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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1/31
    그 상처가 칼날의 생김새를 닮듯(5)
    하노이
  2. 2007/01/30
    해남여행1 _ 고정희 시인 생가(2)
    하노이
  3. 2007/01/29
    블로그 새단장,(8)
    하노이
  4. 2007/01/29
    더 먼저 더 오래
    하노이
  5. 2007/01/22
    여성으로 '살아가는' 방법,(4)
    하노이
  6. 2007/01/17
    다가간만큼의 멀어짐을 인정하기(4)
    하노이
  7. 2007/01/12
    엄마맞이 청소(7)
    하노이
  8. 2007/01/12
    오랜만이야!(3)
    하노이
  9. 2007/01/12
    새맞이 시기의 반성폭력 담론은 어째서 찜찜한가.
    하노이

그 상처가 칼날의 생김새를 닮듯

 

"개새끼들

미친놈들"

 

지금 나는

엄청 큰 소리로 욕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어딘가 마구마구 지금 내 속에서 들끓는 무언가를 뱉어내야지만이 내가 살 수 있을 거 같다.

 

나는

욕을 입밖으로 잘 뱉어내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어린 시절,

욕하며 싸우시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을 여러 가지 버전으로 지켜보면서-,

욕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시끄러웠다.

웬 고상한 결심이람, 이라고 사춘기 시절에 이를 뒤엎으려는 시도를 해봤었지만,

되지 않았다. 진심으로, 나오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딱히 욕을 해야 할 일들이 생기지도 않았다.

욕 할 마음이 들지 않는데, 옆에서 다 한다고 일부러 욕을 하는 건 유치하게 느껴졌다. 

난 내가 욕을 하지 않는거라고 믿기로 했다. 사실은 못하는 거 였으면서.  

 

대학에 와서, 내가 얻은 것들, 배우고 나서야 내게 절실했음을 알았던 것 중에 하나는

바로, 분노하기, 이다. 정확히는, 분노한 내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기, 랄까.   

바로 이런 마음이 '분노'라는 거구나, 하는 걸 느끼는 법을 배웠던 것이다.

 



내 대학생활의 어떤 시기는, 오롯이, 분노하는 마음만이 내 온 몸을 채우고 나를 움직이게 하기도 했다.

그게 내 분노를 '건강한' 방법으로 해소할 수 있는 길이라 믿기도 했었다.

 

분노보다는 사랑이, 내게 더 행복한 동력일 수 있다는 것,

더 힘든만큼 더 가치있을 수 있다고,  그렇게 받아 안은 이후에 나는 분노하더라도 오래 가져가려 하지 않았다.

분노할 일도 새삼 줄었으며, 편안했다.

 

물론. 그래도 여전히 분노할 수밖에 없는 일들.

분노의 감정을 넘어 스스로 주체할 수 없을만큼 활활 타올라 내가 죽어버려야만 가라앉을 듯한

그런 일들이 있다.. 오늘이, 또 그러하다.

 

"개새끼들

미친놈들"

 

기타 등등의 욕을 하고 싶지만, 또 나오지 않는다.

"개새끼" 라고 하면, 어쩐지 그의 어머니에 대한 공격인 듯한 느낌과, 어째서 '개'취급 받는 게 욕인가 싶기도 하고,

'미친' 사람에 대한 공격처럼 느껴지는 "미친놈들"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런 걸 따지고 있는 나 자신도 미친년일지 모르거든. 내 분노를 알맞게 표현해 줄 수 있는 통쾌한 말들은 과연 있기나 한걸까.

 

모르겠다.  

나는 지금 분노하고 있지만, 그 사정을 공개적으로 밝힐 사정도 되지 못한다. 젠장할. 젠장할.

 

모쪼록 내가 살아나갈 수 있길. 내가 할 수 있는 내 몫을 해나갈 수  있길. 바랄 뿐이다.

 

*[그 상처가 칼날의 생김새를 닮듯]이란 이 포스트 제목은 김연수의 소설들 중에서 가져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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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여행1 _ 고정희 시인 생가

하노이님의 [더 먼저 더 오래] 에 관련된 글.

