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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12/21
    '복수'의 의미는?
    하노이
  2. 2006/12/21
    KTX 승무원 투쟁 승리를 위한 300일 촛불 문화제
    하노이

'복수'의 의미는?

 

언니네 글 [복수도 치유다, 하드캔디]  와 관련한 글

 

 

'복수'라고 하는 게 '내가 받은 만큼, 상대에게 되돌려준다'라는 의미, '받은 만큼 상대에게 되돌려주었으므로 이제 뒤끝없이 끝이다'라는 류의 의미라면, 나는 그 복수라는 의미가 남성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언니네글에서처럼, "'네가 한 짓이 나에게는 이런 고통을 주었다', '네가 한 짓은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나쁜 짓이다'는 것을 (가해자에게) 알려주는 것",은 위와 같은 복수의 의미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관계와 소통이 중요한 여성주의에서는, 개인의 성장이나 치유, 혹은 변화가 결코 혼자서만 이루어 낼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으며, 서로 오고가는 무언가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게 아닐까. 일방적으로 100과 100이 오고가는 그 무엇의 복수개념, 갈 때는 니가 피해자, 올 때는 내가 피해자, 식의 양분된 복수개념은 여성주의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남성적 의미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가해와 피해, 상처가 뒤섞인 상태에서 어느 누군가를 어떤 상태로 고정시키는 일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어떤 폭력적인 사건에 대해서, 그 상황을 함께 했던 누군가가, 상대방에게 '나는 그 상황에서 이런 고통을 느꼈어요'라고 알리는 것, '당신은 같은 시공간에 있었던 나의 경험이 당신과 어떻게 달랐는지 아는 건가요'라고 묻는 것, 말로 해서 못알아먹는다면 다른 수단이라도 써서(!) 상대방에게 자신의 느낌을 공유시키는 것. 그런 것들이, 일단은 소통의 시도인 셈이 아닐까? 자신의 몸에 각인된 경험과 너무나 맞지 않는 언어적 기억이,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다시 한 번 그 경험을 정리해내기 위한 시도로서의 소통이 아닐까. 그 소통의 시도의 경우에, 좀 다른 이야기지만, 만약 권력관계에서 보다 약자의 위치에 놓인 사람이라면 '이성적인' 언어로서의 소통 시도가 얼만큼 가능할까. 이런 생각들을 하는 게, "약자의 최종적이고 강력한 수단이 '폭력뿐'이다", 라는 말을 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단지,

 

애초에,

(대부분의) '그'들은 자신의 행위의 폭력성에 무감각하고 상대방이 나와 경험이 다를 수도 있다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으며 자신과 '다른' 목소리의 피드백이 존재할 수 있다라는 걸 상상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상대로부터 시도된 소통이, '어이없어서',

"이건 내게 폭력이야"라고 외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으. 언어의 부재?)

'그'들은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테지만, 그 때의 자신의 경험과 상대의 경험이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주로 차별적이었겠지만)에 대해서나 상대가 이렇게 소통의 시도를 하게 되는 주목적-어쩌면 소통 그 자체일수도 있겠지만-보다는 상대의 행위 자체를 '가해'로, 자신을 '피해자'로 고정시켜버리는데서, 그쳐버리기 쉽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     

 

언니네에서는 하드캔디 속 나이 어린 여성의 행위에 대해서 관객들이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가 "폭력의 주체가 뒤바뀐 낯선 구도에 불편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여성이 이유있는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가 되는 것은 이유없는 폭력을 당하는 피해자가 되는 것보다 익숙하지 않은 장면이니까"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폭력의 주체가 뒤바뀌었다고 해서, 행위의 의미를 담은 맥락이나 효과에 대한 판단까지 동등하게 될 수 있는 건 문장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 아닐까? 흐으.

