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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루다 탄생 100주년

민중과 자연을 향한 위대한 사랑 노래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며  
 
고대신문

 

피노체트의 쿠데타가 발발한 1973년의 칠레. 가택수색의 긴박한 상황이 연출된 가운데 그 집의 주인이었던 한 사람은 병사들에게 조용히 말한다. “이 집에서 당신들에게 위험한 것은 하나밖에 없네.” “그게 뭡니까?" 순간 손을 권총으로 가져가는 장교에게 들려온 대답. “시(詩)라네.”

 

이 유명한 일화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다. 서정의 시인, 사랑의 시인, 민중의 시인, 혁명의 시인. 모두 그를 일컫는 표현이다. 개인적 사랑의 묘사에서부터 혁명의 불꽃을 제시하기까지 네루다 시의 진폭이 큰 것은 그것이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의 고백처럼 시란 영혼을 뒤흔들던 무언가를 그만의 방식대로 표현해낸 전부였다.

 

현실주의자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요, 오직 현실주의적이기만 한 시인도 죽은 시인이라고 했던 네루다. 전자와 후자의 전쟁에서 둘은 번갈아 승리하지만 결코 시 자체는 지지 않는다던 한 시인의 외침은 탄생 100주년을 맞은 지금도 세상을 울리고 있다.
 
시(詩)의 제왕들은 죽어서까지도 고된 삶을 살아가는가 보다. 끝자리 숫자가 아라비아 숫자 5로 끝나는 당해 년도 기념일마다 가혹하리만치 휴식을 방해받아야 하니 말이다. 그들이 운명을 달리한 연도가 인디언 신화 속에서 생명력을 의미하는, 이 미신의 숫자 오각형의 모서리에 닿을 때마다 우리는 그들을 곳곳에서 경건한 분위기 속에 기억하곤 하는 것이다.

 

파블로 네루다는 1904년 7월 12일 라틴아메리카의 빠랄(Parral)에서 태어났다. 묘하게도 칠레의 주목할만한 시인들이 많이 태어난 이 피폐한 촌락에서 네루다는 온 생을 통틀어서 정녕 다함이 없는 시적 에너지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물론 말이 없고 엄격할 대로 엄격하기만 할뿐, 시적 재능과는 무관한 아버지의 이 좁은 성(城)은 그의 어린 시절에 뼈아픈 추억으로 남아있다.

    
네루다에 대한 관심은 비단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다 준 연시집 <스무 개의 사랑 노래와 절망 속의 작은 읊조림>에서 연유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구사하는 언어의 시적 힘이 오직 풍요롭고도 다채롭게 확장하는 서정시적 에로스에서 기원한다고 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시에 관한 한 그의 정력적인 호기심이 특별히 극복해야 했던 한계는 주제의 측면에서나 기교적인 측면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 그의 시세계는 처음부터 끝이 예비돼 있지 않았다고나 할까. 네루다에게 그리스 신화 속의 마이더스 왕에 관한 이야기가 더는 신화 속의 이야기만은 아닐 터, 그가 손을 대는 찰나, 만물은 시로 화(化)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네루다의 시는 어찌 보면 거의 본능에 가깝게 그러나 시적 긴장감을 늦추는 법 없이 요람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인생에 대한 물음을 대담하게 밀어붙인다. 그에게 삶의 진실은 아스라한 현기증을 유발한다. 착오가 없을 수도 없지만 이에 여념하지 않고 배우는 자의 겸손한 자세를 잃어 본적이 없는 그였다. 네루다에게 창조를 향한 전진은 절망과 좌절의 희생을 감내하고도 남을 만큼 절실한 것이었다. 


그의 시가 원숙미를 더해가던 시기에, 그의 시적 주제는 미학적 에테르의 천체와 농후한 정치적 성향으로 가장한 지상의 공동묘지 사이를 큰 폭으로 진동한다. 한편, 그 스스로는 내면으로부터 울려오는 한 고독한 동성애자의 광포한 자기부정의 절규에 귀기울여야만 했으며, 동시에 극단적인 냉전시대의 상황에서 정치선전에 희생되었다는 자괴감을 떨칠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그는 가장 단순한 사물의 세계를 가벼운 마음으로 추구하곤 한다.

