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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9/16
    The Double Life of Veroniq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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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5/09/16
    Krzysztof Kieslowski
    heesoo
  3. 2005/09/16
    이렌느야곱과 키에슬롭스키
    heesoo

The Double Life of Veronique

베로니카의 이중생활(The Double Life of Veronique)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을 때. 혹은 아무런 이유없이 한없이 슬퍼질 때 우리는 가끔 이런 질문을 하게됩니다.

이 세상에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닐까?
누구나 한번쯤은 가져봤을 이러한 질문을 바탕으로 이 영화는 전개됩니다.
같은날 같은때에 서로 다른 국가에서 태어난 두 사람 베로니카와 베로니크. 서로 자라온 환경은 다르지만 
둘은 자라면서 본능적으로 또하나의 자신이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음악회에서의 뜻하지 않게 베로니카는 죽게되고 베로니크는 알 수 없는 상실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근원 모를 빛이 자신의 주위에서 멤돌고 있다는 것을 본 후에는 항상 자신과 함께하는 베로니카의 영혼을 느끼게 되고 그녀는 더 이상 외롭지 않게 됩니다.하나 둘씩 자신에게 배달되는 베로니카의 유품을 통해 베로니카는 다시 현실로 다가와 베로니크와 함께 합니다. 그리고 인형극을 하는 알렉상드르를 통해 베로니크는 베로니카의 실존을 알 게 됩니다만...






누구나 한번쯤은 가벼봤음직한 단순한 질문을 통해 크쥐쉬도프 키에슬롭스키는
동화같은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갑니다.

갈색톤의 무채색 화면, 유리구슬을 통해 왜곡되어진 아름다운 주위풍경, 자연스런 영상을
일으키는 단조의 음악과 영상의 완벽한 조화.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한편의 아름다운 영상시로 우리의 마음속에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글:주하의 영화이야기중에서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은 동구와 서구의 베로니카란 이름을 지닌 두 여성의 삶을 평행으로 이어붙여 개인의 정체성과 동구와 유럽의 현실, 그리고 삶을 재현하는 영화매체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놀라운 표현의 깊이를 담은 작품이었다. 그러나 <베로니카으 이중생활>의 섬세하고 화려한 형식미에 매혹당했던 사람들은 <세가지 색>연작에서 키에슬로프스키의 운명론적인 도식이 너무 지루하게 남용되고 있다고 불평했다. 키에슬로프스키는 본질적으로 비관적인 운명론자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근대적인 이상을 모티브로 한 <세가지 색>은 인간의 본성이 그런 이상들과 충돌하는 게 아닌가라는 우울한 진단으로 가득 차 있다. <세가지 색> 연작의 첫 번째 편인 <블루 Blue>(1993)는 자유를 상징하는 블루를 화면의 기조로 깔고 죽은 남편에 대한 기억 때문에 방황하는 여성의 이야기로, 자유를 얻기 위해 사랑의 감정을 버리려고 노력하다가 마침내 사랑을 택한다는 내용이며 <화이트 White(1994)는 평등을 상징하는 흰색의 의미대로 사랑하기 위해 평등해지려고 노력하는 동구와 서구의 남녀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더 많은 소유를 전제로 한 터에 평등에 기초한 사랑이 가능한 것인가라는 것을 오히려 의심쩍게 묻는다. 박애를 상징하는 빨간색을 모티브로 한 <세가지 색>의 완결편 <레드 Red>(1994)는 더 많은 소유가 답이 아니라면 더 많은 사랑이 진정한 해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물음을 탐색하지만 우연의 운명에서 자유롭지 않은 인간의 조건을 차갑게 바라볼 뿐이다.


출처:영화연대



키에슬로프스키의 신비스럽고 시적인 새로운 영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에 대한 모든 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유혹을 뿌리치기가 힘들다. 그러나 곧 좌절을 맛보게 된다. 모든 부분들은 완전히 딱 아귀가 맞지 않는다. 어쨋는 이는 모아서 맞추어야 하는 퍼즐은 아니다. 이는 일종의 로맨스이다. 우리 모두가 언제 한번 쯤 생각해 보았을 순간에 관한; 또 다른 내가 어디 다른 곳에 있지 않을까, 만나적은 있을까... 왜 나는 나- 혹은 내가 아는 누군가와 똑 닮은 얼굴을 가진 초상화를 전시회에서 한번도 본적이 없을까? 만약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시카고 선 타임즈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은 에로티시즘과 멜랑콜리 사이의 어딘가를 떠도는 연약하고 최면에 걸린 듯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이는 헨리 제임스의 무시무시하고 결론이 없는 괴기 소설 같은 혹은 Borges의 시적인 미궁같은 분위기를 가진 고요하고 우울한 퍼즐같은 영화이다. 당신이 완전한 존재가 아닌 무언가 부족한 존재처럼, 혹은 뿌연 유리를 통해 일식을 보는 것처럼, 또는 시간에 대한 감각이 붕괴되어 심장이 한번 뛰는 사이에 모든 것이 당신의 눈 앞에 전광석화처럼 지나가는 것을 느낀다.


