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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RUDA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네루다(Pablo Neruda)

본명은 Neftali Ricardo Reyes Basoalto. 1904. 7. 12 칠레 파랄~1973. 9. 23 산티아고. 칠레의 시인·외교관·마르크스주의자.

1971년 노벨 문학상, 1953년 레닌 평화상을 받았다. 그는 철도노동자인 아버지 호세 델 카르멘 레예스와 어머니 로사 바소알토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그가 태어난 지 한 달도 되기 전에 죽었으며, 2년 뒤 가족은 남부의 '새로운 땅'으로 이주해 테무코에 자리잡았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재혼했으며, 네루다는 계모를 친어머니처럼 사랑하였다. 뒤에 그는 그 당시를 회고하여 "조국의 개척지인 '머나먼 서부'에서 나는 삶과 대지, 시, 비 속에서 태어났다"고 썼다.

그는 1910년 테무코 남자국민학교에 들어가 1920년 중등과정을 마쳤다. 10세에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 일부는 나중에 학생잡지에 실렸으며 처음에는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지 않으려고 가명을 썼다. 1920년부터 파블로 네루다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으며, 1946년에는 법적으로 이름을 바꿨다. 12세 때 칠레의 저명한 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을 만나 위대한 고전작가들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이들은 그가 진로를 선택하고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전투적 무정부주의자가 되어,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무정부주의적 공산주의'에 대한 탁월한 이론가 장 그라브의 저서를 번역했다.

1921년 테무코를 떠나 수도인 산티아고로 갔다. 현실적인 목표는 사범대학에서 불문학 학위를 받는 것이었지만, 공부보다는 시를 쓰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지방 출신의 이 낭만적인 학생은 어깨에 시인의 망토(아버지가 쓰던 철도노동자 망토)를 두르고 챙 넓은 솜브레로 모자를 쓴 차림으로 칠레 수도의 문학계를 뒤흔들어놓았다. 그해 10월 〈제가(祭歌) La cancion de la fiesta〉라는 시로 칠레 학생연맹이 주최한 백일장에서 1등상을 탔으며, 이 연맹이 펴내는 잡지 〈클라리다드 Claridad〉에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23년 갖고 있던 가구와 아버지에게 받은 시계를 팔아 마련한 돈으로 처녀시집 〈황혼의 노래 Crepusculario〉를 출판했다. 이듬해에는 책을 내주겠다는 출판업자를 만나 〈 스무 편의 사랑시와 한 편의 절망노래 Veinte poemas de amor y una cancion deseperada〉(1924)를 냈는데, 이것은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널리 읽혔다. 이 책은 나오자마자 성공을 거두었고, 그뒤로도 꾸준히 인기를 얻었다. 네루다는 그토록 고통스럽게 쓴 이 시들이 새 시대의 연인들에게 위안을 주었다는 사실에 놀라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기적에 의해서, 이 고통스럽게 씌어진 책은 수많은 사람들을 행복에 이르는 길로 안내했다"고 말했다.

이미 20세에 2권의 시집을 출간하였던 네루다는 칠레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이 되었다. 불문학 공부를 그만두고 시에만 몰두해 〈조물주의 시도 Tentativa del hombre infinito〉, 토마스 라고와 함께 쓴 〈반지 Anillos〉ㆍ〈고무줄새총에 미친 사람 El hondero entusiasta〉을 발표했다.

네루다는 1927년 버마 랑군 주재 명예영사로 임명받아 그뒤 5년 동안 아시아에서 외교관 생활을 했다. 랑군에서 콜롬보·실론·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자바·싱가포르로 옮겨다녔으며, 자바에서 네덜란드 출신의 마리아 하게나르와 첫 결혼을 했다. 캘커타에서 열린 '범힌두인 회의'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러한 여행들을 회고하는 책들은 감동적이지만 때로는 가슴아픈 일화들로 가득 차 있다. 당시 그의 생활은 외로웠으며, 버마 처녀 조시 블리스와의 연애가 유일한 위안이었다. 〈대지에 살다 Residencia en la tierra〉를 쓴 것은 남아시아에서 지낸 이 무렵이었다. 1933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재 칠레 영사로 발령받았으며, 그곳에서 당시 그 도시를 방문중이던 스페인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와 친구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바르셀로나로, 그뒤에는 마드리드로 전출되어 그곳에서 델리아 델 카릴과 재혼했다.

칠레의 문단에 충격을 주었던 것처럼, 유럽 문학계에도 그의 시는 신선한 충격을 던지며 빠른 속도로 알려졌다. 스페인 시인들은 스페인의 대표적 지성인들이 서명한 〈파블로 네루다에게 바침 Homenaje a Pablo Neruda〉을 출간하여 그를 반갑게 맞아들였다. 시인으로서 발전을 거듭하던 이 시기는 1936년 스페인 내전이 터짐으로써 중단되었다. 친구 가르시아 로르카의 처형과 미겔 에르난데스의 투옥을 비롯한 '거리의 유혈사태'는 이 칠레 시인의 정치적 태도를 성숙시켰다. 뒷날 "세계는 변했고 나의 시도 변했다. 시구 위에 떨어지는 피 한 방울은 그 속에서 숨쉬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내 가슴 속의 스페인 Espana en el corazon〉은 내전중 공화군 전선에서 출판되었다.

