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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의미는?

 

언니네 글 [복수도 치유다, 하드캔디]  와 관련한 글

 

 

'복수'라고 하는 게 '내가 받은 만큼, 상대에게 되돌려준다'라는 의미, '받은 만큼 상대에게 되돌려주었으므로 이제 뒤끝없이 끝이다'라는 류의 의미라면, 나는 그 복수라는 의미가 남성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언니네글에서처럼, "'네가 한 짓이 나에게는 이런 고통을 주었다', '네가 한 짓은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나쁜 짓이다'는 것을 (가해자에게) 알려주는 것",은 위와 같은 복수의 의미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관계와 소통이 중요한 여성주의에서는, 개인의 성장이나 치유, 혹은 변화가 결코 혼자서만 이루어 낼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으며, 서로 오고가는 무언가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게 아닐까. 일방적으로 100과 100이 오고가는 그 무엇의 복수개념, 갈 때는 니가 피해자, 올 때는 내가 피해자, 식의 양분된 복수개념은 여성주의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남성적 의미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가해와 피해, 상처가 뒤섞인 상태에서 어느 누군가를 어떤 상태로 고정시키는 일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어떤 폭력적인 사건에 대해서, 그 상황을 함께 했던 누군가가, 상대방에게 '나는 그 상황에서 이런 고통을 느꼈어요'라고 알리는 것, '당신은 같은 시공간에 있었던 나의 경험이 당신과 어떻게 달랐는지 아는 건가요'라고 묻는 것, 말로 해서 못알아먹는다면 다른 수단이라도 써서(!) 상대방에게 자신의 느낌을 공유시키는 것. 그런 것들이, 일단은 소통의 시도인 셈이 아닐까? 자신의 몸에 각인된 경험과 너무나 맞지 않는 언어적 기억이,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다시 한 번 그 경험을 정리해내기 위한 시도로서의 소통이 아닐까. 그 소통의 시도의 경우에, 좀 다른 이야기지만, 만약 권력관계에서 보다 약자의 위치에 놓인 사람이라면 '이성적인' 언어로서의 소통 시도가 얼만큼 가능할까. 이런 생각들을 하는 게, "약자의 최종적이고 강력한 수단이 '폭력뿐'이다", 라는 말을 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단지,

 

애초에,

(대부분의) '그'들은 자신의 행위의 폭력성에 무감각하고 상대방이 나와 경험이 다를 수도 있다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으며 자신과 '다른' 목소리의 피드백이 존재할 수 있다라는 걸 상상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상대로부터 시도된 소통이, '어이없어서',

"이건 내게 폭력이야"라고 외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으. 언어의 부재?)

'그'들은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테지만, 그 때의 자신의 경험과 상대의 경험이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주로 차별적이었겠지만)에 대해서나 상대가 이렇게 소통의 시도를 하게 되는 주목적-어쩌면 소통 그 자체일수도 있겠지만-보다는 상대의 행위 자체를 '가해'로, 자신을 '피해자'로 고정시켜버리는데서, 그쳐버리기 쉽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     

 

언니네에서는 하드캔디 속 나이 어린 여성의 행위에 대해서 관객들이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가 "폭력의 주체가 뒤바뀐 낯선 구도에 불편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여성이 이유있는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가 되는 것은 이유없는 폭력을 당하는 피해자가 되는 것보다 익숙하지 않은 장면이니까"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폭력의 주체가 뒤바뀌었다고 해서, 행위의 의미를 담은 맥락이나 효과에 대한 판단까지 동등하게 될 수 있는 건 문장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 아닐까? 흐으.

 

여기서 또 엉뚱하게 생각나는,

학내 성폭력 해결과정에 있어 '원칙'이라고 일컬어지는 것 중 하나인

'피해자 중심주의'는,

남성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상대방에게 소통하려는 시도 자체가 어려운 사람의 목소리를 키우는 것, 들리게 하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지 않나 하는 생각.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 피해자 중심주의의 의미가,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모든 칼날을 휘두를 수 있게 하는, '피해자 제멋대로주의'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대책위나 비대위의 해결과정에서 가해자의 '처벌'이란 부분이 '복수'의 남성적 의미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오해'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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