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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6/12

나에게 솔직해지기,

 

 

*

 

"이건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야 가능하겠어요."

 

기린언어워크샵 도중에,

관찰-느낌-욕구-부탁 모델의 연습을 위해 몇 분이 자원해서 아침 님과 이야기 하시는 걸 함께 지켜 보던 옆 분이 내뱉으신 말이었다.

 

이 말을 듣는 순간에 스스로가 매우 부끄러워져서 나 혼자 어쩔 줄을 몰라했는데,

눈 주위로 피가 쏠려 금새 왈칵하고 밀려 나올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까지의 워크샵이 흥미로웠고 기대보다 더 편안하고 즐거웠던 건 사실이지만,

일기를 쓸 때, 일상의 기록뿐만 아니라 내 심경으로 마무리하고 싶은 마지막 문장이 떠오르지 않아 일기 쓰는 일을 마칠 수 없게 되었을 때와 비슷한 초조함과 허전함, 꺼림칙함이 계속 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위계적이고 폭력적인 자칼의 언어에 대한 기린언어의 문제의식이나 질적인 유대 관계와 대화자 서로의 만족을 위한 기린언어가 추구하는 목표에 대해서는 머릿속에서도 가슴속에서도 너무너무너무 공감하고, 이를 위한 방법들을 얻고 싶었고, 노력해보고 싶었지만, 맨 위의 저 말을 듣는 순간에 나는 내가 계속해서 나 스스로를 의심하고 있었다는 것, 불신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과연 내가-자기 자신에게 조차 솔직하지 못했던, 이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때문에 불편했던 게 아닐까.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기.

솔직해져야 할 자기 자신이란 걸 발견한지가 얼마 되지 않는 나로서는,

솔직해지기까지 해야 한다는 게 어려운 일이다.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는다. 대강 짐작해보자면 작년 가을과 겨울 부근부터가 아니었을까 싶다. (내가) 하고 싶은 일보다 (내가) 해야한다고 여기는 일에 더 얽매여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때. 과연 내가 하고 싶은 일이란게 있기나 한걸까 라고 생각했을 때. 하고 싶고 해야 하는 일은 내게 분리될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해왔던 이전과는 달라지게 된 때. 오직 나 혼자 있을 때-나의 익명성을 담보받을 수 있을 때-만 편안함을 느끼고, 세상에서 제일 편하다고 여기는 그만큼 외로웠을 때..

 

바빠져야 했다. 바쁘면 어떤 공간에서 만난 사람들이건, 나를 볼 수 없어도 알아서 이해한다. 바쁘면 약속을 잡지 못해도 이해해준다. 마땅한 공적인 이유가 없이는 약속을 거절하지 못해서 쩔쩔매는 나는, 나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설명해낼 자신이 없었고, 바빠지는 길을 택했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있어야 하는 순간이 많았지만 그 순간들에서도 나만의 생각에 잠길 수 있는 틈들이 있었다.

 

혼자서 나에 대해 하는 생각은 대부분 무성한 가지를 뻗치고 뻗쳐 결국 뿌리 근처에 처박히거나, 공간 가득 단어와 문장들로 채워나가 보지만 물 받아 놓은 욕조 속에 구멍뚜껑을 열어 놓은 듯 고이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쓰기 시작했다. 나를 관찰하기. 특히 타인과 접촉할 때의 나. 직접 만나 이야기하든, 문자를 주고받든, 전화통화를 하든, 편지를 쓰든, 머릿속으로 생각을 하든..

 

지금 생각하면 딱히 충격적이라 할 것도 없는데, 그런 일들을 반복하면서 내가 충격받아가며 알게 된 게 많았는데 그 중에 최고는, 대화를 할 때, 나라는 사람이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건지를 내가 봐도 알 수 없다는 거였다. 나는 '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았다. 이야기를 하지 않거나, 혹은 '나의' 이야기를 하기 위한 방어적인 이야기들이 줄줄이 이어져 정작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는지를 잊게 되는 때가 많았다.

 

(지금 나는 포스트가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어서 당황 중..)

 

사람들이 좋았지만 사람들을 대할 때 나도 모르게 가지고 있었던 울렁증, 풀리지 않는 긴장, 답답함. 점차 불균형한 것이 보이는 관계들에서 나는 알았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관계에서 나는 없었다는 걸. 아니, 있었겠지만(그래야 관계가 생성되니까..) 나는 무시하고 있었다는 걸.

 

그 즈음 읽었던 한 책에서 아래의 문장을 봤을 때, 한참을 멈춰서 바라보았던 게 기억난다.

'정신이 건강한 사람은 타인을 속이지만 정신이 건강하지 않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속인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_- 오래되서 흑)

 

곰곰이 생각해보고 관찰해봤을 때,

그동안 나는, 내 안의 많은 욕구들, 내 안의 많은 목소리들을 들리지 않는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거라고, 그래서 단 하나의 욕구와 목소리만이 진짜라고 진실이라고 진리라고 최고선(善)이라고 스스로를 속여왔던 게 아닐까 싶었다. 

더 기가막힌건, 나 자신은 진심으로 '몰랐다'라고 생각하는 것인데,

기억을 재구성해보면 딱히 몰랐던 것도 아니란 생각이 든다. 인정하지 않았을 뿐.

 

'보여지는 나'와 '관찰하는 나 혹은 보여주는 나'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살아왔고,

그 불균형한 관계가 길어지다 보니 우울했던 게 아닐까.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주는 게 정말 싫어서,  타인을 무척이나 배려하는 듯이 행동하고 노력하지만, 사실은 타인을 배려해야지만이 마음이 편할 수 있는 나를 가장 배려하려고 노력했다는 것, 상처주는 게 싫다고 중얼대는 마음에는 내가 상처받는 게 너무 두려워서 라는 걸 인정하고 나서는 마음이 조금 편해졌었다.

 

기린언어워크샵을 들으면서, 아직 나는 많이 멀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여성주의를 공부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하면서도 내가 스스로의 다양한 욕구를 이해하지 못하고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하다면, 내 발화가 나에게 뿐만이 아니라 타인에게도 억압적이고 폭력적일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앞으로

나의 다른 목소리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나와 나의 평등한 대화를 위해서 내 욕구들을 위계짓지 않은채 다양함을 제대로 바라보고 싶다. 