키에슬로프스키는 결코 그의 이야기에 결론을 내지 않는다. 그리고.. 그래야 할 것 같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의 음악은 으시으시한 단조 음계로 작곡된 매혹적이며 시적인 작품이다. 관객에게 주는 효과는 미묘하나 매우 현실적이다. 음악을 통해 이 영화는 우리를 완전히 그들의 세계로 끌어 당기며 현실로 돌아온 후에도 우리 자신의 세계에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 영화는 상상한 것보다 훨씬 풍요로우며 놀라운 작품이다.


워싱턴 포스트



. 첫장면 - 베로니카의 노래 오프닝 크레딧이 올라가고 페이드인 되면 한 아름다운 여성이 노래 부르는 모습이 클로즈업 됩니다. 그녀는 바로 폴란드에 살고 있는 베로니카입니다. 노래를 공부하는 학생인 그녀는 길가에서 친구들과 함께 노래를 부릅니다. 베로니카는 비를 맞으며 혼자서 끝까지 노래를 하는데 베로니카의 목소리(실제로는 Elzbieta Towarnicka라는 여성이 부릅니다.)는 얇은 미성이라기보다는 다소 굵은 목소리로 영혼을 울리는 듯한 깊은 음색


이 곡은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의 스코어 중 유일하게 단조가 아닌 장조로 다른 곡에 비해 밝은 느낌을 줍니다. 이 곡은 그녀가 다른 장소에 다른 이름으로 살고 있지만 공통점을 지닌, 또 다른 자아라 할 수 있는 베로니끄를 만날 것이라는 암시를 줍니다. 그대는 오리라(Tu viendras)는 제목처럼





베로니카와 베로니끄를 이어주는 끈 친구를 따라갔다 우연히 지휘자의 눈에 띄어 발탁이 된 베로니카는 공연에서 폴란드 작곡가 반 덴 부덴마이어의 E 단조를 위한 협주곡을 노래하게 됩니다. 심장에 문제가 있던 베로니카는 이 노래를 부르다 무대에서 숨을 거둡니다.





인형, 또는 베로니카의 죽음 어느날, 베로니끄는 인형극 공연을 보게됩니다. 이 때 흘러나오는

피아노곡이 바로 인형(Les Marionnettes)입니다. 다른 곡과 마찬가지로 역시 단조인 이 곡은

어둡고 슬픈 곡조를 특징으로 합니다.


인형이 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다가 숨을 거두는데 이것은 바로 노래공연을 하다 숨을 거두는 베로니카의 모습에 대한 상징이며 이 때 흘러나오는 인형이라는 피아노곡은 줄에 매달려 조정이 되는 인형이라는 측면에서 서로 다른 곳에 살고 있는 분신의 존재를 나타냅니다.





인형, 또는 베로니카의 부활 발레를 하다 숨을 거두었던 인형은 날개를 달고 천사로 부활합니다. 이 때 피아노곡이 멈추고 E 단조를 위한 협주곡이 흘러나옵니다. 베로니카와 베로니끄를 연결해 주는 끈의 역할을 하는 이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인형이 부활하는 장면은 죽었던 베로니카가 베로니끄로 환생하는 동시에 이 인형극을 바라보는 베로니끄가 또 다른 자아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자아에 눈을 뜨는 드라마틱한 장면입니다.