그는 1938년 스페인 망명객들을 이끌고 칠레로 돌아왔으나 칠레 정부는 곧 그를 멕시코로 보냈다. 이곳에서 왕성한 창작기에 접어들었으며, 이때 쓴 시의 대부분은 유럽에서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과 특히 독일군의 맹공격에 맞서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하려는 영웅적 활약상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이당시 멕시코의 벽화도 그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1943년 태평양 연안의 모든 나라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배를 타고 칠레로 돌아왔다. 1945년 상원의원으로 뽑혔고 3년 동안 조국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문학에 바쳤던 것만큼이나 많은 열정을 바쳤다. 그러나 칠레에 우익정부가 들어서면서 정치활동은 끝나게 되었다. 공산주의자인 네루다는 다른 좌익 인사들과 함께 몸을 숨겨야만 했다. 숨어 살던 이 시기는 작품을 쓰기에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 시기에 아메리카 대륙에서 쓴 가장 위대한 서사시 가운데 하나인 〈모든 이를 위한 노래 Canto general〉가 탄생했다. 그는 1948년 2월 칠레를 떠나 말을 타고 안데스 산맥 남부를 가로질러 4월에 파리에서 열린 평화지지자회의에 참가했다. 또 1949년에는 알렉산드르 푸슈킨 탄생 150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했다. 그뒤 유럽의 다른 지역을 돌아보고 다시 멕시코를 방문했다. 1952년 좌익작가와 정치인에 대한 검거령이 철회되자 칠레로 돌아왔으며 칠레 출신의 마틸데 우루티아와 3번째로 결혼했다.

그는 계속 태평양 연안의 이슬라네그라에서 살았지만, 1960년 쿠바, 1966년 미국 방문을 비롯해 끊임없이 이곳저곳을 여행했다. 그의 시는 거의 모든 언어로 번역되었다. 산티아고의 산크리스토발 언덕 기슭에 '라차스코나'라는 이름의 집을 짓고, 발파라이소에도 '라세바스티아나'라는 집을 지었다. 이 집들은 그가 여행하면서 모은 배의 선수상(船首像)과 그밖의 갖가지 기념물을 진열한 심미적 분위기로 이름난 명소가 되었다.

본질적으로 네루다의 시는 인간이면 누구나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끊임없는 변화를 대변한다. 젊은 시절에는 서정적이고 관능적인 작품인 〈황혼의 노래〉와 〈스무 편의 사랑시와 한 편의 절망노래〉를 썼으며 뒤이어 좀더 영적인 작품 〈조물주의 시도〉·〈고무줄새총에 미친 사람〉을 쓰게 되었다. 외부세계와 이러한 세계가 주는 창조적 자극에서 내적 자아의 영역으로 침잠하게 되면서 독보적이고 신비로운 작품 〈대지에 살다〉가 탄생되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전통적인 시형식에서 벗어나 '네루디스모'(nerudismo)라는 매우 개성적인 시적 기법을 창조해냈다. 그가 스페인 내전 기간에 쓴 시들은 더 사실성이 강하고 외부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더 많이 깨닫게 되었음을 나타내준다. 이러한 현실지향적이며 고발조의 시에 이어 장엄한 서사시 〈모든 이를 위한 노래〉가 나왔다. 그러나 이 웅장한 문체는 곧 사라지고 좀더 단순한 주제를 다룬 사회비평시가 등장하게 된다.

그의 주제와 기교의 다양함은 나이를 먹어도 여전했다. 〈100편의 사랑 노래 Cien sonetos de amor〉에서는 사랑이, 〈Estravagario〉에서는 해학이 다시 주제로 다루어졌으며, 〈이슬라 네그라의 회고록 Memorial de Isla Negra〉은 향수 어린 자서전이다. 네루다는 "나는 장대한 연작시를 계속해서 써나갈 계획이다. 왜냐하면 이 시는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의 말로써만 끝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했으며, 실제로 그 마지막 순간은 1973년 9월에 왔다.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네루다의 시세계

 네루다는 초기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1924)에서 관능적 표현의 서정시를 주로 써서 당시 전통적이던 완곡한 애정 표현에 도전했다. 다음 단계에는 시집 '지상에서 살기'(1935)까지를 통해 초현실주의 기법의 시들을 썼으며, 스페인 내전(1936)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현실 참여의 시들을 썼다. 그는 문학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예술과 문학은 단순히 존재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필수 불가결한 그 무엇이 되어야만 한다. 시는 개인적 삶의 솔직한 기록에 그쳐서는 안 된다. 그것은 모든 인류를 향한 발언이어야 한다. 시의 목적은 고백이 아니라 설득에 있는 것이다."(출처 : 김윤식·김종철 저 문학교과서)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네루다의 다른 시

오늘밤 나는 쓸 수 있다 

오늘밤 나는 쓸 수 있다 제일 슬픈 구절을.

예컨대 이렇게 쓴다. "밤은 산산이 부서지고

푸른 별들은 멀리서 떨고 있다"

밤바람은 공중에서 선회하며 노래한다.

오늘밤 나는 제일 슬픈 구절을 쓸 수 있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고, 때때로 그녀도 나를 사랑했다.

이런 밤이면 나는 그녀를 품에 안고 있었다.

끝없는 하늘 아래서 나는 연거푸 그녀와 키스했다.

그녀는 나를 사랑했고, 때때로 나도 그녀를 사랑했다.

누가 그녀의 그 크고 조용한 눈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늘밤 나는 제일 슬픈 구절을 쓸 수 있다.

나한테 이제 그녀가 없다는 생각을 하며. 그녀를 잃어버렸다는

느낌에 잠겨.

 

광대한 밤을 듣거니, 그녀 없어 더욱 광막하구나.

그리고 詩가 영혼에 떨어진다 목장에 내리는 이슬처럼.

내 사랑이 그녀를 붙들어놓지 못한 게 뭐 어떠랴.

밤은 산산이 부서지고 그녀는 내 옆에 없다.

그게 전부다. 멀리서 누가 노래하고 있다. 멀리서.