 

기린언어를 위해 노력한다는 것, 여성주의를 공부하고 실천하려고 한다는 건,

'착해지는 것'이나 '착해지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나의 변화를 모색하는 것.. 내 생의 의지를 다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고 폄하할지도 모르지만, 정말 언젠가 언니네글에서 봤듯이 이게 정말 개인적인 방식이라 할지라도 작디 작은 개인에 불과한 나로서는 '부조리하고 비열한 일상'에 전염되지 않고 살아남겠다는 나름의 저항, 절실한 이야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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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열한,

 

"적극적으로 참여 하지는 못해도,

그러니까,

우리 '함께' 하지는 못해도,

 

내가 할 수 있는만큼,

'도와'주도록 노력할게."

 

 

*

 

비열한 말장난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미안해. 

내 가슴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내가 원하는 게 어떤 건지 잘 모르겠어, 라는 말도

스스로를 속이는 기분이 들어.

 

잠시만 짜증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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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건설 시설관리노동자투쟁 관련 기사와 영상

KTX 승무원 300일 문화제에 참여하고 있는 도중에

대우건설 건물 앞 천막이 용역 깡패들에게 침탈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문화제를 마치고 규탄집회나 경찰서 항의방문이라도 있으면 함께 하려고

처음으로 대우건설 건물 앞을 찾아서 그 분들을 보았다.

 

건물 앞 공기 중에 여전히 분노와 한숨이 섞여 있는 듯했고

허탈한 표정으로 건물 앞 계단에 앉아 계시는

여러 중년 여성 노동자 분들을 뵈니까,

마음이 따끔따끔거렸다.

 

그 동안 농성 하고 계시다는 거 알면서도,

단지 속으로 안타까워할 뿐, 과정이나 이유들에

관심가지지 못했던 것이 죄송스러웠다.

 

소모임 친구들과 같이 공유하려고 기사와 영상을 모으면서

읽고 보고 있으려니 .. 더 가라앉는다.

 

 

 

 

 

 

 

 

대우건설 시설관리노동자 관련 기사 

 

대우건설, 시설관리노동자들 일방적 계약해지 2006. 2. 23

우리는 물건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피플파워 2006. 2. 25

대우건설, 하청 노동자 노조 파괴 공작 드러나 2006. 11. 23

"사람답게 살게 해준 노조, 뺏길 수 없다" _대우건설의 노조파괴 전력에 맞서 투쟁하는 늙은 노동자들 2006. 11. 23

"대우건설, 하청업체 노조 와해 직접 관여" 2006. 11. 23 (프레시안)

대우건설, 24일 0시부로 조합원 전원 계약해지 2006. 11. 24

투쟁, 한 달 그리고 첫 눈 2006. 12. 4

대우건설, 용역 150명 동원해 하청노동자에 폭력행사 2005. 12. 7

 

 

관련 영상

 

이것이 몇십년 일한 보답입니까 -대우시설관리노조 파업투쟁출정식 2006. 2. 24

우리는 물건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2006. 2. 27

우리는 청소한 죄밖에 없어! -사장실 항의방문 2006. 11. 25

대우건설빌딩 비정규직 농성장 용역 침탈 2006. 12. 7

1분 거리의 경찰, 용역 침탈에 감감 무소식 2006.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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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의미는?

 

언니네 글 [복수도 치유다, 하드캔디]  와 관련한 글

 

 

'복수'라고 하는 게 '내가 받은 만큼, 상대에게 되돌려준다'라는 의미, '받은 만큼 상대에게 되돌려주었으므로 이제 뒤끝없이 끝이다'라는 류의 의미라면, 나는 그 복수라는 의미가 남성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언니네글에서처럼, "'네가 한 짓이 나에게는 이런 고통을 주었다', '네가 한 짓은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나쁜 짓이다'는 것을 (가해자에게) 알려주는 것",은 위와 같은 복수의 의미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관계와 소통이 중요한 여성주의에서는, 개인의 성장이나 치유, 혹은 변화가 결코 혼자서만 이루어 낼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으며, 서로 오고가는 무언가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게 아닐까. 일방적으로 100과 100이 오고가는 그 무엇의 복수개념, 갈 때는 니가 피해자, 올 때는 내가 피해자, 식의 양분된 복수개념은 여성주의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남성적 의미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가해와 피해, 상처가 뒤섞인 상태에서 어느 누군가를 어떤 상태로 고정시키는 일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어떤 폭력적인 사건에 대해서, 그 상황을 함께 했던 누군가가, 상대방에게 '나는 그 상황에서 이런 고통을 느꼈어요'라고 알리는 것, '당신은 같은 시공간에 있었던 나의 경험이 당신과 어떻게 달랐는지 아는 건가요'라고 묻는 것, 말로 해서 못알아먹는다면 다른 수단이라도 써서(!) 상대방에게 자신의 느낌을 공유시키는 것. 그런 것들이, 일단은 소통의 시도인 셈이 아닐까? 자신의 몸에 각인된 경험과 너무나 맞지 않는 언어적 기억이,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다시 한 번 그 경험을 정리해내기 위한 시도로서의 소통이 아닐까. 그 소통의 시도의 경우에, 좀 다른 이야기지만, 만약 권력관계에서 보다 약자의 위치에 놓인 사람이라면 '이성적인' 언어로서의 소통 시도가 얼만큼 가능할까. 이런 생각들을 하는 게, "약자의 최종적이고 강력한 수단이 '폭력뿐'이다", 라는 말을 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단지,

 

애초에,

(대부분의) '그'들은 자신의 행위의 폭력성에 무감각하고 상대방이 나와 경험이 다를 수도 있다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으며 자신과 '다른' 목소리의 피드백이 존재할 수 있다라는 걸 상상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상대로부터 시도된 소통이, '어이없어서',

"이건 내게 폭력이야"라고 외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으. 언어의 부재?)