Zbignew Preisner


촘촘하게 짜여진 상징으로 이루어진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서 즈비그뉴 프라이즈너의 음악은 감독과의 긴밀한 관계만큼이나 영화의 표현방식과 주제에 완전히 녹아들어 기능하고 있습니다. 복화술사란 말처럼 프라이즈너는 음악으로 키에슬롭스키의 얘기를 해주고 있는 것이죠. 앞서 살펴보았던 <파워 오브 원>에서 한스 짐머의 음악은 파워풀한 느낌으로 영화의 주제를 부각시키는 역할을 주로 떠맡고 있었던데 반해, 이 영화에서는 풀롯과 표현방식,주제의 구현에서 음악과 영화가 거의 하나라 할 정도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특히 위 3번에서 살펴본 인형극 장면에서 두드러집니다. 저는 이 영화를 꼼꼼히 살펴보면서 음악과 영화가 얼마나 치밀하게 융합할 수 있는지에 놀랄 정도였습니다. 그것은 85년부터 서로 친구로서 함께 일하는 동료로서 긴밀한 그 둘이 서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거의 완전하게 이해했기 때문이겠지요. 그런 점에서 이 둘은 단순히 많은 영화에서 같이 작업한다기보다 음악과 영화라는 서로 다른 표현수단을 가지고 같은 것을 표현한 아주 드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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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zysztof Kieslowski

Krzysztof Kieslowski







68년 우츠 국립영화학교를 졸업하고 <사진 From the City of Ludz>(1969)이란 기록영화는 데뷔한 후 영화감독 키에슬로프스키는 68년 3월의 학생봉기, 70년 12월의 자유화 운동, 76년 노동자 시위사태, 80년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연대노조 운동, 그리고 81년 야루젤루스키 정권의 계엄령 선포에 이르기 까지 격동의 시대를 살았다. 폴란드사회가 그렇게 혼란을 겪는 동안 폴란드영화는 부흥기를 맞았다. 70년대 중반 아그네츠카 홀란드, 안토니 크라우즈, 리자드 부가예스키, 마르셀 로진스키등의 감독이 이른바 도덕적 불안의 영화로 정의되는 폴란드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 안제이 바이다 감독 등이 이끌었던 폴란드 유파가 폴란드영화의 현대적인 어법을 발굴해냈다면, 도덕적 불안의 영화 세대는 긍적적인 전망이 보이지 않는 폴란드 현실을 불안하게 짚어냈다. 케에슬로프스키는 물론 도덕적 불안의 영화 경향을 띤 감독 중 한 사람이었다. 이 시기에 만든 가장 뛰어난 작품은 <노동자들 71>로 71년 슈체친에서 일어난 노동자 파업사태를 찍은 것이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첫 극영화는 <어느 당원의 이력서 Personel>(1975). 50분짜리 중편이며 원래 텔레비젼 방영용으로 만든 작품인데, 독일 만하임영화제 대상을 받았다. 지하 폴란드 공산당원이 징계문제로 당 조사위원회에 호출되어 심문받는 과정을 기록영화 형식으로 담았고 50분 동안 심문관과 피심문자의 얼굴 클로즈업만으로 계속 이어가면서도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 놀라운 작품이다. 키에슬로프스키의 본격적인 장편 극영화 데뷔작 <상처 Spokoj>(1976)는 모스크바영화제 대상을 받았다. 이 작품으로 키에슬로프스키는 도덕적 불안의 영화세대의 리더로 국내외에서 확실한 주목을 받았다. 현실을 혼란한 마음으로 통찰하던 이 폴란드 감독은 곧 유럽영화계의 자본과 줄이 닿았고 그 계기가 된 것은 바르샤바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십계>연작이다. 84년에 <결말없음 Dlugi Dzien>이란 영화를 만들면서 같이 각본을 쓴 변호사 출신의 크쥐시토프 피시비츠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만든 <십계> 연작은 큰 성공을 거뒀다. <십계>가 극장판으로 개봉되는 과정에서 서유럽의 자본이 들어 왓고, 이런 공동작업 시스템은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세가지 색> 연작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피시비츠의 조력을 받으면서 키에슬로프스키는 전 유럽을 대표하는 감독으로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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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렌느야곱과 키에슬롭스키

이렌느 야곱이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를 만났을 때

2004.05.22 / 최은영(영화 칼럼리스트)