 

27-28일 여행의 루트를 대강 정리하자면,

 

27일>> 빠른 9시 10분 서울 센트럴시티에서 해남으로 출발 -> 오후 2시경 해남버스터미널 도착 -> 식사 -> 4시 반 고정희 시인 생가가 있는 송정리로 가는 버스를 탔다(1인 850원) -> 5시 좀 넘어서 생가 도착 !!!  -> 6시 45분쯤 해남버스터미널로 가는 버스를 탔다 -> 저녁 7시 반 터미널에서  땅끝마을로 가는 버스를 탔다(1인 3700원) -> 땅끝마을까지는 한 시간 정도 소요 -> 저녁 -> 하얀거탑을 본 후 잠 속으로 

 

28일>> 새벽 5시 반에 일어나서 땅끝 전망대까지 걸어 올라감 -> 약 30분이 걸려 땅끝 전망대 도착, 일출 기다림 -> 구름에 가려 잘 안보이던 해가 7시가 좀 넘어서야 모습을 드러냄! -> 땅끝 모노레일카를 타고 땅끝슈퍼로 이동 -> 땅끝슈퍼에서 해남버스터미널로(한시간 정도 소요) -> 식사 -> 오전 11시 서울로 출발~ -> 4시 넘어서 서울 도착.

 

서울에서 해남까지 걸리는 시간이 길기도 하고, 28일날 오전에 서울로 출발해야 했기에,

해남에서 정말로 가보고 싶은 단 한 곳, 고정희 시인 생가만 꼭 가자고 정한 채로 무작정 내려갔다.

 

대둔산 대흥사나 윤선도와 관련한 곳도 가보고 싶었고 고천암 일몰도 보고 싶었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욕심내지 않기로 했다. 인터넷으로 알아볼 때 해남의 대중교통편이 그리 원활하지는 않다는 이야기와 어느 곳이건 시간을 길게 잡아야 한다는 말을 봤었고, 실제로 버스시간 간격이 참 넓었다. 땅끝마을의 경우엔 그나마 자주 있는 편이지만 버스터미널에서 땅끝마을까지 한시간 정도 걸린다는 거..

 

고정희 시인 생가를 다녀오자 벌써 해는 져서 어두웠고, 날이 생각보다 많이 추워서, 바로 땅끝마을로 가서 자고 일출을 보고 서울로 가기로 했다. 

 

 



해남터미널에서

 

 

터미널에 도착하고 나서, 생가에 가는 버스는 2시간 후에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해남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시골느낌이었다. 좋았다..흐흐) 어딘지 잘 알 수 없어서 무작정 택시를 타자니 어쩐지 겁나기도 했고, 밥 먹고 여기저기 둘러보면 되겠지 하는 느긋한 마음으로 버스 시간을 기다렸다. 인터넷에서는 해남 여행 루트에 시인 생가를 잘 찾아볼 수 없어서 사람들이 잘 모르면 어떡하나 걱정을 했는데 버스 기사 아저씨들 중에서는 고정희 시인 생가 장소를 모르시는 분들이 거의 없었다. 후훗. 물어보고 난 후에 2시간 있다가 버스 시간에 맞춰왔을 때도 아저씨들은 얼굴을 기억해 주시고 어떤 버스를 타면 된다, 어디에 내리면 된다, 등등 신경써주셨다. >_< 호홋.

 

 

 하늘이랑, 하늘과 산이 만나는 선이 참 예뻐서, 마구마구 찍은 사진들.

 

 

버스에서 내려준 곳에서 조금만 더 걸어가면 생가가 나온다. '사람 사는 곳' 같아 보였다.(이상한 표현이네..) 생가와 함께 있는 일반 가정집은 고정희 시인의 유족들이 실제로 살고 있는 집이다. 사람이 있나 확인하고, 생가를 보러 왔다는 걸 알렸고, 들어가서 보세요, 라는 할머니의 말씀을 듣고 가벼운 마음으로 생가에 들어갔다.

 

바로 옆에 늘 이 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어서였는지, 생가 안 역시 누군가가 금방이라도 "여기는 내 방이오", 하고 들어올 것처럼 생기있어 보였다. 난방이 되지 않아 방 안 공기는 차고, 발은 무척 시렸지만, 곳곳에 서려 있는 어떤 기운들 덕분에 마냥 들떠버렸다. 고정희 시인 역시 동인이었던 '또하나의문화'의 여러 동인들이 이 곳을 참 아끼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도록 하는 여러 흔적들. 그 외에도 그녀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의 흔적들과, 그녀의 흔적이 섞이고 섞여, 쌓이고 쌓여서, 어쩜 그리 포근한지. 그대로 거기에 눌러 앉아 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꽤 많이 쌓여있는 방명록들을 넘겨보면서, 기분이 묘해졌다. 시인에게 쓰는, 자기 자신에게 쓰는, 혹은 정해두진 않았지만 이 곳을 찾을 어떤 누군가에게 쓰는, 그런 여러 글들... 나 역시 시인에게, 그리고 언젠가의 나 자신이 봤으면 하는 글을 써두었다. 꼭 다시 올 수 있도록 하는 마음을 다지기 위해서 "다음에 뵐게요."라는 말도 잊지 않고 써두었다는 거. 후훗.