'그'들은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테지만, 그 때의 자신의 경험과 상대의 경험이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주로 차별적이었겠지만)에 대해서나 상대가 이렇게 소통의 시도를 하게 되는 주목적-어쩌면 소통 그 자체일수도 있겠지만-보다는 상대의 행위 자체를 '가해'로, 자신을 '피해자'로 고정시켜버리는데서, 그쳐버리기 쉽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     

 

언니네에서는 하드캔디 속 나이 어린 여성의 행위에 대해서 관객들이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가 "폭력의 주체가 뒤바뀐 낯선 구도에 불편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여성이 이유있는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가 되는 것은 이유없는 폭력을 당하는 피해자가 되는 것보다 익숙하지 않은 장면이니까"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폭력의 주체가 뒤바뀌었다고 해서, 행위의 의미를 담은 맥락이나 효과에 대한 판단까지 동등하게 될 수 있는 건 문장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 아닐까? 흐으.

 

여기서 또 엉뚱하게 생각나는,

학내 성폭력 해결과정에 있어 '원칙'이라고 일컬어지는 것 중 하나인

'피해자 중심주의'는,

남성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상대방에게 소통하려는 시도 자체가 어려운 사람의 목소리를 키우는 것, 들리게 하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지 않나 하는 생각.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 피해자 중심주의의 의미가,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모든 칼날을 휘두를 수 있게 하는, '피해자 제멋대로주의'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대책위나 비대위의 해결과정에서 가해자의 '처벌'이란 부분이 '복수'의 남성적 의미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오해'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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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X 승무원 투쟁 승리를 위한 300일 촛불 문화제

 

“사회적 약자 돌아보는 나눔 경영, 철도공사가 몸소 실천해야”


KTX 승무원 투쟁 승리를 위한 300일 촛불 문화제


- 12월 22일(금) 늦은 6시 세종로 사거리 -



“국민의 다수가 철도공사는 틀렸고, KTX 승무원의 주장이 옳다고 합니다. 노동계와 여성계는 물론이고 학계, 시민, 종교, 법조, 문화예술 등 각계각층에서 KTX 승무원 문제의 해결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정부만 입을 닫고 있고, 철도공사는 모르쇠와 호도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합리적으로 문제가 해결되길 바랍니다.”

- 12월 19일, KTX 승무원 문제의 연내 해결을 촉구하는 각계각층 연대 선언 중 -



지난 19일 서울역 광장에서는 “KTX 승무원 문제 연내 해결을 촉구하는 2000인 선언” 기자회견이 열렸습니다. 기자회견을 주최한 승무지부에서는 2,000명을 훌쩍 넘어 2,828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연대 선언에 참여하였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기자회견 참석자들은 철도공사가 승무원들을 직접고용하여 시민들의 바램을 더 이상 외면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바로 이튿날, 철도공사 이철 사장은 “구세군 종소리와 ‘나눔’ 경영”이라는 제목으로 한 언론사에 <기고>를 했습니다. 날씨가 추워질수록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약자에게 눈길을 돌리는 마음 씀씀이가 살갑다며, ‘나눔’ 경영이라는 말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KTX를 타봤다는 어느 보육원생의 들뜬 목소리를 들으며 기차가 싣고 가는 것이 단순히 사람과 화물만이 아니라는 걸 알았”고, “기차는 어려운 이웃들의 꿈도 함께 싣고 달리는 것”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새해에는 모든 기업들이 더 많은 ‘나눔 경영’으로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를 기대한다며 기고문을 마치고 있습니다(출처: 네이버 뉴스).

옳은 소리입니다. 감동적인 글입니다. 그러나 이철 사장이 잊고 있는 것은 ‘사회적 약자’는 바로 당신 옆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고객들의 꿈을 실어 나르며 이들의 안전을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하루아침에 일터를 잃고 거리에서 외침을 한지 어느덧 300일을 맞이하는 승무원들은 바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운운하는 철도공사가 내몬 사회적 약자입니다. 이들은 일터로 돌아갈 수 있기를 기대하며 하얀 전지에 소망 한 자락을 남기고, 야광봉으로나마 ‘직접고용’을 만들어내고, 간절한 염원을 담아 풍등을 날리고, 노란 풍선에 꿈을 실어 보내는 사회적 약자입니다.

오는 금요일 세종로 사거리에서는 KTX 승무원 문제가 연내에 해결될 것을 기원하며 2000인 선언에 동참했던 그 마음으로, 새해에는 거리에서가 아니라 KTX에서 승무원들을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노란 풍선에 소망을 담았던 그 마음으로 열한 번째 촛불을 밝힙니다. 촛불문화제에 함께 하셔서 승무원 직접고용을 위한 의지와 연대의 힘을 모아주시기를 요청합니다. 감사합니다.



◎ 일시: 2006년 12월 22일(금) 늦은 6시~

◎ 장소: 세종로사거리 (동아일보사 맞은편, 동화면세점 앞)


◎ 프로그램

  ♠ 문화제 알리기

  ♠ 여는 마당 공연 : 풍물패 ‘삶터’

  ♠ ‘다시 시작이다’ : KTX 승무지부 조합원들의 희망 글 & 공연

  ♠ 페미니스트 가수 안혜경 공연

  ♠ 세종문화회관 합창단 공연

  ♠ 꽃다지 공연

  ♠ 문화제 정리


(문의: KTX 승무지부 010-7511-4868 / 여성노동네트워크 011-9894-2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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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X승무원 철도공사 직접고용 촉구 2700인 선언

 

 

2700인 선언에 다녀왔다. 괜시리, 내 조급한 마음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우울했다.

 

공기업이란 곳에서, 여성인력에 대한 차별적 (무)의식-주로 여성이 맡게 되는 '서비스'업무에 대해, 단순노동이나 없어도 되는 '주변'업무라고 여기는 것이나 '젊고 예쁜 여성'을 단기간 고용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등의-과 비정규직에 대한 폭력적 대우-불법파견을 합법도급으로 포장하는 것이나 노동환경의 열악함이나 느닷없는 해고통지 등의-를 여지없이 드러내면서도, 그런 정부에서 비정규직을 '보호'한다는 법안을 통과시키니 그 법을 믿을 사람이 대체 누가 있을까. 그런 정부니까, 여성부가 여성가족부, 여성청소년가족부가 되어가는 그 기이한 흐름을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더구나,   

여승무원의 외주화까지 추진 중이라니, 그야말로 철도공사와 정부만 알고 있는 그들만의 '원칙'을 밀어붙이고 있는 것일까.

