의가 아니라, '우리 공동체'에 새로 들어올 '새내기 여학우'가 이상적인 잠재적 피해자상으로 굳어져, 이들을 희생양/인질로 삼은 채, 기존의 가부장적 인식에 편승해서 반성폭력 담론의 확장을 이루고자 하는 게 아닌가(그런 전략이 과연 가능한지가 의문이지만). 그게 찜찜하고 무서운 것이다. (실제로, 새맞이 시기에 '여자 신짱'/'남자 신짱'이란 이름으로 대표되는, 이와 유사한 각종 성역할 분리/분업이 이루어짐에도 불구하고 이런 분리/분업들이 기초하고 있는 생각에서 가부장적 신화와 공모할 위험성이나 여성노동에 대한 성격을 이해하고자 하는 학습에 대한 논의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단지, 폭력의 '피해자'가 되지만 않는다면, 여성들은 공동체 내에서 아무런 문제 없이 생활해나갈 수 있나? 성폭력적 상황에 대한 학습과 예방의 노력은 최소한의 안전망 정도가 아닌가? 새맞이 시기 반성폭력이란 주제를 가장 많이 택하게 되는 바탕의 생각이, 공동체 내에서 폭력의 '피해자'가 나타나는 순간, 공동체는 고난의 과정을 겪는다는 생각하는 것, 피해 자체에 주목하기 보다 공동체의 치부가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것, 성폭력 사건이 공동체의 수치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얼마나 벗어날 수 있는지를 되짚어 보자는 것이다. 여성주의자들이 성폭력 피해자들을 생산해냄으로써 공동체의 분열을 꾀한다는 그런 말도 안되는 음모론적인 이야기들이 비공식적으로는 여기저기서 공감받는 맥락과 연결시켜 생각해볼 수도 있다.  

 

이분법에서 각각의 범주들은 주로 겹쳐지지 않는 상호배타적인 것으로 설정되기에, 위와 같은 이분법은 공동체 내의 구성원으로서의 여성들의 문제, '성폭력'이란 개념논의만으로 설명해낼 수 없는 성별 권력관계를 보이지 않게하거나 개인간의 관계에서의 문제로 축소시키는 것과 동시에, 새내기 여학우들을 피해자화하기 쉽다는 데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반성폭력 세미나를 하면서 피해자화의 함정을 조심하자는 내용을 아무리 강조한다 한들, 새맞이 시기 위와 같은 이분법적 사고 속에서 이미 새내기 여학우가 피해자로 가정된 채 각종 논의와 실무들이 진행되고 있다면, 틀 자체가 이미 그렇다면, 세미나에서 피해자화에 대한 글을 몇 개 더 읽는다한들 그 의미가 얼마나 와닿을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정희진씨는 자신의 글에서 '피해자화가 여성에게 권력을 부여하기도 한다. 여성들이 '피해자 정체성'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은 피해자일 때만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예전에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나를 포함하여 여성주의자인 어떤 친구들이 새맞이 시기에 반성폭력 담론의 확장을 위해 노력하게 되는 주요 이유 중의 하나가 이 '피해자 정체성'에 매력을 느끼는 것과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있다. 이 시기에는 분명 우리가 우리의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이야기의 장을 만들기만 하면 '들어주려는/듣는' 사람들이 (평소보다) 많다. 그런데 그건 우리의 이야기가 피해자의 목소리에 가장 가깝기 때문이 아닐까. 나 자신만 해도 새맞이 시기 각종 반성폭력 세미나나 반, 문화팀 논의에서 이전 새맞이 시기의 내 '피해'들을 들추어 내어 예로 들면서 정당화를 시도했던 적이 많았다. 당시의 나 자신을 '새내기 여학우=피해자'로 고정시켜서 지금의 나와는 다르게 여겼던 느낌도 든다. "그때의 나같은 일을 겪는 새내기 여학우는 없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면서 나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에 대한 맥락보다는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분리시키면서 당시의 '피해'상황과 행위에만 주목했었던 게 아닐까. 그 때와 '같은' '상황과 행위'만 벌어지지 않으면 되는 건가. 비록 내가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피해자의 목소리를 내는 게 괴롭지만 어쨌든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고 실무에 반영이 된다는 데서 이를 '권력'이라고 여기기도 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정말 이것은 권력이었을까. 왜 나는 내가 내는 피해자 목소리에 스스로 소외되는 느낌과 무언가 나를 속이는 느낌을 계속해서 가져야 했던 걸까.

