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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2/27
    벌레(2)
    하노이
  2. 2007/02/16
    부드러운 칼, 정호승(2)
    하노이
  3. 2007/02/16
    경험이 위계적인 권력이 되지 않도록
    하노이
  4. 2007/02/12
    <당신은>
    하노이
  5. 2007/02/01
    권태기인가, 조증인가.
    하노이

벌레

 

나는

벌레를 잡지 못한다. '잡지'?

벌레에 손대지 못한다.

벌레를 맨손으로 만지지 못한다.

 

동생과 살기 위해 오래된 투룸으로 옮기면서,

이전에는 혼자 냉랭하게 깔끔한 신축 원룸에서는 단 한 번 마주친 커다란 바퀴벌레와 비슷한 크기의 벌레들을

이 곳에서는 종종 만나야만 했다.

 

동생이 있을 땐 괜찮지만,

동생이 없을 때 벌레와 마주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걔도 나 땜에 놀랐겠지만, 나도 걔땜에 놀란다. 서로를 확인하고 서로 동작이 경직되었음을 느낀다.

 

마주쳤던 걔가, 내가 당황한 사이에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면,

그 이후가 더욱 공포스러워서, 나는 점차 강해지게 되었다.

 

 



조용히 고무장갑을 끼고 신발을 신고 나서 벌레를 향해

에프킬라 류의 스프레이를 열심히 뿜어대는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동생이 없는 기간이 길어지면,

집에 벌레의 시체들은 하나 둘 늘어났다.

벌레를 건드릴 수 없는 나는, 스프레이를 뿜어댄 이후를 처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안하긴 하지만, 내가 살아야 되니까 어쩔 수 없어..'

라고 생각했었다.

 

오늘은..

통로도 아니고 바로 내 방바닥의 주요한 부분에서 벌레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엄지손가락만한 벌레였다. 더듬이 부분에는 먼지를 이고 있어서 문득 미안뜨끔했다.

 

당황한 나는,

근처에 있던 신문지로 그 벌레를 덮고, 눌렀다. 맨손으로!

잠깐 누르다 신문지를 들춰봤는데 벌레가 생생한 모습으로 기어 나오려 해서

나도 모르게 신문지를 다시 덮고 꾸욱꾸욱 눌러댔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신문지를 들췄다가

파편을 흘깃 보고, 놀라서 다시 덮어버렸다.

 

죽였다, 는 생각이 드니까 무서워졌다.

 

내 두 손을 가만히 쳐다봤다. 무서웠다.  내 손이, 내가.

 

사라지면 내가 마음이 불편하다고 해서(물론 불편함 이상으로 마음이 긴장되긴 하지만..)

징그럽다고 해서.. 무섭다고 해서..

어쨌든 내가 그렇게 죽여도 되는 건지.

문득 무서워졌다.

 

찜찜한 마음으로 신문지 덮인 그 상태 그대로 두고,

집을 나서는데

 

"벌레 보듯 한다"는 일상적인 표현이 떠올라서 더 괴로웠다.

 

 

내가 좀 더 힘들더라도

살아서 내보낼 수 있는 방법이 어떻게.. 없을까 ㅠ_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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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칼, 정호승

부드러운 칼, 정호승

 

칼을 버리러 강가에 간다

어제는 칼을 갈기 위해 강가로 갔으나

오늘은 칼을 버리기 위해 강가로 간다

강물은 아직 깊고 푸르다

여기저기 상처 난 알몸을 드러낸 채

홍수에 떠내려 온 나뭇가지들 옆에 앉아

평생 가슴 속에 숨겨두었던 칼을 꺼낸다

햇살에 칼이 웃는다

눈부신 햇살에 칼이 자꾸 부드러워진다

물새 한 마리

잠시 칼날 위에 앉았다가 떠나가고

나는 푸른 이끼가 낀 나뭇가지를 던지듯

강물에 칼을 던진다

다시는 헤엄쳐 되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갈대숲 너머 멀리 칼을 던진다

강물이 깊숙이 칼을 껴안고 웃는다

칼은 이제 증오가 아니라 미소라고

분노가 아닌 웃음이라고

강가에 풀을 뜯던 소 한 마리가 따라 웃는다

배고픈 물고기들이 우르르 칼끝으로 몰려들어

톡톡 입을 대고 건드리다가

마침내 부드러운 칼을 배불리 먹고

뜨겁게 산란을 하기 시작한다

 

-

 

분노를 동력으로 살아가는 건, 내가 지친다.

분노 뒤에 웃음이, 슬픔 뒤에 행복이 올거란 믿음은,

바로 지금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할 뿐,

바로 지금의, 뒤엉켜 연결된 여러 가닥들을 느끼지 못하게 할 뿐.  

 

오래도록 슬퍼하고, 슬퍼하고, 슬퍼하고, 슬퍼하고 싶다.  

