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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울의 움직이는 성




제목: 미야자키 최초의 러브 스토리

전문: 미야자키 하야오의 신작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11월 20일 일본 현지 개봉을 앞두고 있다. 미야자키의 새로운 판타지 로맨스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세운 거대한 기록들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인지 전세계의 관심이 쏠려 있는 가운데, <하울의 움직이는 성> 도쿄 시사회에 다녀왔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초대형 블록버스터도 아기자기한 소품도 아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처럼 미야자키 애니메이션의 집대성도 아니고, <붉은 돼지>처럼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에 근거해 빚어진 작품도 아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는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미야자키 애니메이션, 그것도 올해 63세가 된 미야자키 하야오가 사랑에 빠진 소녀의 마음으로 내놓은 한 편의 판타지이자 유쾌한 러브 스토리다.
어찌된 영문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미 5년 전 영국의 아동 문학가 다이애나 윈 존스의 동명 판타지 동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이 동화에서 상식적으로는 절대 움직일 수 없는 성이 움직인다는 것과 소녀가 할머니가 된다는 두 가지 설정은 특히 미야자키를 매료시켰다. "이걸로 충분히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겠어!"라고 프로듀서인 스즈키 토시오에게 외쳤다니 거의 '심봤다'는 심정이었던 듯하다. 그 자신부터가 만만찮은 노인네인 미야자키는 90세 노파의 사랑을 무척 건강하고 밝게 그린다. 젊음이 세상의 중심인 요즘 시대의 흐름과 달리 '나이 듦'이라는 인생의 경로 속에서 색다른 즐거움을 찾아내고 있다. 원작의 기본 설정만 남겨두고 이야기 자체를 대폭 수정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애니메이션 사상 처음으로 할머니를 여주인공 삼는다는 전례 없는 시도와 더불어 한번쯤 '전쟁 속에서 꽃피는 사랑'을 그려보고 싶었다는 미야자키의 소망이 반영돼 있다.

중제: 청소부 할머니와 꽃미남 마법사의 동거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모자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18세의 소피는 사는 게 별로 재미없다. 앞으로도 모자 가게를 계속하고 싶은 건지 아닌지도 확실치 않다. 무표정한 얼굴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소피는 골목길을 걷다가 군인들에게 희롱을 당한다. 그 순간 누군가 나타나 궁지에 빠진 소피를 안고 하늘로 훌쩍 날아오른다. 그가 바로 뭇 사람들은 두려워하지만 여자들은 보는 순간 빠져든다는 마법사 하울이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이 도입부를 보고 있으면 정말 두근거린다. 황무지 마녀의 부하들에게 쫓기고 있던 하울이 마침 군인들에게 놀림을 당하던 소피를 안고 훌쩍 하늘로 날아올라 함께 공중을 걷는 장면은 특히 10대에서 30대 중반까지의 여성 관객들의 가슴에 강력히 꽂힐 만하다. 두 주인공의 캐릭터를 소개하며 관객들을 일상에서 판타지의 세계로 단숨에 빨아들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날의 아찔한 경험에 마음을 빼앗긴 소피에게 곧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난다. 하울을 짝사랑하는 황야의 마녀가 소피를 질투해 저주를 건 때문이다. 눈 깜짝할 사이 주름투성이의 90세 할머니로 변해버린 소피는 주변 사람들이 걱정할까봐 스스로 가출하고, 황야를 헤매다 하울의 성에 들어간다. 그렇게 할머니 소피와 '꽃미남' 마법사 하울의 기이한 동거가 시작된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그동안의 미야자키 애니메이션과 꽤 달라 보이는 것은 이 두 주인공 캐릭터의 힘이 크다. 카리스마 넘치는 마법사 하울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천공의 성 라퓨타> <모노노케 히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이르기까지 늘 모범적이었던 미야자키 애니메이션의 남자 주인공들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일본의 막강 아이돌 그룹 'SMAP'의 멤버 기무라 타쿠야가 목소리를 맡아 화제가 된 하울은 그야말로 어쩔 수 없는 캐릭터다. 평상시 별로 하는 일도 없이 놀고먹는 귀차니스트에 소심남이지만 그 때문에 여자들에게 인기 많은 꽃미남의 전형이랄까. 기무라 타쿠야가 "하울 캐릭터의 원화를 받았을 때 그걸 떨어뜨릴 뻔했다. 너무 좋아서"라고 했을 정도니, 외모는 확실히 수준급이다. 여러 왕국의 왕들이 러브 콜을 보내는 능력 있는 마법사면서도 치솟는 인기가 부담스러운 그는 성을 움직여 자유롭게 떠돌아다니기를 원할 뿐이다.