 

선언 장소에서 받은 새마을호 여승무원 관련 리플렛에 적힌, '저희는 정규직까지 바라는 것도 아니고 철도공사에 직접고용되기를 원합니다..'류의 내용을 보면서 마음이 따끔따끔 불편한 느낌이 들어서인지,

 

각계 각층의 유명인사들이 KTX 승무원을 지지하고 있음을 알리는 행사임은 맞지만, 사회자와 여성노동네트워크의 조주은씨, 중간에 승무원의 편지 낭독과 새마을호 여승무원의 연대발언 이외에는 각 단체의 대표라고 나온 사람들이 모조리 다 남성들이어서, 어쩐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인지,

 

이 문제가 어째서 여성'노동'으로만 초점이 맞춰지게 되는 것인지(젠더프리한 노동개념이란 허구라고 생각하지만 이른바 '노동'이라고 불리는 어떤 개념에 초점이 맞춰진다고 여겨진다), '여성노동'의 이야기는 어떻게 그려내고 어떻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인지, 과연 가능한지 자꾸 의심하는데 스스로 지쳐서인지,   

 

도로 행진 허가도 내주지 않고 인도로 가겠다는 평화 행진을 막아선 경찰들과 술래잡기 하듯 뛰어다니느라 다리가 저릿저릿해서인지,  

  

예쁜 노란 풍선에 마음이 설레서 열심히 소원 적어서 날릴 준비하고 있었는데 어쩌다 손에서 스스륵 풀려 먼저 날아가 버린 것이 내심 속상해서였는지,

 

조금 우울했다.

 

그래도..

날아가는 풍선들은 예뻤어.

모두다 하늘에 닿을 수 있길.

 

다음 번엔 이만인 선언, 이십만인 선언, 이천만인 선언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2700인 선언 관련 기사

[포토뉴스] 2007년 행복하게 일하겠습니다! (참세상)

각계인사 2828명 KTX 승무원 문제 연내해결 촉구 (프로메테우스)

"새해에는 우리의 일터 KTX로" (오마이뉴스)

[사설] 고속철도 승무원 문제, 해 넘기지 말아야 (한겨레)

 

*선언 다녀온 여름의 블로그 포스트 http://blog.jinbo.net/mbc112/?pid=82

 

*KTX 승무원 투쟁 관련 정보 얻을 수 있는 곳

승무지부에서 얼마전 오픈한 홈페이지 www.ktxcrew.or.kr

여성노동 네트워크 http://home.freechal.com/joynet

 




 

          <선언문>


문제 해결을 계속 거부한다면 이철 사장이 먼저 퇴진해야 합니다

  철도공사 이철 사장은 민주화 전력을 훈장처럼 달고 있습니다. 그를 소개하는 자리에는 언제나 과거 민주화운동 경력을 상징하는 “사형수 이철”이란 단어가 따라다닙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압니다. 이철 사장이 가슴에 달고 다니는 그 훈장이 노동자의 인권과 생존권을 짓밟는 잘못을 가리기 위한 허식일 뿐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문제가 계속되면 승무원을 없애버릴 수도 있다”
  철도공사 이철 사장이 국정감사장에서 한 말입니다. KTX승무원 문제가 1년 이상 해결되지 않아 철도공사 경영진의 가장 치명적인 골칫거리가 되었다지만 최고경영자로서 이렇게 무책임한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승무원은 열차안전의 최후 보루입니다. 승객의 안전과 편안한 여행을 마지막으로 책임지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런 승무원을 없애버릴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당사자인 승무원뿐만 아니라 국민들을 향한 협박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KTX열차 자체의 안전에 적신호가 들어왔다는 지적이 있음에도 승객의 안전을 책임질 승무원을 없애버릴 수도 있다고 하니 “낙하산 인사” 이철 사장에겐 ‘철도와 승객의 안전’은 별 관심사항이 아닌가 봅니다.

  “KTX승무원을 직접고용할 수 없는 것은 ‘원칙’의 문제이다.”
  이철 사장은 언론 인터뷰 때마다 강조합니다. '대중적 인기'를 먹고사는 정치인 사장이기 때문인지 “어떠한 압력에도 타협하지 않고 원칙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그럴 듯한 말로 KTX여승무원을 직접고용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근거의 부재를 피해가려 합니다. 안타깝게도 이철 사장의 ‘원칙’의 기준이 “공기업의 경영효율성이나 공공성 강화”가 아니라 “정치인 이철의 입지 강화에 유․불리함"에 있기에 그는 공기업 한국철도공사의 사장으로서 자격이 없습니다.

  KTX승무원 문제의 연내 해결을 촉구합니다.
  국민의 다수가 철도공사는 틀렸고, KTX승무원의 주장이 옳다고 합니다. 노동계와 여성계는 물론이고 학계, 시민, 종교, 법조, 문화예술 등 각계각층에서 KTX승무원 문제의 해결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정부만 입을 닫고 있고, 철도공사는 모르쇠와 호도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합리적으로 문제가 해결되길 바랍니다. 만약 이철 사장이 끝내 문제해결을 거부한다면 도처에서 터져 나오는 이철 사장 퇴진요구의 거센 목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정치인 이철"을 거부하는 사회적 비난에 직면할 것입니다.  

                                            2006년 12월 19일
              KTX승무원 문제의 연내해결을 촉구하는 선언 동참자  2735명 일동
                   (늦게 도착한 선언 참여자 명단이 일부 누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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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기, 글쓰기 공포증!