내 영혼은 그녀를 잃은 게 못마땅하다.

내 눈길은 마치 그녀한테 가려는 듯이 그녀를 찾는다.

내 가슴은 그녀를 찾고, 그녀는 내 곁에 없다.

같은 밤이 같은 나무를 희게 물들인다.

그때를 지나온 우리는 이제 똑같지가 않다.

나는 이제 그녀를 사랑하지 않고, 그건 그렇지만, 허나 나는 얼마

나 그녀를 사랑했던가.

내 목소리는 그녀의 귀에 가서 닿을 바람을 찾기도 했다.

다른 사람 거. 그녀는 다른 사람 것이 되겠지. 지난날의 키스처럼.

 

그 목소리. 그 빛나는 몸. 그 무한한 두 눈.

나는 이제 그녀를 사랑하지 않고, 그건 그렇지만, 허나 나는 그녀를

사랑하는지도 몰라.

사랑은 그다지도 짧고, 잊음은 그렇게도 길다.

이런 밤이면 나는 그녀를 품에 안았으므로

내 영혼은 그녀를 잃어버린 게 못마땅하다.

비록 이게 그녀가 나한테 주는 마지막 고통일지라도

그리고 그게 그녀를 위해 쓰는 내 마지막 시일지라도.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여자, 대지, 민중에의 사랑  ( 김경범/ 세종대 겸임교수/서문학 )

 중남미 시인들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네루다에게는 사랑의 시인, 민중의 시인, 그리고 가끔씩은 자연의 시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니고 비평가들은 그의 시세계를 둘이나 셋으로 혹은 다섯으로 나누며 불연속적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훌륭한 시들이 그렇듯이 그의 시는 무엇보다도 언어의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언어의 대지 위에 아주 다양한 무늬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의 첫 작품은 아니지만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준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1924)의 첫 번 째 사랑의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여자의 육체, 하얀 구릉, 눈부신 허벅지,/ 몸을 내맡기는 그대의 자태는 세상을 닮았구나./ 내 우악스런 농부의 몸뚱이가 그대를 파헤쳐/ 땅 속 깊은 곳에서 아이 하나 튀어나오게 한다…”여자의 육체 - 대지라는 다소 전통적인 도식이 보이지만 3천5백쪽에 달하는 그의 시 전집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여자는 관념적이 아니라 감각적이고 시인은 ‘봄이 벗나무와 하는 행위’에 목말라한다. 그러나 짧은 사랑은 절망과 고통스런 망각이 되고 시인은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 왔다’고 선언하며 절망의 노래를 끝맺는다. 그러나 이 시집이 실연의 상처를 노래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고통은 수동적이면서 능동적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대지로 이어지고 대지는 시라는 생명을 잉태한다. ‘잘록한 허리를 가진 아름다운 여인’이 된 아메리카 대륙 그리고 ‘바짝 마른’ 그의 조국의 바다, 바람, 비, 나무는 생명과 죽음 사이를 배회하며 빛나는 언어로 재생산된다.

 이때 가끔씩 삶에 대한 염증을 내비치기도 한다. 다음은 『지상의 거처』에 수록된 「산책」의 한 부분이다.

“산다는 게 지긋지긋할 때가 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무감각하게, 양복점이나 영화관에 들어갈 때가 있다./ 이발소의 냄새는 나를 소리쳐 울게 한다. 난 오직 돌이나 양털의 휴식을 원할 뿐/ 다만 건물도 정원도, 상품도, 안경도, 승강기도 눈에 띄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발에, 내 손톱이, 내 머리칼이, 내 그림자가 꼴보기 싫을 때가 있다./ 산다는 게 지긋지긋할 때가 있다…”

그러나 대지의 생명력은 스페인 내란(1936-39년)이라는 계기를 통해 인간에 대한 애정을 회복시킨다. 내란 중에 반파시스트 진영에서 열정적으로 활동을 하던 그는 내란이 끝나자 아메리카 대륙의 민중에게로 눈을 돌린다. 그 시적 승화가 『총가요집』 이며 특히 『마추피추의 산정』 연작시들은 대지 위에서 억압받는 민중을 위해 절규하고 있다.

“나와 함께 올라 다시 태어나라 형제여./ 네 고통이 뿌려진 그 깊은 곳에서 내게 손을 다오./ 이 생명의 잔에 땅에 묻힌 그대들의 오랜 고통을 가져오라./ 그리고 밑바닥부터 얘기해 다오, 이 긴긴 밤이 다하도록/ 내가 닻을 내리고 그대들과 함께 있으니 내게 모두 말해다오, 한땀 한땀,/ 한구절 한구절, 차근차근. 품고 있던 칼을 갈아 내 가슴에 내 손에 쥐어다오./ 나의 핏줄과 나의 입으로 달려오라./ 나의 말과 피로 말하라.”

민중에 대한 희망, 열정, 사랑은 계속 된다. 다만 거대한 자연을 통해서가 아니라 일상의 사물을 통해 여과될 뿐이다. 즉 그는 몸을 낮추고 민중의 언어와 삶 속으로 들어간다. 고양된 감정은 양말, 수박, 소금, 질산염, 밤, 책, 새, 나뭇잎, 양파, 과일, 엉겅퀴 속으로 투영되어 차분해지지만 의식은 여전히 투철해진다. 그리고 삶을 돌아보면서 죽음의 징조와 함께 사랑도 다시 시 속에 나타난다.

