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06/12/18

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12/18
    페미니스트 정체성의 조화, 벨 훅스
    하노이
  2. 2006/12/18
    달거리에 비친 영상, Project Ver.5 - 여성, 미래와 버추얼 이미지(4)
    하노이

페미니스트 정체성의 조화, 벨 훅스

 

수업 종강일에 학생들의 기말 페이퍼 초안에 대한 코멘트가 이루어지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청강생이므로 기말 페이퍼에서 면제되는 특권을 얻어서, 다른 학생들에게 약간의 부채감과 약간의 미안함을 느끼며, 그리고 사실은 안도하는 마음과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수업에 들어갔다.  

 

모든 사람들의 기말 페이퍼가 흥미롭고 신기했는데(어떻게 이렇게 쓸 수 있는 능력이 있는걸까!) 그 중에서도 내 관심을 가장 끌었던 것은 벨 훅스의 지식인론과 교육론을, 그의 페미니스트 입장론과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분석한 페이퍼였다.

 

수업 시간에 벨 훅스의 글은 "Choosing the Margin as a Space of Radical Openess" (1990) 라는 몇 페이지 안되는 짧은 것으로 하나 읽었었는데, 분량도 짧고 꽤나 선동적인 글(?)이라서 그의 페미니스트 입장론에 대해 자세하게 살펴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사실 나는 제대로 읽어가지 못했다는 게 중요) 페이퍼를 쓰신 분은 벨 훅스를 주요대상으로 잡으면서 단행본을 많이 구해 읽으신 것 같았는데, 난 내가 이전에 알지 못했던 정보들을 접할 수 있는 즐거움과 더불어서, 벨 훅스를 읽는 방식이 재미있게 다가왔다. 완성본을 볼 수 있으면 좋을텐데. 아쉽다. (청강생으로, 나는 수업에 기여한 바가 매우 적고, 주로 얻어가기만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많다.,,-_ㅜ)

 

흑인/여성/지식인/페미니스트/교육자 로서의 자신의 입장/위치들을 분명히 밝히고, 특히 흑인-여성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강조하면서, 이처럼 주변(margin)에 위치한 사람들이 가지는, 세계에 대해 총체적 인식, 저항적 인식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벨 훅스의 입장론을, 그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하나의 형태가 'I'와 'WE'라는 인청대명사의 의도적인 사용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보편을 자처하는 듯이, 주어를 생략하는 각종 문장들과 '우리'라고 지칭하고 있는 게 대체 어떤 사람들을 이야기하는지 알 수 없도록 모호하면서도 마치 한 집단을 대표될 수 있다고 여기는 문장들에게 질려버리는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런 오류와 왜곡이 두려워서 내가 글이란 걸 쓸 때는 언제나 '나'라는 주어를 주로 사용함으로써 내 위치를 밝혀야만 한다고 강박적으로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나의 경험들을 통해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자 했을 때, 주어인 '나'를 주로 쓰는 방법이나 내 입장이 내 '경험'에서 나올 수 있었음을 밝히려고 노력했던 방법은, 곧잘 '개인적인 일기' 수준의 성토로 받아들여지기 십상이었다. 특수한 경험으로 넘겨지기 일쑤였다. 그렇게 되는 것이, 내 방식만의 잘못이거나 애초에 의도한 바가 옳지 않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언제나 고민이 되었다. 소문자, 복수로서의 여성womyn을 이야기하는 여성주의는, 집단으로서의 여성 의미와 집단에 속한(혹은 속할 수밖에 없는) 개인을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는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어느 한쪽을 축소시키지 않으면서 효과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지.

 

벨 훅스는 자신의 가진 정체성, 특히 흑인 여성으로서와 지식인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 모두를 놓치지 않으려는 시도를 과감하게 하는 사람인데 화자인 벨 훅스는 자신의 글에서 각 집단에 대한 태도에 차이를 드러내면서도 '우리'라는 동일한 인칭대명사를 사용해서 locate하는 중인 자신에 위치들을 좀 더 효과적으로 부각시키는 것처럼 느껴진다. 자신이 속한 여러 집단의 차이, 간극에 대해서 직시하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으로 모두 포섭하는 데는 성공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뭐, 이러한 벨 훅스에 대한 생각은 페이퍼에서의 분석을 바탕으로 나 역시 공감하는 부분에 대해 생각해본 것이고 벨 훅스의 단행본들을 직접 더 읽어봐야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이다.)