 

굳이 긴 글을 쓰게 하거나 굳이 말을 길게 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았던 대학교 이전 시기를 거친 나는, 대학에 들어와서 내가 말하기와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이 매우 크다는 사실을 알았다. 물론 친구들, 가족들과의 대화 속에서 오랜 시간 내 생각을 이야기하는 경우들은 있었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와서(혹은 들어오기 위해서) 내가 요구받은 말하기, 글쓰기의 경우는, '나의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것)에 대한 나의 생각을 표현하기'였던 것 같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할 수 있는(혹은 말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야만 하는 말이나 글을 요구하는 느낌? 나와 관계된 부분이 너무나 적어보이는 것에 대해서, 그러니까, 내가 타인이나 다른 집단에 대해 월권을 행사하는 느낌의 말하기와 글쓰기를 강요받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아마도 내가 '잘' 말하거나 '잘' 쓰고 싶다는 욕망, 상대방에 '잘' 이해할 수 있었으면 하는 욕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반공동체에서나 수업에서 이른바 '잘'한다라고 인정받을 수 있는 말하기와 글쓰기라는 것들을 기억해보건대,

 

구체적 년도와 역사적 사례들, 유명한 학자의 논문에서 발췌 인용들을 곁들어서

비교적 너무 길지 않은 시간 내에 논리적으로 허점이 거의 없는,

그런 것들.

덧붙이자면,

자신감 있는, 여유로운 태도와 확신에 찬 말투를 가진다면 엄청난 플러스 요인이 된다.

 

나는 그렇게 말하거나 글을 쓸 자신이 없었다.

나는 어떤 글을 읽을 때 내 경험과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을까 골몰했고, 글에 대한 일차적 감상의 주된 내용이 내 경험과의 연결이었다.

 

만약 누군가의 말/글이 나에게 있어서는 좀 아닌 것 같다, 다른 것 같다 라는 느낌이 들 때, 공개적으로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은, 내가 그 '이유'를 '누가 듣더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야만 그것이 진실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고 그것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내 경험에 대해서 말/글로 표현하고 싶을 때는, 너무 '개인적'이고 즉홍적이고 소소한 말/글이 되어서, 들으려 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을 것 같았고, 실제 내 경험과의 간극이 커져서 오히려 나를 이해하지 못하게 할까봐, 그게 두려워, 쓰지 못하고 말하지 못했다.



 

공개된 말/글이라고 했을때,

그건 세미나 자리나 수업 시간 뿐만이 아니라,

 

온라인 공간에서도 비슷했다. 약간 '덜' 하다면 덜 한 측면이 있지만,

 

온라인 커뮤니티는 오프라인과 거의 마찬가지로 무서웠고,

그나마 '개인적이지만 개인적이지 않을 수 있는' 블로그나 미니홈피의 글 게시도

무섭고 두렵고 꺼려졌다.

 

개인적이라고 여겨지는 공간이기에 더 무서웠을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이 이게 나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이 끄적임, 이 일기, 이 글을 가지고 나를 판단하면 어쩌지. 간혹 내가 쓴 글을 보면 나 스스로도 수용할 수 없는 내 자아의 일부분을 보게 되는 때가 있었고 그런 내 자아의 일부분을 비록 친밀한 관계의 몇일 뿐이더라도(친밀한 관계가 더 문제가 될 수도 있다) 보이도록 하는 건 무서웠다. 나의 어디까지를 수용해줄까 사람들은, 이런 느낌. 내가 쓰는 이 글이 내가 관계 맺고 있는 누군가에게 상처 주지는 않을까, 우리 관계에 흠집을 내지는 않을까, 나는 그럼 그 사람이 보고자 하는 나만을 보여야 하는 걸까, 이런 걱정들.

 

 

여성주의를 접하고, 여성주의를 하는(doing?)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내 말과 글도 '공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 나 스스로를 용납할 수 있는 관용을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도 말/글은 많이 두렵다.

 

 

내가 가진 말과 글에 대한 공포감을 굳이 내 정체성의 여성이란 부분에 모두 환원시키고 싶진 않지만, 그냥, 얼마 전 방학 중 오픈 세미나를 위한 내부 프리 세미나 커리 였던 김성례 씨의 <여성의 자기 진술의 양식과 문체의 발견을 위하여>라는 글을 읽으면서 문득 위와 같은 생각들이 마구마구 들었다.

 

 

블로그에 글쓰는 거에 대해서,

아직도,

별거 아닌 포스트 하나 쓰고 하루 종일 노심초사하지만-_-

지금까지 조금씩 극복해 온 것처럼,

점차 나아질거라고 생각하고 노력해보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말, 내가 하고 싶은 말, 해야 하는 말들을 놓치지 않을 수 있길. 부디.

 

 

 

 

 

 

*읽었던 글에서 조금 발췌

 

- 여성은 말하기를 두려워한다. 

  그런데도 왜 이야기를 하려 하는가? 말 안하기 위해 입을 꼭 다물고 비트는 몸짓으로 자기를 표현하는 여성이 입을 열어 자신의 삶과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해버리는 것은 그러한 말하기에 대한 거부감과 부자연스러움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하나의 반역 행위이다.

 

- '말하기의 두려움'이란 사실 거짓말이나 막힌 말의 횡포에 대한 거부감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진실을 감추기 위해 남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을 습관적으로 해왔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 때 느껴진다. '글로 말하기'에 이미 익숙한 배운 여성들에게 이러한 진실의 은닉은 더 여실하게 드러난다.

 

- 언어가 없는 것은 자신의 생각이나 견해를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말을 한다 할지라도 그 말이 자신의 경험을 충분히 묘사해주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은 종종 자신의 말 서두에 붙이는 단서에서 나타난다. '내가 뜻하는 것은', '알다시피', '정말' 같은 삽입구는 자신의 말이 현실을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지나친 걱정 때문이지만 이러한 걱정은 말을 막히게 할 뿐이다. 이와 같이 자기를 두려워하고 존재를 숨막히게 하는 억압 문화는 언어 공포증을 낳는 것이다.  

 

 

 

덧/

필요없는 덧말일 수 있지만,

내가 말하기와 글쓰기를 두려워하는 것과 더불어서,

난 타인이, 특히 나와 같은 공동체에 속한 사람의 말하기와 글쓰기에 대해서 약간의 거부감도 가지고 있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듯.

 

'그렇게 말이나 글은 잘하면서 대체 행동은 왜 그런거지?'

라는 식의-_- 실망감을 느낀 적이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말과 글을 잘한다고 여겨지도록 만든 사람들이 주로 남학우들이었다는 점에서, 내 거부감은 더 짙어졌는데.