언제고 다시, 누구에게든 슬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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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이 위계적인 권력이 되지 않도록

 

 

나이가 들수록, 학년이 올라갈수록 말이 많아진다.

내 세계의 부서지고 깨짐을 경험하고 싶어서 말을 할지언정,

내 말의 옳음-이런 게 있기나 한건지-을 확인하기 위해,

말을 하고 싶진 않아.  

 

피해의 폭로라는 전략과 피해자화라는 폭력 사이에서,

자신의 편협함을 망각하는 편협함과 인정투쟁의 절박함 사이에서,

 

경험이 위계적인 권력이 되지 않도록.

 

 

- 2007년의 서늘한 마침표와 시작점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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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졸렬해지자. 좀 더.

숨 막힐 것 같은 '공적'언어들에 대한 강제에 움츠러들지 말자.

졸렬해지자, 마음을 내뱉자.



<당신은>


 당신은, 새터 도중에 내가 누군가 챙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술 마시는 양을 조절해본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함께 있던 어떤 동기/후배/선배가 과반이 “모두” 모였다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을” 때, 눈치 챌 수 있었습니까?

 당신은, 그 사람이 혹시 어디선가 혼자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온 새터 장소를 뒤지고 다녔던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동기/선배/후배에게 “힘들지 않냐”고 마음을 담아 물어보는 일을 했었습니까?

 당신은, 아래와 같은 일을 겪고 난 뒤 새터 이후에 “미안하다”라는 말 한마디를 함으로써/들음으로써 기억에서 지워버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고학번 서포터즈’에서 실질적으로 인정받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아니었고 그것이 내 잘못도 아니었음에도 나는 ‘미안해’하고, 또 ‘고마워’해야 하는 감정의 혼란을 겪었다. 몸이 부딪쳐 튕겨나갔지만 그것은 몸이 약한 내 잘못인 것 같았고 낼 수 있는 목소리를 최대한 크게 내도 뒤처지는 것 역시 다른 반 서포터즈들과 비교해 ‘약점’이 될 수 있는 내 잘못이 될 수 있었다. (중략..) 폭력적인 언사임에도 불구하고 ‘선배/동기로서’의 미안함과 죄책감이 앞섰다.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투명한, 사라진 존재로 만드는 분위기. 자신이 발 딛고 서 있는 바로 그 곳이, 자신이 없어야 할 곳임을 느낄 때, 가슴까지 따끔한 가시밭 위를 걷는 기분이 든다.

 

- <2006년 사회대 새터의 분위기 폭력을 ‘느끼고’, 비판하며>, 작년 새터 직후 한 학우의 글


  “남자애들은 이렇게 응원하고 여자애들은 뭐, 옆에서 박수치면 되겠다.” , “응원을 하려면 높은 목소리는 효과가 없어. 낮은 목소리가 있어야지.”라는 말에서, 그런 말뿐이 아니라 응원에 남자들의 ‘우렁찬 목소리와 힘찬 동작들’이 ‘효과적’이라고 생각되는 분위기.. (중략) ‘저도 07,08,09 새터에까지 와서 선배들(대부분이 남자)처럼 멋진 고학번 서포터즈가 되고 싶어요’ 라고 다짐하는 학우도 있지만 화장실에서 겨우 조그맣게 ‘결국은 남자들만 남는 건가요’ 라고 묻는 학우도 있다는 걸 아시는지. (중략) 반의 열광적인 다른 반 쳐들어가기를 따라갈 수가 없어서 쉬러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있었다는 건 아시는지.

 - 2006년 사회대 새맞이 기획단 문화팀 평가서 중

 

 