 

+ 참, 고정희 시인이 고모할머니라며 이 곳에 살고 있다는, 11살, 3살짜리 자매인 두 아이. 말친구 해줘서 고마웠고, 은근히 부러웠다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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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새단장,

 

해남 여행 기록을 남기러 들어왔다가,

블로그를 새단장 해버렸다!

 

기본 스킨도 아예 바꾸고,

그 스킨에서 이것저것 편집도 해봤다 헤헤.

 

얼마 전,

덕수궁미술관에 오래도록 머물면서

열심히 열심히 에너지를 쑥쑥 받아왔던,

장 뒤뷔페의 그림과

 

시간이 많지 않아서, 하나 하나 온 신경을 집중하며 보느라

그날 하루 엄청 피곤했지만, 그래도,

나나연작에서 느껴지던 생생함, 열정이 아직까지 뿌듯뿌듯한

니키 드 생팔의 그림을 넣어놔서 기분이 좋다.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던 순간들, 느낌들을

내 블로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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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먼저 더 오래

 

고정희 시인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알고,

언젠가는 가보리라,  결심한지 일년이 좀 지났을까.

 

최근의 여러 무리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이번이 아니면

또 몇 개월을 기다려야 할 지 모른다는 초조함에,

가야 하는 모임을 하나 포기하고, 주말을 비워서 다녀왔다.

 

해남여행을 다룬 수많은 인터넷 글들 중에서

고정희 시인 생가를 여행 루트에 포함하고 있는 여행 안내글을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시인 생가를 방문한 기록들을 자세히 훑으며

어떻게 찾아가야 하는지를 살피다가, 결국 주소 한 줄만 기억해 놓은 채

일단 해남으로 떠났다.

 

여행은 .. 짧디 짧은 시간이었지만,

서울에 올라와서 갑자기 여러 소음들이 낯설게 느껴지고,

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틈 속에 함께 하는 것이 익숙치 않게 느껴질만큼

내게 편안함, 평온함을 안겨주었다.

 

벌써 그 곳에 다시 가볼 생각을 하고 있다.

언젠가는, 이번처럼 차가운 바람과 공기를 온 몸으로 느끼며 떨어야 했던 그런 날 말고,

(이것도 나쁘진 않았지만..) 약간은 따뜻할 때에. 약간만 서늘한 때에. 가보고 싶다.

 

여행에 관한 기록은 곧 남겨놔야지!

 



 

더 먼저 기다리고 더 오래 기다리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기다리는 고통 중에 사랑의 의미를 터득할 것이요

 

더 먼저 달려가고 더 나중까지 서 있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서 있는 아픔 중에 사랑의 길을 발견할 것이요

 

더 먼저 문을 두드리고 더 나중까지 문닫지 못하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문닫지 못하는 슬픔 중에 사랑의 문을 열게 될 것이요

 

더 먼저 그리워하고 더 나중까지 그리워 애통하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그리워 애통하는 눈물 중에 사랑의 삶을 차지할 것이요

 

더 먼저 외롭고 더 나중까지 외로움을 떠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외로움의 막막궁산 중에 사랑의 땅을 얻게 될 것이요

 

더 먼저 상처받고 더 나중까지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상처로 얼싸안는 절망 중에 사랑의 나라로 들어갈 것이요

 

더 먼저 목마르고 더 나중까지 목말라 주린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주리고 목마른 무덤 중에서라도 사랑의 궁전을 짓게 되리라

 

그러므로 사랑으로 씨를 뿌리고 열매 맺는 사람들아

사랑의 삼보-상처와 눈물과 외로움 가운데 솟은

사랑의 일곱가지 무지개

이 세상 끝날까지 그대 이마에 찬란하리라

 

 

-

 

 

이번 여행 덕분에 더 알게 된 고정희님의 시 중에서,

요즘의 내게 가장 마음에 와닿는. 언제까지나 기억하고픈 시가 있다.   