그런 하울에게 반한 우울 소녀 소피는 할머니가 된 뒤로 무진장 건강해진다. 무미건조하던 일상에서 자신이 할머니가 된 일대 사건을 즐겁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하울의 성에서 청소부로 살게 된 후부터는 구부정하던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하울과 그의 견습생 마이클, 하울과 계약을 맺고 움직이는 성의 화덕에 살고 있는 불의 악마 캘시퍼를 보살피며 살림을 도맡는다. 나이 드는 것은 쉽지 않지만 그리 나쁜 것도 아니라는 삶의 통찰은 명랑 할머니 소피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리고 그 속을 알 수 없는 미야자키의 연출력은 90세 할머니와 꽃미남 마법사 사이에 흐르는 기묘한 감정의 교류를 세심하게 포착한다. 규모나 스케일, 전체 완성도를 떠나서 소피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한 컷만으로도 마음의 두근거림과 기발한 유머가 느껴지게 하는 것, 그건 역시 아무나 지닐 수 있는 재능은 아니다.
그리하여,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전해주는 지축을 울리는 것 같은 장대함과 박력과는 종류가 다른 감동이 존재한다. 소피가 하울의 과거와 비밀을 알게 되는 후반부의 클라이맥스는 가슴을 먹먹하게 할 만큼 슬프기도 하다. 삶의 변화를 받아들이며 건강하게 살아가는 소피에게서 흘러나오는 감동은 이 특별한 주인공들을 둘러싼 중세의 풍경과 이어진다.

중제 : 일본인이 동경하는 이상의 세계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배경은 마법과 과학이 공존하는 19세기 말이다. 마을에 흐르는 강 옆으로 증기 기관차가 지나가고, 하늘에는 동물의 날개가 달린 비행선들이 떠다닌다. 사람들은 거리를 가로지르는 전차를 타고 다니며, 바다에는 증기 여객선이 떠 있다. 왕국과 왕국 사이에는 전쟁이 벌어지고 폭탄을 실은 함선 모양의 비행기들이 하늘에서 격전을 벌인다. 근미래 화가들이 '20세기는 아마도 이럴 것'이라고 공상했을 만한 풍경들이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가득 채우고 있다. 스즈키 토시오 프로듀서는 "이상하다고 여길 것이다. 비행 물체가 등장하는데, 거리에 자동차는 없고, 집안에 TV는 보이지 않는다. 미야자키가 기계와 인간의 사이가 좋았던 시대는 그러했을 거라고 상상하고 그렸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시대적 배경이야말로 병기광이자 비행 마니아로서의 미야자키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온갖 고철들을 모아놓은 덩어리 같은 기괴한 하울의 성이 있다.
마을 사람들은 증기를 내뿜으며 쿵쿵 안개 속을 가로질러가는 하울의 성을 집 안에서 보며 마법사 하울에 대한 공상을 키워간다. 마법과 과학이 한데 뭉쳐 있는 하울의 성은 미야자키의 상상력으로 닭다리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네 개의 다리(원작에는 없는 것으로 원작자 윈 존스의 감탄을 자아내게 한 설정이다)를 얻게 됐다. 미야자키의 독특한 비주얼 스케치로 탄생한 성은 3D 기술력에 의해 입체감이 있는 회화 그림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이 새로운 비주얼의 메카닉은 분명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거신병이나 <천공의 성 라퓨타>의 로봇 병정만큼 오래 사랑받을 만하다.