 

으으 어렵다. 언제나 그렇듯 뱉어 놓고 보면 내가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더 헷갈린다.

 

선생님께서 그런 말을 하셨었는데,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이 반드시 지식인, 혹은 교육자로서의 정체성과 중첩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앞으로의 진로를 고민하는 데 있어서 대학원 진학을 최근에 포기했는데(반드시 대학원을 가야만 계속해서 공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걸로 밥먹고 사는 걸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는 뜻) 그것과 관련해서 내 머릿속을 마구마구 엉클어 놓던 생각들에 대해서 약간은 빛과 같은 말이 되었다. 흑.    

 

아직 질풍노도의 시기는 끝나지 않았어. 나를 살피는 일은 아마도 평생 해야할테지만.

많이많이 불안한 청춘.  

 

*

 

일단은 페이퍼에서 인용했던 벨 훅스 글 중에서 내 기억에 남는 것 재인용.

 

-현대 페미니스트 운동에 참여하는 많은 여성들은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따라서 우리의 교육적인 지위와 특권이 다른 여성들에게도 보편적인 것이라고 여기기 쉽고, 결과적으로 우리는 교육, 특히 기본적인 문해 교육을 페미니스트 아젠다로 만드는 것을 강조하지 않았다. (bell hooks, 1984)

 

-(성, 인종 그리고 계급 착취와 억압을 통해서) 어떤 집단의 여성들은 지식인으로서 발전할 수 있는 권리와 특권을 빼앗겨 왔다. 대부분의 여성들을 비판적이고 분석적인 이해 양식을 발전시키는 것이 해방 투쟁에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는 것 자체를 빼앗겼다. 이러한 박탈은 여성들로 하여금 지적인 활동에 대하여 확신을 갖지 못하고, 새로운 생각이나 정보를 갖는 것에 대하여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종종 페미니스트 운동의 유색 인종 여성 활동가들은 반-지식인적이다.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은 대학 교육에 접근해본 적이 없고, 더 높은 수준으로 나아가 본적도 없다.  (bell hooks, 1984)

 

-가장 자리에 살면서, 우리는 현실(reality)을 보는 독특한(particular) 방법을 발전 시켰다. 우리는 바깥에서 안을 보거나 안에서 바깥을 보기 둘 다를 했다. 우리는 주변(margin) 못지 않게 중심(center)에 주목했다. 이렇게 보는 방식을 통해서 우리는 전체 세계의 존재를 연상할 수 있었고, 주변과 중심 둘 다로 이루어진 주요한 본체(main body)를 연상할 수 있었다. (중략) 우리 일상생활의 구조로 말이암은 우리의 의식에 근거한 이 전체에 대한 감각은 우리에게 저항적인 세계관 -우리의 억압자 대부분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은 이 관점은 우리를 지탱시키고 가난과 절망을 극복하려는 우리의 싸움에 도움을 주고, 우리 자신과 우리의 연대에 관한 우리의 감각에 힘을 주었다.  (bell hooks, 1984)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달거리에 비친 영상, Project Ver.5 - 여성, 미래와 버추얼 이미지

 

여성사전시관 영상관에 달거리에 비친 영상, Project Ver.5 - 여성, 미래와 버추얼 이미지를 보러 다녀왔다.

 

*

<기획의도>

미래, 300년 후 '여성'이란 이미지는 어떻게 자리 잡고 있을까. 로봇, 신인류, 복제인간 그 속에서 존재하는 여성의 이미지는 오늘날의 여성 이미지와 별 다를 바 없다. 500년 전 여성의 이미지가 오늘날과 별 다를 바 없었던 것처럼... 여성은 특징 없는 한 인류로, 섹스토이의 형태로, 생명체가 아닌 물질 같은 존재감으로 그려지곤 한다. 미디어의 21세기는 그렇게 여성의 몸을 그려 넣는다. 감정과 감성이 없는 차가운 물질로 그려지는 여성의 몸은 로봇, 복제인간, 신인류의 또 다른 버전으로 업그레이드된다. 황우석 교수의 자각 없는 난자 살인, 신인류를 만들기 위해 DNA 변종에 쓰이는 여성의 DNA와 유전자, 인간의 몸을 뛰어넘을 거라는 로봇에 대한 환상. 미래는 유토피아의 경계에서 멀어진 단일화되고, 편파적인 거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여성의 몸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된 이번 상영회는 다양한 작품을 통해 여성의 새로운 아젠다인 ‘미래와 여성의 몸’에 대한 고민을 함께 풀어보고자 한다.