다 좋지만.. 3연과 5, 6연 참 마음에 든다.

 

'상처와 눈물, 외로움'이 '사랑의 삼보'라 하셨지만,

그것들이 사랑의 모든 구성요소는 아니라고. 그들의 합이 사랑은 아니라고.

단지, 사랑을 더 값지게 하는 것, 사랑이 필요로 하는 것, 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사랑은 내게 언제나 어떤 것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상처와 눈물, 외로움과 분리되어 자기 순서를 기다렸다 주어진 게 아니라,

그 모든 과정들 자체였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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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으로 '살아가는' 방법,

 

 

요즘들어 계속 드는 생각인데,

 

여성으로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 정도로 나눠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

(여기서 '살아나가는 방법'이란, 죽지 않고 호흡을 하면서 생활을 이어간다는 뜻)

 

현명한, 똑똑한 노예가 되거나,

 

우울하게 미치거나,

 

명랑하게 미치거나.

 

물론 이런 세 가지 방법들은, 어느 한 사람에게 한 가지만 해당하는 게 아니고,

세 가지가 연결되어 있으면서 분리되어 있기도 하고, 연속적이기도 하고,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다르기도 하고. 선택되기도 하고, 강제되기도 하고. 그런 거라고.

생각해봤다. 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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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간만큼의 멀어짐을 인정하기

 

언젠가부터, 몸이 느끼고 알게 되었던 내게 있어 사실인게 있다.

 

누군가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나중에 꼭 그만큼 멀어짐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

 

그래서 다가가는 법 뿐만 아니라

멀어지는 법 역시 알아야 한다는 것.

 

시작과 끝, 끝과 시작, 시작과 끝, 끝과 시작.

돌고 돌고 돌고 끊없이 이어지지만,

하나 하나 하나 가 모두 하나 하나 하나 인 관계들. 사람들.

 

 

한 때는 이런 사실들에 대해서

"적당한 거리두기"로 대처해야 하는지, 고민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세상에나 적당한 게 있기나 한건지.

 

넘쳐 흐르거나 모자라 허우적대는,

관계의 찌질함과 끈적함을 인정하지 않는 가식적인 쿨함은 내가 못견디겠더라.

 

지금 나는,

새로운 사람들과의 새로운 관계들을 두려움 없이 연이 닿는대로 나를 솔직하게 내보이고 다가가려고 하면서, 동시에 그만큼 많아질 많은 멀어짐을 준비하고

내게 소중한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가고자함과, 동시에 깊어지는 만큼 멀어질 큰 괴로움을 준비하고 있는 나를 느낀다.

 

어이없고 또 어이없는 일이지만,

이런 어이없음으로 점철된 게, 삶이 아닐까 하는 그런 또 어이없는 생각.

삶에 있어 너무나 중요한 것들은 대부분이 작은 미소와 코웃음 한 번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한 때 나는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보다 일찍 죽고 싶은 소박한 소원이 있었다.

그럼 당장 죽어야 할지도 모른다. 당장 죽는 것도 나쁘진 않다.

하지만 내가 바랬던 그 소원이 무척이나 일방향적인 이기적이었음을, 시인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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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맞이 청소

 

*

 

열장짜리건 한장짜리건 낼까지 내야 할 레뽀를 쓰기 싫어서,

'아직은 글이 안써지네, 삘 받으면 써야지' 이런 자기합리화를 통해서

계속 빈등빈등 컴질하던 때처럼 ..

 

회의 정리를 미리 해두겠답시고 컴을 켠 후에는

계속해서 다른 것들을 하게 된다 흑

 



내일은 고향에서 엄마가 오신다.

멀기도 하고 오는데 돈도 많이 들고 해서

아주 뜨음하게 오시는지라, 오겠다고 하면 반갑고 설레지만!

 

"이나 김치 좀 가져가야지.."라는 말이 나올 때부터

나의 난감함이 시작된다.

무겁게시리 가방 가득 가져오면서 힘들어할 게 뻔하기 때문. -_-

 

나: 그런 거 택배로 보내면 되지. 뭐하러 힘들 게 직접 가져오게..

엄마: 별로 안무겁다. 안무겁게 쬐끔만 싸놨어. 안무거운만큼만 가져가면 되지뭐.

 

엄마가 그렇게 말하면 곧이곧대로 믿었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지...