성경의 십계명을 토대로 만든 연작 <십계>의 한 에피소드를 장편으로 옮긴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이 1988년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을 때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는 20세기 후반 가장 주목할 만한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폴란드의 공산 정권이 무너진 1989년,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한 키에슬롭스키는 프랑스에서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을 제작하기로 했다. 같은 외모와 재능을 지녔으며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한 채 폴란드와 프랑스에서 각각 살아가는 여성 베로니카와 베로니크라는 신비스러운 캐릭터는 이 영화의 모두를 좌우할 핵심 배역이었다. 신선한 얼굴을 찾던 키에슬롭스키의 눈에 띈 사람은 루이 말의 <굿바이 칠드런>에서 피아노 선생으로 출연한 이렌느 야곱이었다. 스물다섯의 이렌느 야곱은 영화 출연 경험이 거의 전무하다시피한 배우인데다 데뷔작 <굿바이 칠드런>에서도 단역에 불과했지만 신비스러운 외모와 지적인 분위기가 마음을 끌었다.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은 이렌느 야곱의 첫 번째 주연작이 되었고 키에슬롭스키는 촬영하면서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녀는 매혹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난해하고 신비스러운 주제를 지닌 이 영화의 본질을 온전히 이해할 만큼 명민한 배우였다. “이 영화는 다른 공간에서 살아가는 분신과도 같은 두 여인의 삶을 다루고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키에슬롭스키는 그 두 사람이 지닌 공통적인 삶의 방식에 주목하고 있다. 그녀들은 모두 재능과 열정을 지녔지만 삶에서 뭔가 빠진 게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것은 세상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씩 느끼는 공허함이 아닐까.”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은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고 이렌느 야곱은 첫 번째 주연작으로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키에슬롭스키는 삶이 만들어내는 아이러니에 관심이 많은 감독이었다. 이별이나 고독감, 감정적 충돌은 그의 영화에서 단골 소재였다. 키에슬롭스키는 개별 캐릭터보다는 캐릭터 사이에서 생성되는 관계를 이미지로 담아내는 데 주력하면서 관계의 한계 또한 직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영화 주인공들은 결코 온전한 만남을 갖지 못한다.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에서 서로 닮은꼴인 베로니카와 베로니크는 결코 직접 대면하지 않으며 그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은 우연하게 찍힌 사진 한 장일 뿐이다. 삼색 연작에서도 키에슬롭스키는 감정적 평행선을 달리는 인물들을 그리고 있다. 삼색 연작의 토대를 이루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테마를 통해 이 세 단어가 지닌 이상적인 뉘앙스와 복잡한 감정적 현실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혼란과 깨달음의 과정을 보여 주는 것이다.

삼색 연작의 마지막 영화 <레드>에서 키에슬롭스키는 이렌느 야곱을 다시 캐스팅했다. 그녀가 연기한 발렌틴이라는 패션 모델은 전작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의 베로니카와 거의 흡사한 인물이다. 겉으로 보기에 모든 것을 지니고 있는 듯 보이지만 고독감에 시달리는 아름다운 여성 발렌틴은 상대역을 맡은 퇴역 판사 장 루이 트랭티냥의 비관적인 시선에 대항하며 서서히 자신의 본질을 발견해간다. “키에슬롭스키는 인생이 가져다 주는 놀라움에 흥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살면서 온갖 종류의 경험을 겪으며 조금씩 변화한다. 연기란 어떤 면에서 인생과도 같다. 연기를 하면서 배우는 변화를 꿈꾼다. 그리고 새로운 스토리, 혹은 감독, 상대역과의 관계를 통해 스스로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키에슬롭스키와 함께하는 작업의 본질이며 <레드>의 주제이기도 하다.”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는 <레드>를 만든 직후 은퇴를 선언했다. 그의 나이 52세에 불과했지만 그의 마음은 매우 염세적으로 기울었다. 그는 삼색 연작을 한꺼번에 만드는 과정에서 많이 지쳐 있었고 더 이상 영화를 만드는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심정을 밝혔다. 그러나 당시에도 이미 새로운 영화의 각본은 쓰고 있었다. 천국, 지옥, 연옥이라는 주제로 이루어진 삼부작을 구상하던 그는 1996년 심장 절개 수술을 받은 후 예기치 않게 세상을 떠났다. 키에슬롭스키의 죽음 이후에도 이렌느 야곱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와 빔 벤더스의 합작 영화 <구름 저편에>에 출연하는 등 활동을 계속했으며 더러는 함량 미달의 미국영화에서 재능을 낭비하기도 했다. 수많은 그녀의 출연작 중에서도 키에슬롭스키와 함께한 두 편의 영화만큼 그녀의 존재를 각인시킨 영화는 없었다.

TIP: 키에슬롭스키는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의 주인공으로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의 앤디 맥도웰을 점찍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그가 두 번째로 염두에 둔 배우는 줄리엣 비노시였지만 그녀 역시 레오 카락스와 <퐁네프의 연인들>을 촬영하고 있었다. 그때 운명처럼 다가온 배우가 신성 이렌느 야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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