 

그가 처음으로 출판한 작품집 <지상에 체류하는 동안>이 이끌던 잿빛 성공의 그늘이 가셔가던 무렵 그를 훈계하던 것은 시적 미학의 정점에서 축포처럼 터져 오르는 자기소멸과도, 불모의 모래사장에서 순간 반짝이는 순수시의 촉촉함과도 거리가 멀다. 게다가 그는 그의 앞길을 확장하고자하는 욕망에 눈이 멀어서 그의 시세계를 안내하는 친절한 혹은 불필요하게 말이 많은 교사를 자청한 적도 없다. 설령 그의 목소리가 일관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동일한 시가 경우에 따라서는 만화경의 세계 마냥 다채롭게 읽힌다는 점 역시 주목할 만 한데, 대체로 고전적인 작품들이 가진 보편성과 영속성은 이런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에 빚지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반 백년동안 네루다는 칠레 시단의 거인이었으며 넓게는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지간에 라틴아메리카 전역에 군림하던 시의 독재자였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본심은 분명히 아니었다. 네루다는 이미 일찍부터 어떠한 문학적 조류와도 거리를 유지했으며 자신의 초상을 담은 시적 유파를 만들기 위한 초석을 다져본 적도 없다. 한결같이 이러한 독재자의 언어 속에서는 “정상의 왕좌에 앉지 않으면 멍텅구리지!”라는 따분한 모토는 찾아볼 길이 없다. 오직 획일적인 작품세계만을 고집하는 현대의 시인들이 네루다 곁에서 그의 진언을 경청하기를 원한다면 상당한 인내심을 필요로 하리라. 또한 우리는 네루다에게 진정으로 감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왕관을 둘러싼 쟁탈전으로 인해 많은 칠레의 새로운 시인들이 등장할 수 있었고, 그들 중 몇몇은 세계의 시단에서 그 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네루다는 큰 시인이었다. 그러나,…….
네루다학(學)에서 이 틈새를 비집고 끼어드는 이 ‘그러나’라는 개념도 무시할 수는 없다. 이 개념의 공간은 오늘날 점점 더 팽창해 가고 있다. 그래서 네루다에 관한 글들을 모두 짜깁기하면 별 어려움 없이 지구의 적도를 한바퀴 빙 두를 수 있다고 어느 네루다 연구가는 서슴치 않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의 적들 중 일부는 같이 시를 쓰던 동료들이었다. 그들의 공격에 대해 네루다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극단적인 조치에 대해서도 역시 일관된 자세를 잃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그의 적들과는 비교조차 안될 정도로 월등히 많은 친구들을 가졌었다. 프레테리꼬 가르시아 로르까, 죠르주 아마도, 루이 아라공, 파블로 피카소, 아나 지게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 그리고 살바도르 알렌데가 그들이다.

 

늦어도 1936년 이후부터는 정치적 앙가쥬망이 그의 삶과 작품에 있어서 큰 비중을 차지하던 활력소였다. 스페인 정부를 위해서 또 전체주의에 맞서기 위해 네루다는 입당을 결정한다. 물론 그의 이 탁월한 선택은 논쟁의 불씨가 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에게는 창작의 한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1945년 그는 공식적으로 칠레 공산당에 입당한다. 차이는 있겠지만 그는 여기서 죽는 그 순간까지 참을성 있게 충성을 다하여 일했고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해 후회한 적도 없다. 스페인 내전의 비극이, 또 아우슈비츠에 대한 불온한 기억이 아물지 않던, 게다가 그 이후 지속되던 납빛의 냉전시대 상황에서 그의 행보는 당시 여러 지성인의 태도와는 남다른 것이었다.