근데 언제나 마중나가보면 무거워서, 둘이 나눠 들어도 둘다 낑낑거렸잖아!! T_T

심지어 내가 마중 못나갔을 땐,

"이렇게 무거운 거 들고 오느라 힘든데 넌 나오지도 않고.." 라고 투덜댔잖아!! T_T

(남동생이 마중안가는 건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흣)

 

이젠, 전화로 적당히 말리다가 안되겠다 싶으면 대강 지는척, 고마운척-_-(실제로 고마운 일이고 고맙지만,, 그래도 마음이 불편..) 마무리 짓고,

마중 나가서 예상했던 장면-무거운 짐들을 낑낑대며 가져오는 모습-을 목격해도

울컥 해서 짜증내지 않으려고-"안그런다며!!! 내가 뭐랬어!!"-마음의 준비를 해간다.

 

여기서 난감함이 끝이 아니라는 거!

 

집에 엄마가 있으면,

집에 엄마가 있다는 그 이유만으로, 사실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너무나 안정돼.

퀘퀘한 내 자취집이

그야말로 '환해지는' 느낌이 들어. 엄마가 머물고 있다는 것만으로,

공기가 다르게 느껴져.

내게 있어 그런 존재의 사람이니까. '엄마'라는 이름 때문이 아니라,

이십여년 간 나를 케어해준 사람이니까.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그런거야.

 

그런데!!!!!

난 엄마가 내 방에까지 와서, 서울까지 와서-엄마도 설레하면서 온게 보이는데-,  

무상으로 힘든 가사노동하는 걸 보는 게 너무 불편해!

그리고 그게 다 '날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게 불편해!

 

엄마가 방에 올 때 항상 몇시간씩 삐까뻔쩍하게 방을 변신시켜 줄 때면 ...

닦여나간 먼지들이 다 내 마음 속에 들어온 듯, 그렇게 갑갑하다.

감사하는 만큼, 마음에 그늘이 져. -_-

 

그렇지만,, 절대 말려지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엄마맞이 청소'를 한다.

 

청결함이나 청소에 남동생보다는 민감하지만 엄마보다는 무디기에-_-.

그리고 주위에 친구들과 비교해봐서도 무딘 편이기에;;

나 좋은대로 해놓고 사는 모습 그대로 두면

엄마가 할 일이 참 많아지기 때문에

엄마맞이 청소를 한다.

 

물론 내가 정말 나로써는 열심히, 불필요한 부분까지 마구 청소를 해도,

나보다 훨씬 가사노동에 있어 전문성을 가진 엄마는, 내가 어떻게 해놔도,

내가 미처 못본 부분들을 잡아내서,

"사는 꼬라지하고는~" 하면서 일을 시작하실테지만-_-

그래도 최대한 줄여 봐야지하는 생각.

 

청소를 하다가 문득 든 느낌인데.

그냥, 엄마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엄마맞이 청소를 하는 게 즐거웠다.

나를 위해서, 내가 필요한만큼 청소를 하는 것도 그럭저럭 유쾌할 땐 유쾌하지만,

(하지만 남동생에 비해 내가 더 '많이' 한다는 생각이 들거나, 해도 인정받지 못하는 일을 했을 때는, 상대적 박탈감으로 못난 감정에 휩싸이기도... -_-)

누군가를 위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일하는 것도 기쁨이 있구나, 하는 생각.

엄마를 위해서, 라고 하지만 그건 동시에 엄마가 일을 덜하면 내 마음이 좀 편해지니까, 

내 마음을 위해서 이기도 한것이구. 후훗.

 

엄마가 있을 땐 옆에 둘 수 없는 담배를 제거하는 걸로 마무리지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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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야!

 

*

 

12월 28일 이후 공개 포스트가 없다는 사실이 맘을 콕콕 찌른다. -_-

여기저기 호기심은 왕성하지만

금세 사그라들어 지속시키지 못하거나

뒷마무리가 뒤숭숭한게 내 단점임을 알기에, -ㅁ-!

블로그에게 미안하기보단, 내게 미안하달까. 큭.

 

블로그 글이란 건 써도 되고 안 써도 되고,

굳이 완성된 글이어도 되고 아니어도 되고,

이런 저런 생각들로 마음을 편히 가져보려고 하지만

그래도오 중요한 건!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바로바로 써버리는 일! 인 듯.

 



새맞이 일에 다시, 관여하고 있다.

요우

'다시' 라는 말과 '관여'라는 말이 어쩐지 이상하다.

다른 표현 없을까.