 

*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슈리칭 감독의  ,

 

SF '포르노그라피'를 자청하고 있는 영화라서 심란했다.

 

여전히도,

내가 의도하진 않았지만

 

여성의 몸을 보면 부끄럽고 남성의 몸을 보면 무섭다.

 

많이 완화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몸에 대한 이런 성별화된 느낌이 순간적으로 확 느껴져서, 어쩔 수가 없더라.

 

 

 



* I.K.U 관련 감상글 : 박재환 영화리뷰

 

발췌:

 

 우리나라에서 개최되는 국제영화제는 어떤 면에서는 사회의 터부와 닫힌 성 의식과의 투쟁의 장이다. 믿거나 말거나 왕가위 감독의 <해피 투게더>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될 때만 해도 장국영, 양조위의 동성애 장면이 문제가 되어 영화관계자에게만 입장을 허용하는 코미디를 연출하기도 했었다. 그러던 부산영화제에서 '이른바' 무삭제판 <거짓말>이 상영되었고, 작년 처음 열린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가장 화제가 되었던 작품도 <로망스>라는 프랑스 여성감독의 작품이었다. 

지난 여름 부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상영된 < X등급영화로의 은밀한 여행>은 심야영화 최고의 인기작품이었다. 이번 전주영화제에서 최고의 화제를 불러모으고 있는 작품도 개막작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아니라 바로 이 <아이 케이 유>라는 신형 SF이다. 

감독은 애시 당초 예술과 외설의 논쟁을 유발시키는 것 따위에는 관심이 없고, 아예 포르노그라피의 외피로 영화전체를 포장해버린다. 영화제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자극적이며, 가장 뻔뻔스러운 포르노그라피가 있다면 바로 이 영화인 셈이다. 

영화제 프로그램 안내 책자에는 이 영화가 리들리 스콧 감독의 클래식 SF <블레이드 러너>를 교묘히 분해하고 섹스라는 코드로 단장해서 재조립한 영화라고 거창하게 설명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원전의 타이렐사는 게놈 주식회사로 바뀌었고, 레플리컨들의 추격전은 포르노제국의 건설을 위해 최고의 섹스 데이터를 수집하는 I.K.U 코더인 '레이코'를 구동시킨다는 형태로 변형된다. 

 

-

 

영화는 온갖 화려하고 자극적인 영상과 특수효과음으로 관객들의 혼을 빼놓는다. 엄청난 용량의 하드디스크를 몸에 장착시킨 레이코는 그들의 오퍼레이팅 시스템인 I.K.U 3.0을 구동하면서 새로운 오르가즘 데이터를 수집한다. 

그 구체적인 매커니즘은 황당하게도 오른팔이 유니콘과 페니스의 형태로 디지털화하여 변형되고, 특수한 기법으로 상대의 오르가즘의 데이터를 디지털화시켜 자신의 하드드라이버에 저장시키는 것이다. 

물론, <데몰리션 맨>같은 미래세계를 다룬 SF를 보면, 인류의 섹스가 육체적 결합 관계를 떠나 머리에 무언가를 뒤집어 서고 뇌파체험만으로 엑스타시에 이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러한 상상력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것인가를 보여주며, 또 한편으로는 얼마나 비인간적인 방식을 통해서라도 그러한 단계에 이르러하는 인간이 많은가를 '만화적' 상상력을 통해 여지없이 보여준다. 

-

아마도 이 영화에서 가장 쇼킹한, 그리고 가장 참신한 영상기법은 '다다미 쇼트' 이후 최고의 발견이랄 수 있는 '바기나 쇼트'일 것이다. 여성의 질내로 삽입된 페니스를 묘사하는 장면은 거의 감탄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애니메이션 CG로 묘사되는 이 장면은 아마 일생에 경험하게 될 최고의 충격화면의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 물론, 감독은 이 영화를 단순한 포르노로 만든 것이 아니라, 관객과의 일종의 게임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영화를 보다보면 이따금 '모자이크' 처리된 화면을 만나게 되기도 한다. 

이것은 영화제 사무국이 아니라, 감독의 의도에 의해 처음부터 계획된 것이다. 아마, 당신이 센스있는 영화팬이라면 그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의 은근한 상상력인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