빠블로 네루다는 1904년에 태어나 1973년에 죽은 칠레의 시인이다. 노벨상(1971년)을 받은 적도 있고 민중의 대변자로 상원의원이 되었다가 나중에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적도 있다. 칠레 민주화를 위한 자신의 무기는 오직 시라고 말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그는 술꾼에게 모욕당한 인어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을 향해, 죽음을 향해 헤엄쳐’가지 않았다. 그는 ‘시’ 와 함께 ‘사람’도 같이 남아 있어야 할 시인이다. 그의 시는 그의 몸 구석구석에서 솟아났기 때문이다.(출처 : http://210.217.248.140/woodway/poem/neruda/neruda-poem.htm)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규보의 '시벽(詩癖)'

나이 이미 칠십을 넘었고
지위 또한 정승에 올랐네.

이제는 시 짓는 일 벗을 만하건만

어찌해서 그만두지 못하는가.

아침에 귀뚜라미처럼 읊조리고

저녁엔 올빼미인양 노래하네.

어찌할 수 없는 시마(詩魔)란 놈

아침저녁으로 몰래 따라다니며

한번 붙으면 잠시도 놓아 주지 않아

나를 이 지경에 이르게 했네.

날이면 날마다 심간(心肝)을 깎아 내

몇 편의 시를 쥐어짜내니

기름기와 진액은 다 빠지고

살도 또한 남아 있지 않다오.

뼈만 남아 괴롭게 읊조리니

이 모양 참으로 우습건만

깜짝 놀랄 만한 시를 지어서

천 년 뒤에 남길 것도 없다네.

손바닥 부비며 혼자 크게 웃다가

웃음 그치고는 다시 읊조려 본다.

살고 죽는 것이 여기에 달려으니

이 병은 의원도 고치기 어려워라.

 

- 시벽(詩癖 : 시를 짓지 않고는 못 배기는 병)

작자는 이규보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빠블로 네루다 연보 - 시, 사랑, 혁명

(정리 : 권  미  선)

1904년 7월 12일 칠레의 빠랄(Parral)에서 출생. 아버지는 철도 노동자. 성명은 호세 델 까르멘 레예스 모랄레스(Jos  del Carmen Reyes Morales). 어머니 성명은 로사 네프딸리 바소알또(Rosa Neftal  Basoalto). 네루다의 본명은 네프딸리 리까르도 레예스 바소알또(Neftal  Ricardo Reyes Basoalto). 8월 어머니 사망.

 1906년 아버지는 떼무꼬(Temuco. 칠레 남부의 작은 도시)로 이사. 재혼. 몇 년 후 네루다를 데려감. 네루다는 1921년까지 떼무꼬에서 생활.

 1910년 떼무꼬 남학교(Liceo de Hombres) 입학. 1920년 중등과정 수료. 조숙한 네루다는 10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함.

 1917년 7월 일간지 《아침》(La Ma ana)에 「열중과 끈기」(Entusiasmo y perseverancia) 를 발표함으로써 시인으로 첫 발을 내디딤.

 1918년 떼무꼬의 잡지에도 시를 발표.

 1919년 잡지 《질주와 비상》(Corre-Vuela)에 시 13편을 발표. 아버지는 시인이 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므로 여러 가지 가명을 사용함. 마울레(Maule) 백일장에서 3등으로 입상.

 1920년 당시 떼무꼬 여학교 교장으로 근무하던 가브리엘라 미스뜨랄(Gabriela Mistral. 중남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여류 시인)을 알게 됨. 가브리엘라는 외롭고 수줍음 많은 청년 네루다에게 시인의 길을 가도록 북돋아 주었음. 당시 가브리엘라는 31살이고 네루다는 16살이었으나 두 사람은 시에 대한 열정으로 지속적인 우정을 나눔. 10월 빠블로 네루다(Pablo Neruda)라는 필명을 사용하기로 결정함. 19세기 체코 시인 얀 네루다(Jan Neruda)의 시를 읽고 감명을 받아 이런 필명을 만들었다는 설도 있음. 떼무꼬 백일장에서 1등으로 입상.

 1921년 불어 선생님이 되려고 수도 산티아고로 유학. 사법학교에 입학. 외롭고 배고픈 학생시절을 겪으면서 보헤미안적인 삶을 영위. 10월 시 「축제의 노래」(La canci n de la fiesta)로 칠레 학생연맹 콩쿠르에서 1등상 수상.

 1922년 문학단체 브레미야(Vremia)에서 처음으로 자작시를 낭송. 우루과이 몬떼비데오에서 발간되는 잡지 《시대》(Los Tiempos)에 시가 게재됨.

 1923년 8월 첫 시집 『황혼』(Crepusculario) 출판. 사츠카(Sachka)라는 필명으로 학생연맹 기관지 《끌라리닷》(Claridad)에 문학평론 등을 기고.

 1924년 6월 자신의 연애 경험을 살려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Veinte poemas de amor y una canci n desesperada)출판. 섬세한 감성, 독창적인 이미지와 은유가 돋보이는 이 시집으로 네루다는 문명(文名)과 대중의 사랑을 한꺼번에 얻음. 지금도 가장 널리 읽히는 시집. 사범학교를 중퇴하고 시 창작에 전념. 시집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생계가 어려워 아나톨 프랑스 시선집을 번역하는 등 여기저기에 글을 기고. 산티아고 일간지에 『스무 편의 사랑의 시...』 창작과정을 기술한 글을 발표. 네루다는 1974년 사후 출판된 『회고록』(Confieso que he vivido)에서 "청년 시절의 불타는 정열을 담고 있으며 [...] 흥건한 애상마져도 삶의 기쁨 속에 녹아있으므로 애착이 가는 시집이다"고 함.

 1925년 문학지 《까바요 데 바스또스》(Caballo de Bastos)를 주관. 시집 『무한한 인간의 시도』(Tentativa del hombre infinito) 발표. 이 시집의 인쇄일은 1925년이고 출판일은 1926년.