 

말을 했으면 반드시 지켜라, 라던가 나는 말을 하면 반드시 지켜야지, 라는 강박이나 완벽주의까진 아니었지만 말과 글이 중요한만큼, 바로 그만큼, 허무하다는 생각때문에 거부해왔던 것도 있었다.

 

말을 하는 것, 입술을 여는 것, 펜을 쥐는 것, 키보드를 두들기는 것 그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액션인 순간, 혹은 그런 집단의 사람들이 분명 있다.

 

하지만, 그 지점에서만 멈춰서는 안되는 순간이 있고, 그런 순간의 어떤 집단의 사람들은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서 좀만 더 생각해줬으면 좋겠다아.

 

여기에 대해선 다음에 기회가 되면 좀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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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정체성의 조화, 벨 훅스

 

수업 종강일에 학생들의 기말 페이퍼 초안에 대한 코멘트가 이루어지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청강생이므로 기말 페이퍼에서 면제되는 특권을 얻어서, 다른 학생들에게 약간의 부채감과 약간의 미안함을 느끼며, 그리고 사실은 안도하는 마음과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수업에 들어갔다.  

 

모든 사람들의 기말 페이퍼가 흥미롭고 신기했는데(어떻게 이렇게 쓸 수 있는 능력이 있는걸까!) 그 중에서도 내 관심을 가장 끌었던 것은 벨 훅스의 지식인론과 교육론을, 그의 페미니스트 입장론과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분석한 페이퍼였다.

 

수업 시간에 벨 훅스의 글은 "Choosing the Margin as a Space of Radical Openess" (1990) 라는 몇 페이지 안되는 짧은 것으로 하나 읽었었는데, 분량도 짧고 꽤나 선동적인 글(?)이라서 그의 페미니스트 입장론에 대해 자세하게 살펴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사실 나는 제대로 읽어가지 못했다는 게 중요) 페이퍼를 쓰신 분은 벨 훅스를 주요대상으로 잡으면서 단행본을 많이 구해 읽으신 것 같았는데, 난 내가 이전에 알지 못했던 정보들을 접할 수 있는 즐거움과 더불어서, 벨 훅스를 읽는 방식이 재미있게 다가왔다. 완성본을 볼 수 있으면 좋을텐데. 아쉽다. (청강생으로, 나는 수업에 기여한 바가 매우 적고, 주로 얻어가기만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많다.,,-_ㅜ)

 

흑인/여성/지식인/페미니스트/교육자 로서의 자신의 입장/위치들을 분명히 밝히고, 특히 흑인-여성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강조하면서, 이처럼 주변(margin)에 위치한 사람들이 가지는, 세계에 대해 총체적 인식, 저항적 인식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벨 훅스의 입장론을, 그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하나의 형태가 'I'와 'WE'라는 인청대명사의 의도적인 사용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보편을 자처하는 듯이, 주어를 생략하는 각종 문장들과 '우리'라고 지칭하고 있는 게 대체 어떤 사람들을 이야기하는지 알 수 없도록 모호하면서도 마치 한 집단을 대표될 수 있다고 여기는 문장들에게 질려버리는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런 오류와 왜곡이 두려워서 내가 글이란 걸 쓸 때는 언제나 '나'라는 주어를 주로 사용함으로써 내 위치를 밝혀야만 한다고 강박적으로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나의 경험들을 통해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자 했을 때, 주어인 '나'를 주로 쓰는 방법이나 내 입장이 내 '경험'에서 나올 수 있었음을 밝히려고 노력했던 방법은, 곧잘 '개인적인 일기' 수준의 성토로 받아들여지기 십상이었다. 특수한 경험으로 넘겨지기 일쑤였다. 그렇게 되는 것이, 내 방식만의 잘못이거나 애초에 의도한 바가 옳지 않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언제나 고민이 되었다. 소문자, 복수로서의 여성womyn을 이야기하는 여성주의는, 집단으로서의 여성 의미와 집단에 속한(혹은 속할 수밖에 없는) 개인을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는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어느 한쪽을 축소시키지 않으면서 효과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지.

 

벨 훅스는 자신의 가진 정체성, 특히 흑인 여성으로서와 지식인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 모두를 놓치지 않으려는 시도를 과감하게 하는 사람인데 화자인 벨 훅스는 자신의 글에서 각 집단에 대한 태도에 차이를 드러내면서도 '우리'라는 동일한 인칭대명사를 사용해서 locate하는 중인 자신에 위치들을 좀 더 효과적으로 부각시키는 것처럼 느껴진다. 자신이 속한 여러 집단의 차이, 간극에 대해서 직시하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으로 모두 포섭하는 데는 성공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뭐, 이러한 벨 훅스에 대한 생각은 페이퍼에서의 분석을 바탕으로 나 역시 공감하는 부분에 대해 생각해본 것이고 벨 훅스의 단행본들을 직접 더 읽어봐야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이다.)

 

으으 어렵다. 언제나 그렇듯 뱉어 놓고 보면 내가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더 헷갈린다.

 

선생님께서 그런 말을 하셨었는데,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이 반드시 지식인, 혹은 교육자로서의 정체성과 중첩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앞으로의 진로를 고민하는 데 있어서 대학원 진학을 최근에 포기했는데(반드시 대학원을 가야만 계속해서 공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걸로 밥먹고 사는 걸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는 뜻) 그것과 관련해서 내 머릿속을 마구마구 엉클어 놓던 생각들에 대해서 약간은 빛과 같은 말이 되었다. 흑.    

 

아직 질풍노도의 시기는 끝나지 않았어. 나를 살피는 일은 아마도 평생 해야할테지만.

많이많이 불안한 청춘.  

 

*

 

일단은 페이퍼에서 인용했던 벨 훅스 글 중에서 내 기억에 남는 것 재인용.