미야자키의 상상력이 총동원된 마법과 과학의 시대는 정확히 어느 나라인지 알 수 없는 유럽의 한 마을 안에 담겨 있다. 아늑하게 펼쳐진 초록색 초원과 언덕, 투명하게 푸른 하늘과 지중해를 연상시키는 바다, 그리고 그림 같은 골목길과 항구, 시장통의 풍경은 지브리 애니메이터들이 프랑스 알자스 지방에 배경 조사를 다녀온 뒤 만들어진 것이며 미야자키가 오랜 시간 동경하고 있던 마음속 풍경을 담아낸 것이기도 하다. 소피의 아늑한 모자 가게나 왕실 마법사 술리만이 기거하는 왕궁 거리 등의 배경은 지브리만의 고급스런 색채 감각이 반영돼 감탄을 자아낼 만큼 아름답다. 그런데 이 알 수 없는 과거 시대의 유럽 풍경은 바로 미야자키 하야오를 비롯한 일본인들이 바라보는 서양, 일상의 유토피아에 대한 총체적인 반영이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 <엄마 찾아 삼만리> <루팡 3세> <붉은 돼지>에서 유럽의 도시와 마을, 거리를 그려냈던 미야자키의 내면 풍경이 또다시 화면 위로 드러난 것이다. 스즈키 토시오 프로듀서는 "미야자키와 나를 비롯, 60대 이상의 일본인들에겐 서양에 대한 동경이 있다. 그래서 애니메이션 속에서도 현실의 서양이 아닌 동경하는 서양의 모습을 그리게 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쇄국 정책에서 해방된 후 100년간 급속하게 서구 문명을 흡수해온 일본인들이 이상적으로 여겼던 유럽 문화가 미야자키와 지브리가 만든 애니메이션에 담겨 있다. 이 애니메이션들이 다시 유럽과 아시아에 수출됐고 유럽의 이삼십대 애니메이션 팬들이 이를 자국의 애니메이션으로만 알고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처럼 아이로니컬한 일도 없지 않나 싶다. 평화보다는 전쟁을, 자연보다는 문명을 추구한 탓에 지금은 이상향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서구 문명을 바라보는 거장 미야자키의 안타까운 시선은 화면 곳곳에 입혀져 있다. 그래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하늘은 더 맑고 공기는 투명하고 초원은 더 푸르다. 늘 미야자키 애니메이션의 음악을 도맡아온 히사이시 조가 작곡한 테마 음악은 왈츠풍의 리듬으로 소피와 하울이 겪어야 하는 전쟁의 와중에 스며들어 슬픔과 기쁨을 대변하듯 울린다. 폭탄을 떨어뜨리는 비행선이 불의 전투를 일으키고 그 사이를 매처럼 날아다니며 싸우는 마법사 하울, 그리고 상처 입은 하울을 감싸안는 소피의 사랑은 이상향을 그리워하는 미야자키의 복합적인 세계관 위에 안착한다.

중제 : 새로운 신화에의 도전

지난 11월 8일 도쿄 유락조의 스카라좌극장에서 <하울의 움직이는 성> VIP 시사회가 열렸다. 기무라 타쿠야 등 출연진이 무대 인사를 가졌고, 일본 내 무수한 취재진들이 몰려들었다. 현재 일본 언론들의 찬사를 받고 있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지금까지 일본영화로서는 사상 최다인 전국 450여 개 스크린을 확보하고 있다. 온갖 잡지들이 <하울의 움직이는 성> 관련 기사를 내보내고 있고 TV를 통해 예고편은 숱하게 방영 중이다. 그만큼 개봉을 앞둔 현지의 분위기는 뜨겁다. 이건 마치 일본에서만 2천4백만 명 이상을 동원한 미야자키의 전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후 3년 만에 다시 신화에 도전하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언론과 관객이 전국민적으로 성원하는 분위기다.