 1926년 또마스 라고(Tom s Lago)와 공저한 산문집 『반지』(Anillos) 출판. 단편소설 형식의 문집, 『삶과 희망』(El habitante y su esperanza) 출판.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를 불어판에서 중역.

 1927년 여전히 수입은 적고 생계는 어려움. 6월 14일 미얀마 양군 주재 명예 영사로 임명. 부에노스아이레스, 리스본, 마드리드, 파리, 마르세이유를 경유하여 랑군에 도착. 월급이 없는 명예직이었으므로 가난과 외로움에 시달림. 조시에 블리스(Josie Bliss)를 만나 동거함.

 1928년 스리랑카 콜롬보 주재 영사. 조시에가 찾아왔으나 영원히 헤어짐. 이 시기 네루다는 빈곤, 식민잔재, 정치적 탄압으로 질곡받는 동남아 민중들의 고난한 삶이 라틴아메리카 민중의 삶과 같아서 동질감을 느낌. 네루다의 유명한 여성 편력이 고독과 가난의 산물이라면 반독재, 반제국주의 등 좌파적 성향은 이러한 현실 세계의 체험에서 유래함.

 1929년 인도 캘커타에서 개최된 범힌두교 회의에 참석. 네루와 면담.    

 1930년 자카르타(당시 네델란드령 서인도제도의 수도)주재 영사. 이곳에서 마리아 안또니에따(Mar a Antonieta Hagenaar Vogelzanz)와 사랑에 빠져 12월 결혼. 이 여자는 네델란드 출신으로 스페인어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음.

 1931년 싱가포르 주재 영사.

 1932년 두 달간의 여행 끝에 귀국.

 1933년 그동안 발표했던 시를 모아 1월에는 『열심히 돌을 던지는 사람』(El hondero entusiasta)을 출판하고 4월에는 또 하나의 명시집 『지상의 거처 (1925-1931)』(Residencia en la tierra)를 발간. 초현실주의의 영향은 받은 이 시집은 전통적인 리듬과 시형식을 거부하고 문장 구조마져 파괴한 실험적인 작품. 네루다는 이러한 형식을 통해 무질서, 부패, 소외, 불안을 표현하려고 함. 8월 부에노스아이레스 영사로 부임. 그 때 남아메리카를 여행하던 스페인 시인이자 극작가 페데리꼬 가르시아 로르까(Federico Garc a Lorca)와 친분을 맺음. 이후 가르시아 로르까는 네루다의 시를 소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함.

 1934년 5월 스페인 바르셀로나 영사로 임명. 10월 마드리드에서 딸 말바 마리나(Malva Marina) 출생. 12월 6일 가르시아 로르까의 주선으로 마드리드 대학에서 시 낭송회개최.

 1935년 2월 마드리드 주재 영사로 부임. 라파엘 알베르띠(Rafael Alberti), 미겔 에르난데스(Miguel Hern ndez) 같은 스페인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공산당에 가입. 4월 『스페인 시인들이 빠블로 네루다에게 바치는 시집』이 출판됨. 네루다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스페인 바로크 시인 께베도(Quvedo)의 시집 『죽음의 소네트』(Sonetos de la muerte)와 비야메디아나(Villamediana) 백작의 시집이 호화 양장판으로 출판됨. 9월 『지상의 거처』(1925-1935)를 두 권으로 발간.

 1936년 7월 18일 스페인 내전 발발. 네루다는 공개적으로 공화파를 지지함. 수많은 시인, 작가, 문인들 또한 공화파를 위해 투쟁. 8월 프랑코(Franco) 장군 지지파는 그라나다에서 가르시아 로르까를 암살함. 폭격으로 마드리드 영사관 폐쇄. 네루다는 파리로 건너가서 낸시 큐나드(Nancy Cunard)와 함께 잡지 《세계의 시인들은 스페인 민중을 지지한다》(Los poetas del mundo defienden al pueblo espa ol) 발간. 마리아 안또니에따와 결별. 아르헨티나 출신의 델리아 델 까릴(Delia del Carril)을 만나 결혼.

 1937년 4월 세사르 바예호(C sar Vallejo)와 함께 〈대스페인 원조 중남미 단체〉(Grupo Hispanoamericano a Ayuda a Espa a) 설립. 10월 칠레로 귀국하여 〈문화 창달을 위한 칠레 지식인동맹〉창설. 11월 시집 『가슴 속의 스페인』(Espa a en el coraz n) 발표.

 1938년 〈스페인 공화국 지지 작가회의〉가 스페인 현지에서 개최됨. 아버지와 양어머니 별세. 8월 잡지 《칠레의 여명》(Aurora de Chile) 주간. 10월 칠레 인민전선(Frente Popular) 후보 뻬드로 아기레 세르다(Pedro Aguirre Cerda)가 대통령에 피선되자 모임을 개최하고 행사시를 낭송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지원. 바르셀로나 전선에서 마누에르 알똘라기레(Manuer Altolaguirre)가 『가슴 속의 스페인』을 발간. 공화파 군인들은 이 시집을 읽고 가슴이 에이고 목이 메었다고 함.

 1939년 파리에 본부를 둔 스페인 망명단체 특별 영사로 임명. 연말에는 스페인 망명자들과 함께 위니펙(Winnipeg) 호에 승선, 칠레를 향해 출발.

