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부드러운 칼, 정호승

부드러운 칼, 정호승

 

칼을 버리러 강가에 간다

어제는 칼을 갈기 위해 강가로 갔으나

오늘은 칼을 버리기 위해 강가로 간다

강물은 아직 깊고 푸르다

여기저기 상처 난 알몸을 드러낸 채

홍수에 떠내려 온 나뭇가지들 옆에 앉아

평생 가슴 속에 숨겨두었던 칼을 꺼낸다

햇살에 칼이 웃는다

눈부신 햇살에 칼이 자꾸 부드러워진다

물새 한 마리

잠시 칼날 위에 앉았다가 떠나가고

나는 푸른 이끼가 낀 나뭇가지를 던지듯

강물에 칼을 던진다

다시는 헤엄쳐 되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갈대숲 너머 멀리 칼을 던진다

강물이 깊숙이 칼을 껴안고 웃는다

칼은 이제 증오가 아니라 미소라고

분노가 아닌 웃음이라고

강가에 풀을 뜯던 소 한 마리가 따라 웃는다

배고픈 물고기들이 우르르 칼끝으로 몰려들어

톡톡 입을 대고 건드리다가

마침내 부드러운 칼을 배불리 먹고

뜨겁게 산란을 하기 시작한다

 

-

 

분노를 동력으로 살아가는 건, 내가 지친다.

분노 뒤에 웃음이, 슬픔 뒤에 행복이 올거란 믿음은,

바로 지금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할 뿐,

바로 지금의, 뒤엉켜 연결된 여러 가닥들을 느끼지 못하게 할 뿐.  

 

오래도록 슬퍼하고, 슬퍼하고, 슬퍼하고, 슬퍼하고 싶다.  

언제고 다시, 누구에게든 슬퍼하고 싶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