 

-현대 페미니스트 운동에 참여하는 많은 여성들은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따라서 우리의 교육적인 지위와 특권이 다른 여성들에게도 보편적인 것이라고 여기기 쉽고, 결과적으로 우리는 교육, 특히 기본적인 문해 교육을 페미니스트 아젠다로 만드는 것을 강조하지 않았다. (bell hooks, 1984)

 

-(성, 인종 그리고 계급 착취와 억압을 통해서) 어떤 집단의 여성들은 지식인으로서 발전할 수 있는 권리와 특권을 빼앗겨 왔다. 대부분의 여성들을 비판적이고 분석적인 이해 양식을 발전시키는 것이 해방 투쟁에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는 것 자체를 빼앗겼다. 이러한 박탈은 여성들로 하여금 지적인 활동에 대하여 확신을 갖지 못하고, 새로운 생각이나 정보를 갖는 것에 대하여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종종 페미니스트 운동의 유색 인종 여성 활동가들은 반-지식인적이다.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은 대학 교육에 접근해본 적이 없고, 더 높은 수준으로 나아가 본적도 없다.  (bell hooks, 1984)

 

-가장 자리에 살면서, 우리는 현실(reality)을 보는 독특한(particular) 방법을 발전 시켰다. 우리는 바깥에서 안을 보거나 안에서 바깥을 보기 둘 다를 했다. 우리는 주변(margin) 못지 않게 중심(center)에 주목했다. 이렇게 보는 방식을 통해서 우리는 전체 세계의 존재를 연상할 수 있었고, 주변과 중심 둘 다로 이루어진 주요한 본체(main body)를 연상할 수 있었다. (중략) 우리 일상생활의 구조로 말이암은 우리의 의식에 근거한 이 전체에 대한 감각은 우리에게 저항적인 세계관 -우리의 억압자 대부분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은 이 관점은 우리를 지탱시키고 가난과 절망을 극복하려는 우리의 싸움에 도움을 주고, 우리 자신과 우리의 연대에 관한 우리의 감각에 힘을 주었다.  (bell hooks,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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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거리에 비친 영상, Project Ver.5 - 여성, 미래와 버추얼 이미지

 

여성사전시관 영상관에 달거리에 비친 영상, Project Ver.5 - 여성, 미래와 버추얼 이미지를 보러 다녀왔다.

 

*

<기획의도>

미래, 300년 후 '여성'이란 이미지는 어떻게 자리 잡고 있을까. 로봇, 신인류, 복제인간 그 속에서 존재하는 여성의 이미지는 오늘날의 여성 이미지와 별 다를 바 없다. 500년 전 여성의 이미지가 오늘날과 별 다를 바 없었던 것처럼... 여성은 특징 없는 한 인류로, 섹스토이의 형태로, 생명체가 아닌 물질 같은 존재감으로 그려지곤 한다. 미디어의 21세기는 그렇게 여성의 몸을 그려 넣는다. 감정과 감성이 없는 차가운 물질로 그려지는 여성의 몸은 로봇, 복제인간, 신인류의 또 다른 버전으로 업그레이드된다. 황우석 교수의 자각 없는 난자 살인, 신인류를 만들기 위해 DNA 변종에 쓰이는 여성의 DNA와 유전자, 인간의 몸을 뛰어넘을 거라는 로봇에 대한 환상. 미래는 유토피아의 경계에서 멀어진 단일화되고, 편파적인 거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여성의 몸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된 이번 상영회는 다양한 작품을 통해 여성의 새로운 아젠다인 ‘미래와 여성의 몸’에 대한 고민을 함께 풀어보고자 한다.

 

*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슈리칭 감독의  ,

 

SF '포르노그라피'를 자청하고 있는 영화라서 심란했다.

 

여전히도,

내가 의도하진 않았지만

 

여성의 몸을 보면 부끄럽고 남성의 몸을 보면 무섭다.

 

많이 완화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몸에 대한 이런 성별화된 느낌이 순간적으로 확 느껴져서, 어쩔 수가 없더라.

 

 

 



* I.K.U 관련 감상글 : 박재환 영화리뷰

 

발췌:

 

 우리나라에서 개최되는 국제영화제는 어떤 면에서는 사회의 터부와 닫힌 성 의식과의 투쟁의 장이다. 믿거나 말거나 왕가위 감독의 <해피 투게더>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될 때만 해도 장국영, 양조위의 동성애 장면이 문제가 되어 영화관계자에게만 입장을 허용하는 코미디를 연출하기도 했었다. 그러던 부산영화제에서 '이른바' 무삭제판 <거짓말>이 상영되었고, 작년 처음 열린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가장 화제가 되었던 작품도 <로망스>라는 프랑스 여성감독의 작품이었다. 

지난 여름 부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상영된 < X등급영화로의 은밀한 여행>은 심야영화 최고의 인기작품이었다. 이번 전주영화제에서 최고의 화제를 불러모으고 있는 작품도 개막작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아니라 바로 이 <아이 케이 유>라는 신형 SF이다. 

감독은 애시 당초 예술과 외설의 논쟁을 유발시키는 것 따위에는 관심이 없고, 아예 포르노그라피의 외피로 영화전체를 포장해버린다. 영화제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자극적이며, 가장 뻔뻔스러운 포르노그라피가 있다면 바로 이 영화인 셈이다. 

영화제 프로그램 안내 책자에는 이 영화가 리들리 스콧 감독의 클래식 SF <블레이드 러너>를 교묘히 분해하고 섹스라는 코드로 단장해서 재조립한 영화라고 거창하게 설명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원전의 타이렐사는 게놈 주식회사로 바뀌었고, 레플리컨들의 추격전은 포르노제국의 건설을 위해 최고의 섹스 데이터를 수집하는 I.K.U 코더인 '레이코'를 구동시킨다는 형태로 변형된다. 

 

-

 

영화는 온갖 화려하고 자극적인 영상과 특수효과음으로 관객들의 혼을 빼놓는다. 엄청난 용량의 하드디스크를 몸에 장착시킨 레이코는 그들의 오퍼레이팅 시스템인 I.K.U 3.0을 구동하면서 새로운 오르가즘 데이터를 수집한다. 

그 구체적인 매커니즘은 황당하게도 오른팔이 유니콘과 페니스의 형태로 디지털화하여 변형되고, 특수한 기법으로 상대의 오르가즘의 데이터를 디지털화시켜 자신의 하드드라이버에 저장시키는 것이다. 