 1940년 1월 2일 칠레 도착. 스페인 비평가  아마도 알론소(Amado Alonso)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빠블로 네루다의 시와 문체』(Poes a y estilo de Pablo Neruda) 출판. 이 에세이는 빠블로 네루다 연구의 고전. 8월 16일 멕시코 시티 주재 총영사로 부임. 환영 리셉션장에서 옥따비오 빠스(Octavio Paz)의 하얀 와이셔츠 깃을 붙들고 토를 달았던 일화는 유명함. 네루다는 이즈음 다음 세대를 이끌 시인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고 "중남미 대륙에 촉망받는 시인이 한 사람 있는데 안타깝게도 옥따비오 빠스"라고 대답. 빠스의 재능을 인정하고 높이 평가하지만 자신과 정치적 견해가 다른 게 유감이라는 뜻이다.

 1941년 멕시코 국립대학(UNAM)에서 『시몬 볼리바르에게 바치는 헌시』(Un canto para Bol bar) 출판. 이 작품은 훗날 『지상의 거처 3권』에 수록됨. 과테말라를 여행하면서 미겔 앙헬 아스뚜리아스를 사귐. 10월 멕시코 시티 근처의 꾸에르나바까에서 나치 추종자들에게 피습.

 1942년 4월 쿠바 여행. 시 「스탈린그라드 찬가」(Canto de amor a Stalingrado)를 포스터로 제작하여 멕시코 전역에 부착. 네델란드에 살던 딸 말바 마리나 사망.

 1943년 『칠레 총가요집』(Canto general de Chile)을 비매품으로 출판. 콜롬비아, 페루, 칠레에서 시선집이 출판. 2월 미국 뉴욕에서 개최된 집단 시 낭송회 아메리카의 목소리(La voz de las Am ricas)에 참석. 멕시코, 파나마, 콜롬비아, 페루를 거쳐 칠레로 귀국. 가는 곳마다 정부와 독자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음. 페루의 꾸스꼬에 들러 마추피추(Macchu-Picchu) 유적을 둘러보고 깊이 감동함.

 1944년 산티아고 시문학상 수상. 뉴욕에서 비매품으로 시선집 발간.

 1945년 타라삐까(Tarapac ) 지역구 공화당 상원에 당선. 칠레 국가문학상 수상. 7월 8일 공산당 가입. 사웅파울루, 부에노스아이레스, 몬테비데오에서 시 낭송회와 강연회 개최. 9월 『마추피추 산정』(Alturas de Macchu-Picchu) 집필. 나중에 『총가요집』에 수록됨. 가브리엘라 미스뜨랄 노벨문학상 수상.

 1946년 1월 18일 멕시코 정부는 훈장(Orden Aguila Azteca)을 수여함. 칠레 대통령 선거전에서 가브리엘 곤살레스 비델라(Gabriel Gonz lez Videla) 후보진영의 홍보책임자로 임명됨. 체코슬로바키아, 네델란드, 미국, 브라질에서 시집이 번역, 출판됨. 12월 28일 법원은 빠블로 네루다로 개명을 선고함.   

 1947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로사다 출판사에서 『지상의 거처 3권』(Tercera residencia) 출판(이후 로사다 출판사는 네루다 시집을 도맡아 발간). 이 시집은 『분노와 아픔』Las furias y las penas, 『가슴 속의 스페인』를 비롯하여 여러 작품을 수록. 네루다의 정치적 성향이 잘 드러난 시집. 10월 4일부터 검열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발간되는 일간지 《엘나시오날》(El Nacional) 에 '만인에게 보내는 호소문'(Carta  ntima para millones de hombres)을 게재. 이 글에서 네루다는 좌파와 협약을 준수하지 않는 비델라 대통령을 비난함으로써 정치적 시련을 겪게됨.

 1948년 1월 6일 상원 연설. 이 연설문을 『나는 고발한다』(Yo acuso)라는 제목으로 출판. 2월 3일 대법원은 상원의원직 박탈. 2월 5일 체포영장 발급. 국내에 은신하면서 『총가요집』을 저술하고 대정부투쟁을 함. 런던에서 발행되는 잡지 《아담》(Adam)은 네루다 특집호를 발행.

 1949년 2월 24일 한밤중에 말을 타고 안데스 산맥을 넘어 아르헨티나로 탈출. 배낭 속에는 『총가요집』 원고가 들어 있었음. 4월 25일 파리에서 개최된 제1차 세계 평화 당원 대회에 참석. 6월 소비에트 연방을 방문하여 푸쉬킨 탄생 150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 7월 폴란드와 헝가리 방문. 8월 폴 엘뤼아르와 함께 멕시코를 방문했다가 병석에 누워 1연말까지 체류. 마띨데 우루띠아(Matilde Urrutia)와 재회. 독일, 중국, 체코, 덴마크, 미국, 소련, 쿠바, 과테말라, 멕시코, 콜롬비아, 아르헨티나에서 시집 출판.

 1950년 멕시코에서 『총가요집』(Canto general) 출판. 라틴아메리카의 자연과 역사, 스페인 식민지배로부터 해방과 자유와 사회정의를 위한 민중의 투쟁을 그린 대 서사시로 네루다의 대표작. 멕시코 벽화가 다비드 시께이로스와 디에고 리베라가 삽화를 그림. 칠레에서도 지하 출판됨. 과테말라를 방문, 정부와 의회의 지원 아래 시낭송회와 강연회를 개최. 이어 프라하와 파리 방문. 10월 파리에서 프랑스 판 『총가요집』 출판을 승인. 로마를 거쳐 뉴델리를 방문하여 네루를 만남. 힌두어와 뱅갈어 등으로 시집 출판. 11월 마띨데 울띠이와 함께 바르사바에서 개최된 제2차 세계 평화 동지대회에 참석. 11월 22일 「깨어나라 나뭇꾼아」(Que despierte el le ador)로 국제평화상 수상. 이 때 피카소도 이 상을 수상했음. 멕시코에서 『총가요집』 보급판 출판. 미국, 소련, 중국, 시리아, 팔레스타인, 폴란드, 체코, 루마니아, 인도, 스웨덴에서 시집 출판.