 

권력일까, 라는 생각을 잠시 미루고 또 생각해보자면,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머릿속에 있는 새내기 여학우를 위해서 그런 말들을, 일들을 해왔던 것일까. 새맞이 시기 반성폭력 논의들 중에서 내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스스로가 치유되고 있다고 여긴 적이 거의 없었다. "다만 이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올해 또 내 눈앞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나 비슷한 일을 듣는 것이 너무 두려워, 그 두려움이 내 활동의 주요 원동력은 아니었나.  

 

그랬기 때문에, 새맞이 시기에 새내기 여학우들에게 느끼는 어떤 종류의 '배신감'이 컸던 것은 아닐까. 내가 신준위를 할 때, '쟤는 저게 불편하지 않나.'라는 생각이나 여성주의에 덜 우호적인 여학우들을 볼 때에 드는 섭섭함은 어디서 나오는 것이었을까.  새내기는 대학의 여성주의 담론을 반성폭력 내규를 통해 처음 접하게 된다. 자신을 희생자/피해자의 틀과 일치시킬 수 없는 목소리들에도 좀 더 귀를 기울여야 했던 게 아닐까 싶다. 동시에 틀 자체를 다시 검토하고 재구성해내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한다. 내 일처럼 여기고 안심할 수 있는 목소리도 중요하지만, "이건 내 일이 아닌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며 반성폭력 내규 속 '여학우'에 자신을 대입시킬 수 없는 채 여성주의에 반감을 가지게 되는 목소리의 맥락도 더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엘리트 학생으로서의 반감 혹은 단지 여성주의의 정치성으로 인한 반감에서 비롯되었다고 치부해버릴 것이 아니라 개인 정체성에서의 차이를 부정당하고 젠더로 환원된 여성들의 목소리일 수 있는 것이다.

 

 

-글을 써놓고 다시 읽어보니, 자칫 새맞이 시기의 반성폭력 담론들과 학내 반성폭력 운동을 분리시켜 사고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고, 반성폭력 운동의 의미가 축소/왜곡되어 이해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서는 새맞이 시기의 반성폭력 이란 주제가 범람하는 현상을 학내 '반성폭력 운동'의 연속선상에서 위치시켜서 생각하기보다는 사회대 새맞이에서 '공동체의 시선'으로 여성주의에서 반성폭력 이란 주제를 절단하여 분리시키게 되는 맥락으로 생각해본 것이다.  

 나는 이 글을 겨울딛기 디딤이 친구들과 작은 세미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나와 그/녀들의 찜찜함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쓰게 되었다. 이 글은, 어떻게 보면, 지난 새맞이 과정에서 새맞이 주체로서의 나의 생각/행위들에 대해 스스로 비판적으로 다시 생각하고 반성하는 의미이기도 하고, 아직까지도 앙금져 남아 있는 내 감정들을 풀어내보려는 노력이기도 한 것 같다.

 새맞이 시기에 이루어지는 반성폭력 논의들은 학내 반성폭력 운동과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으며, 이 시기의 모순이나 문제점들이 개인 주체들의 역량 부족만은 아니라는 것, 반성폭력 운동 자체 내의 여러 논쟁점과 딜레마들과 맞물려 있다는 것-그리고 이것은 또 그 운동이 가진 내부 모순이라기보다, 가해자 중심의 사회, 여성들의 목소리를 존중하지 않는 사회에 영향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덧붙여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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