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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먼저 더 오래

 

고정희 시인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알고,

언젠가는 가보리라,  결심한지 일년이 좀 지났을까.

 

최근의 여러 무리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이번이 아니면

또 몇 개월을 기다려야 할 지 모른다는 초조함에,

가야 하는 모임을 하나 포기하고, 주말을 비워서 다녀왔다.

 

해남여행을 다룬 수많은 인터넷 글들 중에서

고정희 시인 생가를 여행 루트에 포함하고 있는 여행 안내글을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시인 생가를 방문한 기록들을 자세히 훑으며

어떻게 찾아가야 하는지를 살피다가, 결국 주소 한 줄만 기억해 놓은 채

일단 해남으로 떠났다.

 

여행은 .. 짧디 짧은 시간이었지만,

서울에 올라와서 갑자기 여러 소음들이 낯설게 느껴지고,

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틈 속에 함께 하는 것이 익숙치 않게 느껴질만큼

내게 편안함, 평온함을 안겨주었다.

 

벌써 그 곳에 다시 가볼 생각을 하고 있다.

언젠가는, 이번처럼 차가운 바람과 공기를 온 몸으로 느끼며 떨어야 했던 그런 날 말고,

(이것도 나쁘진 않았지만..) 약간은 따뜻할 때에. 약간만 서늘한 때에. 가보고 싶다.

 

여행에 관한 기록은 곧 남겨놔야지!

 



 

더 먼저 기다리고 더 오래 기다리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기다리는 고통 중에 사랑의 의미를 터득할 것이요

 

더 먼저 달려가고 더 나중까지 서 있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서 있는 아픔 중에 사랑의 길을 발견할 것이요

 

더 먼저 문을 두드리고 더 나중까지 문닫지 못하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문닫지 못하는 슬픔 중에 사랑의 문을 열게 될 것이요

 

더 먼저 그리워하고 더 나중까지 그리워 애통하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그리워 애통하는 눈물 중에 사랑의 삶을 차지할 것이요

 

더 먼저 외롭고 더 나중까지 외로움을 떠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외로움의 막막궁산 중에 사랑의 땅을 얻게 될 것이요

 

더 먼저 상처받고 더 나중까지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상처로 얼싸안는 절망 중에 사랑의 나라로 들어갈 것이요

 

더 먼저 목마르고 더 나중까지 목말라 주린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주리고 목마른 무덤 중에서라도 사랑의 궁전을 짓게 되리라

 

그러므로 사랑으로 씨를 뿌리고 열매 맺는 사람들아

사랑의 삼보-상처와 눈물과 외로움 가운데 솟은

사랑의 일곱가지 무지개

이 세상 끝날까지 그대 이마에 찬란하리라

 

 

-

 

 

이번 여행 덕분에 더 알게 된 고정희님의 시 중에서,

요즘의 내게 가장 마음에 와닿는. 언제까지나 기억하고픈 시가 있다.   

다 좋지만.. 3연과 5, 6연 참 마음에 든다.

 

'상처와 눈물, 외로움'이 '사랑의 삼보'라 하셨지만,

그것들이 사랑의 모든 구성요소는 아니라고. 그들의 합이 사랑은 아니라고.

단지, 사랑을 더 값지게 하는 것, 사랑이 필요로 하는 것, 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사랑은 내게 언제나 어떤 것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상처와 눈물, 외로움과 분리되어 자기 순서를 기다렸다 주어진 게 아니라,

그 모든 과정들 자체였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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