 

흔히 새맞이 주체는 단대 차원의 기획단과,

더 엄밀히 말해서 각 과반의 예비 2학년들을 일컫는 말이라서

단대 차원의 기획단도 아니고 예비 2학년은 더더욱 아닌 나로서

'관여'라던가 '개입'이란 말을 쓰게 되는 거 같은데.

참 애매하다. 어쨌거나 내 위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로, '함께'

새맞이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다시', 라는 말 역시...

마치 '예전으로 돌아가는 일'이란 느낌이 드는 말이라 찜찜했던 거였군

처음에는 그런 마음이 아예 없지도 않았지.

내가 지금 이걸 해도 되는건가, 이걸 정말 하고싶어하는걸까, 하는 생각들.

 

그렇지만, 요즘 친구들과 일을 하며 드는 생각은, 역시나,,

'누군가를 위해서' , '해야할 것만 같아서' 라기 보다는

'내가 하고 싶어서',

'내가 하고싶은 일이 어떤 것인지 더 잘 알고 싶어서',

일 하는 게 좋은 거 같아.

 

하고픈 일을 찾아나가며 하고 있는 일에서 기쁨과 행복을 발견할 때,

앞으로의 길도 보일테니까.

 

으극극 어쨌거나, 예전처럼

한 가지 일에 나의 '전체'를 버닝-올인-희생-한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할 수 있었으면.

(완벽주의 이제는 좀 완전히 떨어져나가버려!! T_T)

요리조리 잘 해보자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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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맞이 시기의 반성폭력 담론은 어째서 찜찜한가.

[2007 새맞이 프로젝트 컴티에 올린 글]

 

 

새맞이 시기에 범람했던 각종 세미나 커리와 교양 자료들을 살펴보다가, 문득 '반성폭력'이란 이름을 달고 있는 텀들이 참 많다는 걸 발견했다. 대부분이다. 새맞이 시기에 여성주의는 반성폭력과 거의 동일시되고 있었다.  

 

어째서 였을까.

 

새로운 관계맺음, 이제 처음으로 시작하는 관계맺음이 많은 새맞이 시기에 반성폭력이라는 주제가 가장 시급하게 필요하기 때문에, 라는 일반적인 이유를 생각해내보지만, 

 

또한, 성폭력이 일상화되어 있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확실히 다른 캘린더들보다는 훨씬 많은 사람들이 여성주의라는 담론, 반성폭력이란 주제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이 새맞이 시기에 반성폭력이란 주제를 심화, 확장시키고자 하는 활동가적 마음을 떠올려보지만,

 

그런데도 어딘가 모를 찜찜함.



 

- 공동체라는 (남성적) 주체와 새내기 (여학우)라는 피해자의 이분법의 성별화

 

기존의 새맞이상에 대한 논의들을 살펴보면서, 새맞이 시기에 다양한 새맞이 주체들 사이의 차이들이 드러나기 보다는 '공동체'의 존속을 필요근거로 집단적 주체를 가정하게 되고 과정/결과적으로 단일한 공동체의 목소리만이 주로 재현된다는 것을 느꼈었다.   

 

이러한 기존의 새맞이 상과 연결시켜 생각해볼 때, 공동체의 건설 혹은 재구성이 (공공연한 동시에 암묵적일지라도) 위계적으로 가장 중요한 목표를 차지하고 있는듯한 새맞이 시기에 여성주의들의 이야기 중 가장 많이 논의되는 주제가 ('독자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반성폭력이라는 건 의미심장하게 여겨진다. 어딘가 찜찜하다. 아주아주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새맞이 시기 신준위에서 논의되는 반성폭력이란게, '우리 공동체에 일어나면 골칫거리/말썽/수치스러운 일이 될 성폭력 사건을 기왕이면 미리 예방하면 좋겠다', '우리 공동체에 들어올 새내기 학우들은 되도록이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도의 인식이 아닐까 하는 우려가 된다.

 

주체와 피해자라는 이분법, 그리고 이러한 이분법의 성별화는 남성 주체의 이해()와 환상 속에서 구성된 '침묵하는 피해 여성'이란 관념을 낳기도 한다(이 문장은 정희진 씨 글에서 인용). 새맞이 시기 새맞이의 주체-새맞이상 논의를 바라보며 느꼈던 새맞이 시기에 형성되는 단일한 목소리로서의 '공동체'라는 집단적 주체-와 잠재적 피해자로서의 새내기로 이분화되고 있지는 않은가. 동시에 이 이분법은 잠재적 피해자인 새내기를 주로 새내기 '여'학우로 사고하게 됨으로써 성별화되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찜찜함이 있다.   