 겨울딛기 디딤이들은 보았습니다. 과거 몇 년 동안 여러 비판의 목소리들이 끊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응원들이 2006년에는 ‘언터쳐블(untouchable)'한 응원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며 점점 더 손쉽게 고민을 놓게 되는 상황들을. 그 속에서 고학번 서포터즈의 영향력은 해가 갈수록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고, 심지어 응원을 주도하는 상황들을. 2006년 새터 이후에, 어떤 반에서는 반 이름의 사과자보를 내기도 하고 어떤 반에서는 반대표의 사과문이 타 반의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사후(事後)에 그리 야단스레 사과할 일을, 어째서 그 당시에는 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내 의지가 아닌, 술의 탓입니까. 아니면, 새터는 ‘원래 그러고 놀려고 가는’ 곳이어서 저지르고 보는 것입니까.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서 같은 사건을 공유한 사람들. 그러나 그 기억들은 각기 다를 수 있습니다. 또 기억이란 것이 왜곡되고 굴절될 수 있고, 기억은 쉽게 추억이 되고 추억은 쉽게 아름다운 색으로 칠해질 수 있습니다. 기억의 ‘차이’를 인정한다면, 이제 생각해봅니다. 누구의 기억은 쉬이 인정받고, 누구의 기억은 조용히 은폐되는지를. 누군가의 기억이 ‘대다수의 기억’으로, 새터에 대한 ‘보편적 기억’으로 인정받는 반면에 누군가의 기억은 개인적인 기억으로 묻혀 개인의 고통으로만 남게 되고 어디로도 들리지 않게 된다면, 어떤가요. 인정받은 기억과 인정받지 못하는 기억은 단순한 차이로 끝나지 않습니다. ‘모두가 즐거웠던’ 새터에서 ‘즐기지 못한’ 나는 사회대의 구성원이 아닙니까? ‘재미있었던’ 새터 이야기에 쉽게 끼지 못하고, 어색한 미소만 지으며 다른 이의 말을 듣고만 있는 나는 ‘우리’ 공동체의 일원이 아닌가요? 내년 내후년 새터에, 작년 재작년 새터의 기억을 떠올리며 다른 일정을 핑계로 씁쓸하게 불참하는 고학번 선배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까? 앞으로의 대학생활에서 새터의 기억은 편협되게-모든 개인의 기억은 편협하겠지만, 자신의 편협성을 인정하지 않는 그 편협함을 말하고자 해요-기억되고 비슷한 기억끼리 반복 재생산이 이어지기 쉽지 않을까요.

 

 내가 나의 기억을 말하고, 나의 기억을 기억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내가 나와 유사한 여러 기억들과 함께 <우리>의 기억을 드러내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사람의 기억, <우리>들의 기억도 존재하고 있음을 나 자신에게, <우리>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인정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기억과 다르다고 해서, ‘없었던’ 기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 기억과 우리의 기억이 알려짐으로써 당신과의 관계에 작게나마 ‘변화’가 있기를 바래봅니다. 당신에게 2007년 새터에서는 내가, 우리가 당신의 눈에 보이기를, 당신이 우리를 느낄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내가 나의 기억을 말하듯, 우리가 우리의 기억을 말하듯, 그리고 인정받기를 원하듯이 당신의 기억도 들려질 수 있기를 원해요. 재미있으셨나요? 즐거우셨나요? 우리와 비슷한 부분이 있으셨나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언제든 더 활발한 대화를 원하시는 분이라면, 겨울딛기 프로젝트 커뮤니티로 방문해주세요. 들려주세요. 당신의 기억도. 

 

2007 사회대 겨울딛기 프로젝트 온라인 커뮤니티 주소 http://club.cyworld.com/steponwi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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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기인가, 조증인가.

권태 [倦怠]

[명사] 어떤 일이나 상태에 시들해져서 생기는 게으름이나 싫증.

 

조병 [, mania]

기분이 들떠서 쉽게 흥분하는 상태가 1주일 이상 계속되는 증세.

...증세는 유쾌한 감정, 자신감, 자기도취, 자기확신, 자기만족, 허세, 낭비벽 등이 나타난다. 의욕적으로 여러 계획들을 세워서 바로 실패하거나 포기할 만한 일들을 벌여 놓기도 한다..

 

-

 

모임 평가글을 써야 하는데(써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계속해서 글은 쓰지 않고,

결국은 블로그 포스팅을 하고 있다. 에엑.

 

지난 2주정도 동안, 무척이나 '꽉찬' 생활을 해오면서도,

나름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일들을 착착 했다고 생각했는데

 

지난 2주정도 보다 덜 꽉찬 일정이었던 이번 주는 어째 이상하다..

 

몸보다 머리가 훨씬 바쁘고 피곤해한다. 많이 활동하지 않았는데, 머릿속에서는, 생각조각들이 뭉치고 뭉쳐서 질질 흘러내린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흘러내리고, 회의 중에도 흘러내리고. 자기 전에도 흘러 넘치는 게 보인다. 흑. 머리 땜에 몸이 피곤함을 느끼고 있다.



남은 방학기간과, 다가오는 한 학기에 대한 생각들, 하고 싶은 계획들이 뭉클뭉클 솟구친다.

문제는, 생산적인 계획 세우기가 아니라, 붕 뜬 구름 같은 생각들로,

바로 지금, 내가 해오던 것들에 대한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도피하고 있는 느낌이 함께 든다는 것이다.

 

해보고 싶은 여러 가지 것들을 떠올리며 생각하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어째 좀 찜찜하다는 것. 꺄악.

 

마음을 가라앉게 할 필요가 있다. 좀 더 자세히 마주할 필요가 있다.

 

그래도 떠오른 생각들 중에 몇 개는 대략이라도 메모해둬야지..  

 

-학내 성소모임, 혹은 여성주의 학회 관련한 네트워크 형성 방안이 없을까

 

-학생모임과 성희롱, 성폭력 상담소와의 연계 방법은 어떤 식으로 (활발하게) 가능할지 

 

-1학기에 학교 외부 활동의 수를 줄여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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