물론, <데몰리션 맨>같은 미래세계를 다룬 SF를 보면, 인류의 섹스가 육체적 결합 관계를 떠나 머리에 무언가를 뒤집어 서고 뇌파체험만으로 엑스타시에 이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러한 상상력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것인가를 보여주며, 또 한편으로는 얼마나 비인간적인 방식을 통해서라도 그러한 단계에 이르러하는 인간이 많은가를 '만화적' 상상력을 통해 여지없이 보여준다. 

-

아마도 이 영화에서 가장 쇼킹한, 그리고 가장 참신한 영상기법은 '다다미 쇼트' 이후 최고의 발견이랄 수 있는 '바기나 쇼트'일 것이다. 여성의 질내로 삽입된 페니스를 묘사하는 장면은 거의 감탄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애니메이션 CG로 묘사되는 이 장면은 아마 일생에 경험하게 될 최고의 충격화면의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 물론, 감독은 이 영화를 단순한 포르노로 만든 것이 아니라, 관객과의 일종의 게임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영화를 보다보면 이따금 '모자이크' 처리된 화면을 만나게 되기도 한다. 

이것은 영화제 사무국이 아니라, 감독의 의도에 의해 처음부터 계획된 것이다. 아마, 당신이 센스있는 영화팬이라면 그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의 은근한 상상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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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X 승무원과 함께 하는 열 번째 촛불문화제

 

 

'KTX 승무원과 함께 하는 열 번째 촛불문화제'에 다녀왔다.

한달 여 기간 동안 매주 참여한 문화제였지만, 이날은 유난히 발걸음이 더뎠다. 무거웠다.

 

KTX 승무원들을 지지하는 학생들이 모여서 성명서를 내보려던 계획이, 생각보다 여러 가지 난관이 있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게 된 데에 대해 마음 속에 답답함이 쌓이고 있었고,

 

파업 300일을 바로 다음 주에 앞두고, 여기서 더 장기화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중요한 시기인 듯한 느낌이 드는데 비정규직 관련 법안들이 순서대로 재빠르게 통과되어 버리니, 엎친데 덮침을 당하고 있는 상황이 안타깝기도 하고,

 

매주 한 두어명씩은 같이 가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이날은

그 친구들의 회의와 기타 사정으로 인해 문화제 참여하려면 나 혼자서 가야했기도 했고,   

 

그리고,

 

비가 왔고 피곤했다. 며칠 째 내 몸에 무리하게 돌아다녔던 건 맞다.

(정말이지 세계 최고의 적인) 귀차니즘이 아예 없지도 않았다.

 

 

비가 와도 문화제는 예정대로 진행된다는 소식을 듣고,

갈까 말까를 생각하는데,

문득 또 내 위치를 확인하게 되었다.

 

문제의 당사자와 당사자가 아닌 사람.

 

어떤 식으로든 나와 연결되지 않은 모순들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사안에 있어서 당사자가 아닌 입장, 그리고 나의 경우 대학생이라는 위치,

에 대해서 간혹 깨닫게 된다. 내가 의도해서, 생각해야만 하는 순간일지도 모르지만.

 

누군가는 이런 문화제를 정말 필사적으로 준비하고, 참여하고, 진행하는데

누군가는 참여의 여부를 두고 선택 할 수 있다는 것.

 

주로, 그런 종류의 생각의 갈림길에서 나의 위치를, 누군가와의 차이를,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이런 생각들을 할 때, 나 같은 경우, 갈까 말까를 고민한 나 자신의 망설임들을, '가야한다'는 당위를 배반한 부도덕함으로 매도하지는 않는다. 다른 위치에서 유발되는 내 각종 감정들이 느껴지고 보이는데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드는 건, 오히려 나를 포함한 타인들을 속이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단지, 내 자신에게 더 물을 뿐이다. 지금 이 순간의 내 위치에서, 나와 관련한 문제에 어떤 식으로 관여, 행동하는 것이 나에게나 타인에게나 더 좋을 수 있을지를..

 

*



 

다행히도 문화제를 시작한 부근 부터는 비가 오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참여는 눈에 띄게 적은 게 보였다. 부산지부 승무원분들이 선전전 때문에 오시지 못해서 더 적어진 것도 있었다. 심지어 공연을 하기로 했던 단체에서도 참석하지 않은 듯.

 

이날은 의료연대노조 서울대병원, 간병인, 청구성심병원 분회에서 몇 분이 연대발언을 해주신 게 기억에 남는다.

 

중년의 여성 노동자들을 '어머니'로, 이십대 부근의 여성 노동자들을 '딸들', '아가씨들'로 부르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불편했지만, 이들에게 있어서는 '동지들'이란 말보다 더 친근함을 불러일으키는 말이 아니었을까. 서로를 그렇게 호칭하는 데 있어서 말이다.

 

특히 이 분들은 ktx 승무원 한 분 한 분을 위한 미니 케익을 준비해오셨다!

 

나중에 문화제가 끝나고,

사람이 적었던 탓에, 승무원분들도 많이 참석하시지 못한 탓에,

얼결에 나도 케익을 받았다.

 

사실, 이날 문화제에 오기까지 내 마음의 여정을 생각하니,

케익이 가볍지 않았다. 오늘처럼 망설인 날에, 혼자 온 날에, 케익선물이라니. 아이러니.

혼자서 먹을 수는 없는 케익이었기에

이전에 함께 참여한 친구들과 함께 먹으려고,

그들이 몇몇 모여 회의를 하고 있는 학교로 올라오는 길에

이상하게 자꾸만 눈물이 났다.

 

혼자서라도 가겠다고 결정 내렸을 때의 허전함이 다시금 생각나서인지,

난 받을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 이렇게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받아 가게 되어' 스스로 부끄러움을 못 견딜 것 같아서 였는지,

잘 해결 되었으면 좋겠다는 조급한 바람과는 달리 자꾸만 떠오르는 안좋은 결말에 대한 불안감 때문인 것인지,

나도 잘 알 수는 없지만. 그랬다.

뭐, 학교에 올라와서 친구들과 조잘대며 케익을 나눠먹으면서는 또 기분이 좋아졌으니까. 단지 날씨가 갑자기 너무 추워져서 그랬던 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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