 

한낱 ‘지상에서 소외된 자’에 대한 불타는 그의 연대감은 이들의 삶에 대한 폭넓은 동감과 감동에서 비롯한 것이지 단지 특정한 실존적 사회문제를 타개하기 위한 임시방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네루다가 불순한 의도로 몇몇 당을 위한 찬양곡을 작곡했음도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는 생의 마지막까지 이 기억에서 벗어나고자 괴롭게 몸부림친다. “물론 나는 잘 알고 있다. 혁명과 혁명가도 종종 오류와 부조리에 봉착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인간에 대한 불문율은 우파에게서처럼 좌파에게도 동일한 효력을 발휘한다. 그 누구도 오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물론 그의 이 고백을 다음과 같이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즉, 인류의 연대의식과 인간적 기품에 바탕을 둔 정의의 하얀 깃발이, 그러나 커다란 과오로 구멍 뚫린 이 깃발을 개종자가 열심히 참회기도를 하는 와중에 착용하는 흰옷과 맞바꾸겠다는 말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네루다에 대한 공격은 그저 품위 있는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내심 그에 대한 사무친 적대감을 버릴 수 없던 동료들이나 비평가들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그의 그 정의에 불타는 시학도 스스로를 1949년의 탈출과 망명을 부추기던 시대의 횡포로부터 보호할 수는 없었다. 구태의연한 민주주의 정치질서를 유지하고자 당시 이탈리아와 프랑스 정부는 국가의 안보를 명목으로 네루다의 그 위험한 시들을 싸잡아 맹비난한다. FBI가 작업한 그에 대한 세부신상기록카드는 어떤 종류의 단행본 출판물보다도 훨신 두껍고 치밀하다. 좋은 친구들 가운데 치명적인 적들이 은폐돼 있다는 사실은 저 악명 높은 ‘쿠바인의 편지’사건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나중에 네루다는 라틴아메리카 혁명의 단두대에 세워져 공개적으로 심판 받는 오욕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이 사건의 발단이 되었던 시낭독 순회여행 중 미국 펜클럽의 초청과 페루정부의 표창 수여는 그가 평생을 두고 용서할 수 없었던 그에 대한 철저한 조롱이었다.


투병 중이던 네루다는 1973년 9월 피노체트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나서도 열흘을 더 살아 있어야 했다. 마지막 혼미한 정신착란의 순간에 그는 반복해서 외쳤다고 전해진다. “당신들은 모두 죽어요. 모두가 모두가 죽는다니까요.” 얼마 뒤 산티아고에 있던 그의 아름다운 집 ‘라 카스코나(La Chasocona)’ 는 용맹스런 칠레의 군인들에 의해서 깨끗이 파괴된다. 그리고 그날 이 집에서 시작된 장례행렬은 중무장한 군대의 삼엄한 경계 속에 묘지로 향했다. 그의 장례에는 수백의 군중이 운집했다. 이들 중 스웨덴 대사와 멕시코 대사만이 외부세계의 유일한 대표자였다. 장례행렬은 조금은 떨렸지만 그러나 침착하게 <인터내셔널가>를 불렀다. 이것은 이 독재정권에 대한 첫 번째 공식적인 시위였다. 피노체트 장군은 이 시인의 죽음을 위해 3일간을 국가차원의 애도일로 지정한다. 그리고 그는 네루다를 7년 동안 칠레에서 파문시킨다. 

 

1950년 칠레에서 <거대한 노래>가 불법인쇄 되었다. 내 아버지는 그 원본 복사본을 갖고 있다는 데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중에 이 복사본에는 “깜빠네로 네루다(스페인어: 친구 네루다)”라는 네루다의 파란색 자필서명이 화려하게 장식되기도 한다. 이 책은 내 인생의 첫 번째 독본(讀本)이다. 내 어머니는 이 책과 함께 내게 읽기를 가르쳤다. 지나치게 과장된 주장이 되려나, 만약에 내 전생애를 걸쳐 이 독서의 시간이 언제나 함께 하고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 주옥과도 같은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그러한 유년시절로부터 24년 후, 피노체트 장군의 비밀경찰이 나의 아버지를 추적하고 있었다. 항상 그렇듯이 그들은 내 집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고, 우리가 기르던 암캐의 작은 오두막과 그 너무나도 비정치적인 암캐까지 빠지지 않고 수색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들은 내 아버지를 찾지 못하자, 마치 분을 삭이기 위한 듯이 우리의 작은 가족도서관에서 소위 반동적이라고 하는 도서들을 질질 끌어냈다. 그 가운데서 내 첫 번째 독본을 발견하고는 마음 한구석에 서서히 저며오던 슬픔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가슴 아팠던 순간도 오늘 100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내 첫 번째 스승에 대한 기억의 한 부분임을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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