 1951년 이탈리아 전역을 순회하면서 로마, 밀라노, 제노바 등지에서 낭송회와 강연회 개최. 살바토레 콰지모도(Salvattore Quasimodo) 등을 주축으로 네루다 시세계에 대한 좌담회가 열림. 5월 모스크바 방문.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몽골을 거쳐 북경에 도착. 불가리아, 헝가리, 아일랜드, 베트남. 터키, 일본, 한국에서 시집 출판. 이디쉬어, 히브리어, 아랍어, 우즈베크어, 우크라이나어, 아르메니아어 등으로도 출판.

 1952년 이탈리아에 거주. 『포도와 바람』(Las uvas y el viento) 집필 시작. 『대장의 노래』(Los versos del Capit n)를 익명, 비매품으로 출판. 이 시집은 마띨데 우르띠아에게 바침. 8월 체포영장이 취소됨. 8월 13일 귀국. 국민들은 대대적인 환영행사로 대시인을 맞이함. 부와 명예를 얻은 네루다는 태평양 연안에 위치한 이슬라 네그라(Isla negra. 영화 〈일포스티노〉의 원작 소설 『빠블로 네루다와 우편배달부』의 무대)에 별장을 건축. 12월 국제평화상 심사위원 자격으로 모스크바 방문.

 1953년 소련에서 귀국한 후 4월에는 산티아고에서 라틴아메리카 대륙 문화회의(Congreso Continental de la Cultura)를 개최. 디에고 리베라, 니콜라스 기옌, 조르쥬 아마두 등 쟁쟁한 인사들이 참석함. 산티아고에서 시선집 『모든 사랑』(Todo el amor)와 『정치시』(Poes a Pol tica) 출판.

 1954년 1월 칠레 대학교에서 5회에 걸친 강연회 개최. 7월 『일상적인 송가』(Odas elementales)와 『포도와 바람』 출판. 7월 12일 탄생 50주년 기념행사가 대규모로 열리고 전세계의 문인들과 예술가들이 참여하여 축하함. 칠레대학교에 장서를 기증. 칠레대학교는 네루다 재단을 후원하기로 약속함. 페르낭 레게의 삽화가 든 프랑스판 『총가요집』 출판.

 1955년 델리아 델 까릴(Delia del Carril)과 이혼. 마띨데 우르띠아를 데리고 산띠아고에 새로 성주한 집(저택명 La Chascona)으로 이사. 년 3회 발행되는《칠레 소식》지 창간. 강연문등을 수록한 산문집 『여행』(Viajes) 출판. 소련, 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 여행. 이탈리아, 프랑스, 브라질, 우루과이를 거쳐 아르헨티나 꼬르도바 지방에서 잠시 체류.

 1956년 1월 『신 일상적인 송가』(Nuevas odas elementales) 출판. 2월 귀국. 9월 『인쇄술에 바치는 송가』(Oda a la tipograf a) 출판.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위대한 대양』(El gran oc ano) 출판.

 1957년 1월 『전집』 발간. 4월 1일 아르헨티나로 여행. 4월 11일 아르헨티나 당국은 시인을 체포하여 하루 반나절 동안 감금. 칠레 영사의 항의로 석방. 네루다는 시낭송회를 포기하고 아르헨티나를 출국. 랑군 등 동양을 방문. 칠레 작가협회 회장에 피선. 12월 『송가 3집』(Tercer libro de las odas) 출판.

 1958년 칠레 대통령 선거전에 참여. 8월 『에스뜨라바가리오』(Estravagario) 출판. 이 책에서 전 해 동양을 방문했던 인상이 투영됨.

 1959년 5개월에 걸쳐 베네수엘라 여행. 카라카스 주재 쿠바 대사관에서 피델 까스뜨로(Fidel Castro)를 만남. 11월 송가집 『항해 그리고 귀환』(Navegaciones y regresos) 출판. 12월 마띨데에게 바치는 시집 『사랑의 소네트 100편』(Cien sonetos de amor)를 비매품으로 출판.

 1960년 4월 12일 유럽으로 향하는 선상에서 『무훈 찬가』(Canci n de gesta) 탈고. 소련과 동구권을 거쳐 파리에서 한동안 체류. 피카소는 프랑스어판 시집에 동판화를 그려줌. 이탈리아에서 쿠바행 배에 승선. 아바나에서 쿠바 혁명을 축하하는 시집 『무훈 찬가』 1만 2천부 인쇄.

 1961년 2월 귀국. 7월 『칠레의 돌』(Las piedras de Chile) 출판. 10월 『행사시』(Cantos ceremoniales) 출판. 예일대학교 로망스어 연구소 비상근 회원으로 임명됨. 『스무 편의 사랑의 노래...』 백만부 재판. 미국에서 『네루다 시선집』(Selected Poems of Pablo Neruda) 출판.

 1962년 3월 칠레대학교 문과대학 교수로 임명. 니까노르 빠라가 환영 연설을 함. 이 연설은 『네루다와 빠라의 연설문』(Discursos de Pablo Neruda y Nicanor Parra)으로 출판됨. 4월 출국하여 소련, 불가리아, 이탈리아, 프랑스를 여행. 9월 『충만한 힘』(Plenos poderes) 출판. 여행에서 돌아온 네루다는 발빠라이소(Valpara so) 소재의 저택으로 직행.

