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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오래될, 부탁.

나(들)를 포함한 너(희)에게 하고픈 이야기가 있다. 지금 난 잠들지 못하고 있어. 말해두고 싶은 것은, 이 이야기는 지금 막 불쑥 생각난, 아무 것도 없는 공간에서 두둥실 나타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생각했다. '언젠가는' 이라고. 생각했어. 매번 다르게 나타나는 그 같은 상황(들)을 몇 십 번, 몇 백 번 떠올렸는지 너(희)가 그 사실을 알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언젠가는' 내 몸과 내 심장과 내 마음 한 귀퉁이에 쑤셔넣어져, 내 일상 곳곳에서 튀어나와 내 발목을 붙잡고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이 이야기를 기록할 수 있기를. 어디든지, 어떻게든, 언젠가는. 제발 내 속에서만 나만을 파괴하지 않을 수 있기를. 하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함께 파괴되자는 권유는 아니야. 단지 나는 그만. 이젠 파괴가 아니라 마주보고 있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나(들) 중의 내가, "내가 너를 덮치면 어쩔려고" 류의 농담조로 말을 한다는 건, 내가 무서웠기 때문도 있다, 내 무서움도 섞여있었다는 거야. 너와 내가 매우 큰 변수라서가 아니라, 일순간 너와 내가 남자와 여자로 환원되기 쉽게 느껴지는 그 상황이 무서웠기 때문에 나는 농담처럼 내 공포를 섞어 드러낸 걸지도 모른다. 반어적인 말이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야. 분명 나는 나(들) 중의 내 선택으로, 너(희)와 함께 하고 있었다. 하지만. 편안함과 즐거움, 재미와 흥분, 설렘과 함께, 공포라는 감정도 있었다는 거야. 현실에서 내가 너를 정말로 너를 덮칠 수 있는 여건과 의지가 받쳐준다면, 내가 그런 류의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게 아닐까? 강자는 말하지 않고, 통보하지 않고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분위기 조성에 유리한 사람이라는 뜻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해 자기의 관점에서만 이야기해주면 되는 게-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때도 많겠지-그 권력관계라는 거에서의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내가 농담처럼 던지는 그 말-농담이 맞지만-에서 해부되어 들릴 수 있었던 그 목소리도 들어줬으면 하는 건 너무나 큰 바람이었을까. 나조차도 그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한 채, 계속해서 내질러 피섞인 비명이 되었을 때에야 어렴풋이 눈치챘으니까 말이지.

 

내가 농담으로 한 그 말과, 너(희)가 이미 실행에 옮기면서 "우리, xx할까?"라고 물었던 그 때 그 말. 나는 계속해서, 지금까지도, 아마도 앞으로도, 고민했고 고민할테지. 내 말이 폭력적이었을 수 있을까. 마치 젠틀하게, 여성주의적으로 동의를 구하듯 물어보는것'처럼' 여겨지는 너(희)의 말이 폭력적이었을 수 있을까. 모두 내 책임으로 넘길 수 없더라도, 어쨌거나 나는 그 말을 미리 함으로써 내가 너(희)에게 빌미를 던져준 것일까. 나는 차마 끝까지 쿨하게 갈 수는 없었던 사람일 뿐일까. 그 때 나는 끝까지 잠들지 못하고 계속해서 수 십가지 갈래들을 상상하며, 끊임없이 가지를 뻗쳐나가 햇빛을 못보게 되어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나무처럼, 그렇게 밤을 지샜다. 그냥 해줄 수도 있는 게 아닐까. 나는 대체 무엇을 원하는 걸까. 너(희)는 내게 원하는 걸 말했는데, 나는 나(들)안의 여러 나의 목소리들 하나 하나가 앞다투어 지껄여대는 통에,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되었다.

 

나(들) 중의 나는 너(희)가 미웠다. 너(희)가, 너(희)의 흔적이.

너(희)가 그 자리들에서 소위 '진보'라고 일컬어지고 '좌파'라고 일컬어지고 '여성주의자'라고 일컬어지는 따위의 말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 내게 너(희)를 그렇게 칭하며 이야기할 때, 나는, 내게 이미 행동을 취하며 "우리, xx할까?"라고 말하고 있는 바로 그 상황에서의 너(희)의 모습이 언제나 어김없이 떠오른다. 나는, 너(희)의 흔적에 포함 된 진보니 좌파니 여성주의 따위 조차도 밉다. 너(희) 자체를 미워할 수 없는 마음이어서 일까. 너(희) 자체라는 게 애초에 없어서일까. 나는 그것들이 미웠다. 그것들에 함께 하려 했던 내가 미웠다.

그런 것들을 입에 담거나 관련한 행동을 한다면 보다 더 결백하라는 요구를 하고 싶은 게 아니다. 단지 나는 그 이미지들이 겹치건만, 너(희)는 그렇지 않은 거 같아 보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것.

 

너(희)와 겹치는 생활공간에서 발견되는, 발견할 수밖에 없는 너(희), 너(희)의 흔적도 미웠다. 떠나고 싶었다. 내가 정말 떠난나면, 그 모든 원인이 너(희)에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너(희)가 있는 그 공간이 너(희)로 인해 또 미웠다. 떠나고 싶다. 이제 학년이 높아졌으니, 여학우였으니, 공부할 게 많을테니, 졸업을 해야 할테니, 등등으로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 할 수도 있다. 상관있어 할 수도 있다. 너(희)가 떠나기만 하면, 마치 그걸로 내가 편히 남아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따위는 하지도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런 생각들, 그리고 또 그런 류의 생각을 자기 마음대로의 실행에 옮기게 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니까. 나(들) 중의 어떤 내가 정말 '쟤(들)가 떠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하더라도, 그 어떤 나의 목소리를 인정은 해도 동조하지 못하는 내 목소리들이 더 많다는 걸, 나는 알 수 있다. 그것은,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내가 너(희)를 가장 빨리 떠올리고 가장 많이 원망했던 순간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우리, xx할까?"라고 말하고 싶은 순간이다. 그 절망감. 어떤 나의 마음에 솔직해지고 싶은 순간에, 너(희)의 모습이 재빨리 떠오를 때면, 나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너(희)를 떠올리고 나는 내 욕망의 검열을 강화하고 내 욕망을 회의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어쩌면 이러한 면들은 너(희)에게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 하게 된 어떤 나에게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보다 더 신중해져서 함께 더 즐길 수 있게 될 가능성을 크게 하는 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완전히 잊고 싶지는 않은 일이다. 진심으로. 

 

세상이란 곳은 내 안의 어떤 나도 감히 어찌 할 수 없고, 모든 것을 다 해낼 수도 있는, 지랄 맞은 곳이니, 언젠가의 어떤 나는 너(희)에게 "우리, xx할까?"라고 먼저 말할 수도 있다. 그런 장면도 충분히 상상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언젠가의 어떤 나는 그 때의 어떤 나와 지금의 어떤 나를 모두 포함하는 변화된 변화 중인 변화할 나일 거다. 내 변화에 너(희)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 꽤 크게 차지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것, 그렇게 너(희)는, 나(들)은 서로에게 세상에게 관여 중이라는 것, 잊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좋아한다면, 이해하고자 노력을 한다면, 차이를 확인하고자 한다면, '말, 언어' 그 자체의 한 면만이 아니라, 그 상황과 분위기를, 얼핏 놓치기 쉬운, 말하고 있는 그 사람조차도 모를 수도 있는, 유령같은 타자들의 목소리에 좀 더 귀를 기울여보자고, 너(희)에게도, 나(들)에게도, 부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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