 

 

 

- 성별화된 이분법의 의미와 가려지는 것들

 

여성들이 공동체에서 맡아왔던 역할들, 차지하는 부분들은 셀 수 없을만큼 많을 수 있고, 절반 이상의 중요함을 지니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위와 같은 이분법적 사고에서는, 공동체에서 여성들의 존재를 인식하는 틀이란 건, 기껏해야 '여성=성폭력의 잠재적 희생자/피해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결과아닐까. 피해자인 여성만 보인다는 것, 말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것, 피해자의 목소리만이 그들의 귀에 쉽게 들릴 수 있고, 쉽게 인정받을 수 있다는 슬픈 현실의 반영이 아닐까.  

 

특히나 지금 있는 구성원으로서의 여성들을 재사고하는 형태의 반성폭력 담론, 여성주의의 논의가 아니라, '우리 공동체'에 새로 들어올 '새내기 여학우'가 이상적인 잠재적 피해자상으로 굳어져, 이들을 희생양/인질로 삼은 채, 기존의 가부장적 인식에 편승해서 반성폭력 담론의 확장을 이루고자 하는 게 아닌가(그런 전략이 과연 가능한지가 의문이지만). 그게 찜찜하고 무서운 것이다. (실제로, 새맞이 시기에 '여자 신짱'/'남자 신짱'이란 이름으로 대표되는, 이와 유사한 각종 성역할 분리/분업이 이루어짐에도 불구하고 이런 분리/분업들이 기초하고 있는 생각에서 가부장적 신화와 공모할 위험성이나 여성노동에 대한 성격을 이해하고자 하는 학습에 대한 논의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단지, 폭력의 '피해자'가 되지만 않는다면, 여성들은 공동체 내에서 아무런 문제 없이 생활해나갈 수 있나? 성폭력적 상황에 대한 학습과 예방의 노력은 최소한의 안전망 정도가 아닌가? 새맞이 시기 반성폭력이란 주제를 가장 많이 택하게 되는 바탕의 생각이, 공동체 내에서 폭력의 '피해자'가 나타나는 순간, 공동체는 고난의 과정을 겪는다는 생각하는 것, 피해 자체에 주목하기 보다 공동체의 치부가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것, 성폭력 사건이 공동체의 수치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얼마나 벗어날 수 있는지를 되짚어 보자는 것이다. 여성주의자들이 성폭력 피해자들을 생산해냄으로써 공동체의 분열을 꾀한다는 그런 말도 안되는 음모론적인 이야기들이 비공식적으로는 여기저기서 공감받는 맥락과 연결시켜 생각해볼 수도 있다.  

 

이분법에서 각각의 범주들은 주로 겹쳐지지 않는 상호배타적인 것으로 설정되기에, 위와 같은 이분법은 공동체 내의 구성원으로서의 여성들의 문제, '성폭력'이란 개념논의만으로 설명해낼 수 없는 성별 권력관계를 보이지 않게하거나 개인간의 관계에서의 문제로 축소시키는 것과 동시에, 새내기 여학우들을 피해자화하기 쉽다는 데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반성폭력 세미나를 하면서 피해자화의 함정을 조심하자는 내용을 아무리 강조한다 한들, 새맞이 시기 위와 같은 이분법적 사고 속에서 이미 새내기 여학우가 피해자로 가정된 채 각종 논의와 실무들이 진행되고 있다면, 틀 자체가 이미 그렇다면, 세미나에서 피해자화에 대한 글을 몇 개 더 읽는다한들 그 의미가 얼마나 와닿을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정희진씨는 자신의 글에서 '피해자화가 여성에게 권력을 부여하기도 한다. 여성들이 '피해자 정체성'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은 피해자일 때만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예전에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나를 포함하여 여성주의자인 어떤 친구들이 새맞이 시기에 반성폭력 담론의 확장을 위해 노력하게 되는 주요 이유 중의 하나가 이 '피해자 정체성'에 매력을 느끼는 것과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있다. 이 시기에는 분명 우리가 우리의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이야기의 장을 만들기만 하면 '들어주려는/듣는' 사람들이 (평소보다) 많다. 그런데 그건 우리의 이야기가 피해자의 목소리에 가장 가깝기 때문이 아닐까. 나 자신만 해도 새맞이 시기 각종 반성폭력 세미나나 반, 문화팀 논의에서 이전 새맞이 시기의 내 '피해'들을 들추어 내어 예로 들면서 정당화를 시도했던 적이 많았다. 당시의 나 자신을 '새내기 여학우=피해자'로 고정시켜서 지금의 나와는 다르게 여겼던 느낌도 든다. "그때의 나같은 일을 겪는 새내기 여학우는 없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면서 나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에 대한 맥락보다는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분리시키면서 당시의 '피해'상황과 행위에만 주목했었던 게 아닐까. 그 때와 '같은' '상황과 행위'만 벌어지지 않으면 되는 건가. 비록 내가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피해자의 목소리를 내는 게 괴롭지만 어쨌든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고 실무에 반영이 된다는 데서 이를 '권력'이라고 여기기도 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정말 이것은 권력이었을까. 왜 나는 내가 내는 피해자 목소리에 스스로 소외되는 느낌과 무언가 나를 속이는 느낌을 계속해서 가져야 했던 걸까.