 1963년 이탈리아에서 『요약』(Sumario) 출판. 이 책은 나중에 『이슬라 네그라의 추억』에 포함됨. 스웨덴 한림원 회원 룬트크비스트(Arthur Lundkvist) 는 「네루다」라는 긴 논문을 발표. 노벨문학상이 가까워졌음을 예고.

 1964년 칠레 국립도서관 주최로 탄생 60주년 기념행사가 열림. 7월 『이슬라 네그라의 추억』(Memorial de Isla Negra) 5권 발간. 9월 세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 번역 출판. 네루다는 칠레 전역을 다니며 대통령 선거전에 열중함.

 1965년 2월 유럽 여행. 6월 옥스포드대학교는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수여. 파리를 거쳐 헝가리로 여행. 헝가리에서 아스뚜리아스(Miguel Angel Asturias)와 공동으로 『헝가리에서 식사하며』(Comiendo en Hungr a) 집필. 유고슬라비아 블레드에서 열린 펜클럽 회의에 참석. 레닌상 심사위원 자격으로 소련방문, 스페인 시인 라파엘 알베르띠(Rafael Alberti) 수상. 12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거쳐 귀국.

 1966년 6월 펜클럽 특별 초청인사 자격으로 미국 방문. 뉴욕, 워싱턴, 버클리에서 시낭송회 개최. 멕시코와 페루에서도 시낭송회 개최. 페루 문인협회의 추천을 받은 페루 정부는 훈장(Sol del Per )을 수여. 10월 외국에서 식을 올린 마띨데 우르띠아와 결혼이 합법화됨.

 1967년 유럽 여행. 이탈리아에서 비아레죠(Viareggio) 국제문학상 수상. 극형식의 칸타타 『호아낀 무리에따의 치열한 생애』(Fulgor y muerte de Joaquin Murieta) 출판. 이 작품은 이 해 산티아고에서 초연됨.

 1968년 『한낮의 손』(Las manos del d a)출판. 2월 우루과이 방문 강연회 개최. 4월 프랑스 정부는 퀴리(Joliot-Curie) 훈장 수여. 미국 문학예술 아카데미 명예회원으로 임명됨.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대학에서 낭송회 개최. 귀국. 잡지 《에르시야》(Ercilla)에 칼럼 기고.

 1969년 부다페스트와 바르셀로나에서 『헝가리에서 식사하며』 동시 출판. 5개국어로 번역됨. 『세상의 끝』(Fin de mundo) 출판. 5월 칠레 어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임명. 킬레 카톨릭대학은 명예박사학위 수여. 칠레 상원은 훈장(은메달) 수여. 7월 3일 칠레 공산당 대통령 예비후보로 지명됨.

 1970년 민중연합 단일 후보로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박사를 추천하고 대통령 후보 사퇴. 유럽 여행. 소르본느 대학에서 강연회 개최. 『불타는 칼』(La espada encendida)과 『해양 지진』(Maremoto) 그리고 『하늘의 돌』(Las piedras del cielo) 출판.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아예데 대통령은 파리 주재 칠레 대사로 임명. 아옌데 정권은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해 집권한 공산 정부.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지성인들은 1960년 쿠바 혁명과 더불어 아옌데 정권의 등장에서 서구의 제국주의적 지배와 간섭으로부터 라틴아메리카가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 적극적으로 지원함. 한편, 남미의 도미노 현상을 우려한 미국은 경제봉쇄 등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아옌데 정권의 붕괴를 시도함.

 1971년 1월 7일 빠스꾸아 섬(Isla de Pascua) 여행. 칠레 텔레비젼방송국은 도큐멘터리로 촬영. 1월 21일 칠레 상원 프랑스 대사직 승인. 3월 파리로 부임. 10월 21일 노벨문학상 수상자 선정, 12월 13일 노벨문학상 수상. 네루다는 수상 연설에서 1949년 안데스 산맥을 넘어 칠레를 탈출할 때 도와주었던 사람들을 추억하고 기림. 그러나 스톡홀름에서 병이 깊어져 침대에 누운채 귀국.

 1972년 소련 방문. 『무익한 지도』(Geograf a infructuosa) 출판. 10월 유네스코 집행위원으로 선임. 암으로 투병하던 네루다는 두 차례에 걸친 수술을 받고 귀국. 국립경기장에서 대규모 환영행사가 열림.

 1973년 네루다는 이슬라 네그라에서 투병생활. 아예데 대통령이 이슬라 네그라를 방문하려고 준비하던 2월 5일 파리 대사직 사임. 2월 『닉슨 암살 선동과 칠레 혁명 만세』(Incitaci n al nixonicidio y alabanza de la revoluci n chilena) 출판. 9월 11일 피노체트 장군은 미국을 등에 업고 군부 쿠데타를 일으킴. 대통령 관저(일명 모네다 궁)에서 저항하던 아옌데 대통령은 치열한 공방전 끝에 피살됨. 이날 산띠아고는 맑은 날이었으나 어느 라디오 방송은 "산띠아고에 비가 내린다"는 멘트로 쿠데타 사실을 간접적으로 타전했다고 함. 네루다, 9월 23일 산따 마리아 병원에서 영면.

 1974년 『회고록』(Confieso que he vivido)이 사후 출판됨. 『노란 심장』(Coraz n amarrillo), 『질문』(Libros de las preguntas), 『비가』(Eglogas), 『간추린 결점』(Defectos escogidas) 출판. 『스무 편의 사랑의 시...』의 모델이 되었던 알베르띠나 로사 아소까르(Abertina Rosa Az car)와 네루다 사이에 오간 편지가 『빠블로 네루다의 연애편지』(Cartas de amor de Pablo Neruda)라는 제목으로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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