 

여기서 또 엉뚱하게 생각나는,

학내 성폭력 해결과정에 있어 '원칙'이라고 일컬어지는 것 중 하나인

'피해자 중심주의'는,

남성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상대방에게 소통하려는 시도 자체가 어려운 사람의 목소리를 키우는 것, 들리게 하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지 않나 하는 생각.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 피해자 중심주의의 의미가,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모든 칼날을 휘두를 수 있게 하는, '피해자 제멋대로주의'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대책위나 비대위의 해결과정에서 가해자의 '처벌'이란 부분이 '복수'의 남성적 의미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오해'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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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X 승무원 투쟁 승리를 위한 300일 촛불 문화제

 

“사회적 약자 돌아보는 나눔 경영, 철도공사가 몸소 실천해야”


KTX 승무원 투쟁 승리를 위한 300일 촛불 문화제


- 12월 22일(금) 늦은 6시 세종로 사거리 -



“국민의 다수가 철도공사는 틀렸고, KTX 승무원의 주장이 옳다고 합니다. 노동계와 여성계는 물론이고 학계, 시민, 종교, 법조, 문화예술 등 각계각층에서 KTX 승무원 문제의 해결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정부만 입을 닫고 있고, 철도공사는 모르쇠와 호도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합리적으로 문제가 해결되길 바랍니다.”

- 12월 19일, KTX 승무원 문제의 연내 해결을 촉구하는 각계각층 연대 선언 중 -



지난 19일 서울역 광장에서는 “KTX 승무원 문제 연내 해결을 촉구하는 2000인 선언” 기자회견이 열렸습니다. 기자회견을 주최한 승무지부에서는 2,000명을 훌쩍 넘어 2,828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연대 선언에 참여하였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기자회견 참석자들은 철도공사가 승무원들을 직접고용하여 시민들의 바램을 더 이상 외면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바로 이튿날, 철도공사 이철 사장은 “구세군 종소리와 ‘나눔’ 경영”이라는 제목으로 한 언론사에 <기고>를 했습니다. 날씨가 추워질수록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약자에게 눈길을 돌리는 마음 씀씀이가 살갑다며, ‘나눔’ 경영이라는 말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KTX를 타봤다는 어느 보육원생의 들뜬 목소리를 들으며 기차가 싣고 가는 것이 단순히 사람과 화물만이 아니라는 걸 알았”고, “기차는 어려운 이웃들의 꿈도 함께 싣고 달리는 것”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새해에는 모든 기업들이 더 많은 ‘나눔 경영’으로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를 기대한다며 기고문을 마치고 있습니다(출처: 네이버 뉴스).

옳은 소리입니다. 감동적인 글입니다. 그러나 이철 사장이 잊고 있는 것은 ‘사회적 약자’는 바로 당신 옆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고객들의 꿈을 실어 나르며 이들의 안전을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하루아침에 일터를 잃고 거리에서 외침을 한지 어느덧 300일을 맞이하는 승무원들은 바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운운하는 철도공사가 내몬 사회적 약자입니다. 이들은 일터로 돌아갈 수 있기를 기대하며 하얀 전지에 소망 한 자락을 남기고, 야광봉으로나마 ‘직접고용’을 만들어내고, 간절한 염원을 담아 풍등을 날리고, 노란 풍선에 꿈을 실어 보내는 사회적 약자입니다.

오는 금요일 세종로 사거리에서는 KTX 승무원 문제가 연내에 해결될 것을 기원하며 2000인 선언에 동참했던 그 마음으로, 새해에는 거리에서가 아니라 KTX에서 승무원들을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노란 풍선에 소망을 담았던 그 마음으로 열한 번째 촛불을 밝힙니다. 촛불문화제에 함께 하셔서 승무원 직접고용을 위한 의지와 연대의 힘을 모아주시기를 요청합니다. 감사합니다.



◎ 일시: 2006년 12월 22일(금) 늦은 6시~

◎ 장소: 세종로사거리 (동아일보사 맞은편, 동화면세점 앞)


◎ 프로그램

  ♠ 문화제 알리기

  ♠ 여는 마당 공연 : 풍물패 ‘삶터’

  ♠ ‘다시 시작이다’ : KTX 승무지부 조합원들의 희망 글 & 공연

  ♠ 페미니스트 가수 안혜경 공연

  ♠ 세종문화회관 합창단 공연

  ♠ 꽃다지 공연

  ♠ 문화제 정리


(문의: KTX 승무지부 010-7511-4868 / 여성노동네트워크 011-9894-2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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