그 와중에 기존의 미야자키 애니메이션과 달리 화제가 됐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목소리 캐스팅이 성공적이라는 것은 꽤 좋은 조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미야자키의 광팬인 아내와 아이를 위해 먼저 지브리 쪽에 출연 의사를 밝힌 기무라 타쿠야는 더빙을 하며 "이렇게 긴장해 본 적이 없었다"고 고백했다지만 그의 목소리는 우려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하울의 역할에 썩 잘 어울린다. 일본의 장수 시리즈 드라마 <남자는 괴로워>로 사랑받아온 중년 여배우 바에쇼 치에코가 무뚝뚝한 소녀 소피와 사랑스런 할머니 소피의 목소리를 동시에 연기하고, 황무지 마녀 역은 <모노노케 히메>에서 늑대신 '모로'를 연기했던 일본의 유명한 여장 남자 배우 미와 아키히로가 맡아 독특한 음색을 들려준다. 배우들의 호흡은 안심해도 좋을 수준이지만 문제는 홍보다.
미야자키와 스튜디오 지브리의 성공 신화를 이끈 배후 인물 스즈키 토시오 프로듀서는 6개월간 대대적으로 홍보를 했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때와는 달리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대한 프로모션을 개봉 한 달 전부터 시작했다. 지난 10월 말부터 일본 내 언론에 슬슬 실체를 공개하기 시작했고 스폰서인 니혼 TV와 더불어 전국적인 이벤트도 마련했다. 물론 이 한 달 새에 집중적으로 몰려 있다. 도쿄 시오도매 니혼TV 플라자 1층에서는 11월 3일부터 28까지 열리고 있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 관련 전시회도 이 일환이다. 하울의 성 내부를 2층으로 만들어 놓은 것으로 불의 악마 캘시파가 기거하는 화덕, 거실, 소피가 음식을 하는 부엌과 하울의 목욕탕, 그리고 성이 공간 이동을 할 때 사용하는 문 손잡이까지 세세하게 재현돼 있다. 소피, 하울, 마이클 등의 모습을 한 캐릭터 인형들과의 기념 촬영도 가능하다. 모든 물건들의 재질이 스티로폼류와 가죽, 천으로 되어 아이들이 아무리 만져도 부숴지지 않고 다치지 않도록 고안돼 있는 이 전시장에는 개장 5일 만에 이미 3만4천 명이 다녀갔다. 과연 파죽지세의 홍보 열기 속에 개봉될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일본 관객은 물론 전세계 애니메이션 팬들의 마음을 얼마나 매료시킬 수 있을지 궁금하기 그지없다. 올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기술공헌상을 수상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12월 말 국내에도 개봉 예정이다. 이번엔 거의 시차 없이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을 접할 수 있는 셈이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지금까지 미야자키 애니메이션에서 볼 수 없었던 캐릭터와 설정, 그리고 스튜디오 지브리와 미야자키 애니메이션이라는 브랜드가 지닌 기존의 성향이 적절히 혼합돼 있는 작품이다. 자연친화주의와 판타지, 기계에 대한 반성과 희망은 지난 30년간 꾸준히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온 미야자키의 마음속에서 자라났고, 또다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진작부터 사는 게 지루했던 18세 소녀 소피는 90세 할머니가 되어서 자기 인생의 전환기를 맞고, 삶의 의미를 되찾는다. 방법은 다르지만 가는 길은 같다. 스즈키 프로듀서는 "어린아이들이 좋아할 작품"이라고 말하지만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사실상 조금 큰 아이들의 꿈을 자극할 로맨틱한 판타지다. 올해 63세인 "흰머리 소년" 미야자키는 여전히 넘치는 에너지로 가득하다. 참, 보너스로 미야자키 애니메이션 최초의 키스 신도 등장하니 끝까지 눈을 떼지 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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