 

권력일까, 라는 생각을 잠시 미루고 또 생각해보자면,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머릿속에 있는 새내기 여학우를 위해서 그런 말들을, 일들을 해왔던 것일까. 새맞이 시기 반성폭력 논의들 중에서 내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스스로가 치유되고 있다고 여긴 적이 거의 없었다. "다만 이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올해 또 내 눈앞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나 비슷한 일을 듣는 것이 너무 두려워, 그 두려움이 내 활동의 주요 원동력은 아니었나.  

 

그랬기 때문에, 새맞이 시기에 새내기 여학우들에게 느끼는 어떤 종류의 '배신감'이 컸던 것은 아닐까. 내가 신준위를 할 때, '쟤는 저게 불편하지 않나.'라는 생각이나 여성주의에 덜 우호적인 여학우들을 볼 때에 드는 섭섭함은 어디서 나오는 것이었을까.  새내기는 대학의 여성주의 담론을 반성폭력 내규를 통해 처음 접하게 된다. 자신을 희생자/피해자의 틀과 일치시킬 수 없는 목소리들에도 좀 더 귀를 기울여야 했던 게 아닐까 싶다. 동시에 틀 자체를 다시 검토하고 재구성해내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한다. 내 일처럼 여기고 안심할 수 있는 목소리도 중요하지만, "이건 내 일이 아닌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며 반성폭력 내규 속 '여학우'에 자신을 대입시킬 수 없는 채 여성주의에 반감을 가지게 되는 목소리의 맥락도 더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엘리트 학생으로서의 반감 혹은 단지 여성주의의 정치성으로 인한 반감에서 비롯되었다고 치부해버릴 것이 아니라 개인 정체성에서의 차이를 부정당하고 젠더로 환원된 여성들의 목소리일 수 있는 것이다.

 

 

-글을 써놓고 다시 읽어보니, 자칫 새맞이 시기의 반성폭력 담론들과 학내 반성폭력 운동을 분리시켜 사고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고, 반성폭력 운동의 의미가 축소/왜곡되어 이해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서는 새맞이 시기의 반성폭력 이란 주제가 범람하는 현상을 학내 '반성폭력 운동'의 연속선상에서 위치시켜서 생각하기보다는 사회대 새맞이에서 '공동체의 시선'으로 여성주의에서 반성폭력 이란 주제를 절단하여 분리시키게 되는 맥락으로 생각해본 것이다.  

 나는 이 글을 겨울딛기 디딤이 친구들과 작은 세미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나와 그/녀들의 찜찜함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쓰게 되었다. 이 글은, 어떻게 보면, 지난 새맞이 과정에서 새맞이 주체로서의 나의 생각/행위들에 대해 스스로 비판적으로 다시 생각하고 반성하는 의미이기도 하고, 아직까지도 앙금져 남아 있는 내 감정들을 풀어내보려는 노력이기도 한 것 같다.

 새맞이 시기에 이루어지는 반성폭력 논의들은 학내 반성폭력 운동과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으며, 이 시기의 모순이나 문제점들이 개인 주체들의 역량 부족만은 아니라는 것, 반성폭력 운동 자체 내의 여러 논쟁점과 딜레마들과 맞물려 있다는 것-그리고 이것은 또 그 운동이 가진 내부 모순이라기보다, 가해자 중심의 사회, 여성들의 목소리를 존중하지 않는 사회에 영향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덧붙여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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