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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석]정자결의

 

  정자 결의                       - 박경석          

                                                김유미 기자 

 

 

3일은 정태수 장애해방운동가의 기일입니다. 1968년 제주에서 태어난 정태수 열사는 어릴 적 소아마비로 인해 양쪽 목발을 사용해야 하는 지체장애인이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 전산 직업교육을 받던 그는 장애인을 둘러싼 사회 구조적인 억압을 인식하고 저항운동을 시작합니다. 88년 장애인의 열악한 현실과 동떨어져 화려하게 서울 장애자올림픽이 열리자 올림픽조직위원회 점거투쟁을 벌입니다. 이후 생존권 쟁취를 위한 장애인 노점상 최정환, 이덕인 열사 투쟁으로 구속되기도 했고, 사회복지시설인 정립회관의 비리 척결과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였습니다. 현장 투쟁을 중심으로 진보적 장애운동체 건설을 위해 헌신하다가 2002년 3월 ‘장애인 청년학교’ 수련회 중 과로로 돌아가셨습니다. 당시 함께 투쟁했던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준) 집행위원장의 ‘정자결의’라는 글을 통해 정태수 열사가 고민하고 꿈꾸었던 장애해방 세상을 생각해봅니다. <편집자 주>

 

△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준) 집행위원장.
ⓒ 프로메테우스 김유미
83년. 행글라이딩 사고로 다쳐서 5년 동안 집구석에서 아무도 만나지도, 만날 수도 없었던 세월을 보낼 때, 외롭다는 감정은 차라리 사치였다. 외로움보다 더 무서운 것은 무덤같은 무감각이었다. 세상에 대하여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나의 하반신처럼...

88년. 세상에 나왔다.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에 컴퓨터를 배우는 직업훈련생으로 입학했고 그곳에서 사람을 만났다. 그 전에 만났던 사람들과 전혀 다른, 너무나 내 삶에 생소한 사람들 ... 바로 장애인이었다.

 

‘가슴이 빠게지도록 사무치는 이 강산에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거부한다던 복종을 달게 받지 않겠다던 ...’

젊은 나이에 무슨 놈의 가슴이 그렇게 빠게져서 복종을 달게 받지 않아 온통 거부한다는 것인지, 내 감성에는 전혀 와닿지 않던 그 노래를 술만 먹으면 불러대던 정태수를 그곳에서 만났다. 그리고 장애인을 위해 정부가 많은 돈을 들여서 치루어 줄려던 ‘88올림픽장애자올림픽’을 거부한다고, (감히 지가 뭔데 무례하게!) 올림픽조직위원회를 깡패처럼 점거하고 난동부리다 경찰에 잡혀갔다 나왔다는, 그 이야기를 태수와 그의 똘마니들에게 무슨 훈장처럼 떠벌리며 술을 먹던 박흥수 형을 그 곳에서 만났다.

그들은 매일 술을 먹으며 무엇인가를 모의했다. 그것이 알고 싶었다. 당시 그 복지관에서는 ‘장애인의 건강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훈련생들에게 점심시간마다 국민체조를 시켰는데, (직원들은 자유롭게 점심시간을 즐겼다.) 그들은 그것을 거부하는 투쟁을 조직하고 있었다. 장애인들이 복지관에서 시키는 규칙을 따르지 않고 항명을 하다니... 그런 정신으로 장애인인 주제에 어떻게 비장애인들과 경쟁을 할 수 있는가. 빨갱이 장애인들 같으니라고...

 

너무나 ‘착한’ 장애인이었던 나는, 곧장 선생님에게 그 사실을 일러바쳤다. 그리하여 그들의 ‘국민체조 거부투쟁’은 소수 몇 명의 쿠테타로 끝났다.

그 후로 나는 그들 몇 명에게 ‘따’ 당했다. 너무나 착한 장애인인 나의 주위에는 그래도 여전히 온건파와 사랑파의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 과격파에게 ‘따’ 당한 나는 곧 외로워졌다. 왜냐면 그들의 질퍽한 정이 좋았고 소곤대는 이야기가 너무 궁금했기에... 그래서 자존심을 접고 그들이 만나는 술자리를 열심히 따라다녔다. 그 만남은 무뇌상태에 있던 나를 의식화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그들은 그것을 ‘약물치료’라 불렀다. 흥수형과 태수는 장애인의 문제가 ‘내 탓이요’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의 탓’이라는 것을, 그래서 비참한 장애인의 현실을 바꾸려면 사회를 ‘개량’도 아니고 ‘변혁’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조금 과격한 것 같았지만 맞는 것 같았다.

△ 정태수 열사는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민족열사묘소에 묻혀 있다. ⓒ 김유미
어느 날 흥수 형은 태수와 나를 불렀다. 우리집 아파트 앞 정자였다. 돈이 없어 소주에 안주는 오징어 한 마리였다. 그리고 술을 따르며 말했다. 장애해방을 쟁취하기 위해 강고한 조직을 건설하자고 제안했고, 그래서 우리 3명은 죽을 때까지 동지가 되자고 맹세했다. 장애인 세 명의 ‘정자결의’였다.

장애인운동에도 여러 출신들이 많은데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출신의 장애인들은 싹틈 동문회를 구성했고 그 당시 평생 장애인운동의 활동가로 결의한 사람은 3명이었다. 그들과 함께 외로운 길을 선택했다. 사람들이 별로 가려고 하지 않는 길을 ... 괜시리 ‘정자결의’ 땜시로 인생이 질퍽하고 처절하게 된 것 같다. 그 이후로 선택의 연속이었다.

운동도 다양하지만, 그들과 함께 했던 주 종목은 점거분야였다. 장애인복지관을 졸업한 해에 장애인훈련생의 기만적인 취업현실을 폭로하며 복지관을 점거하는 투쟁으로 화려한 점거의 주특기가 시작되었다. 함께 처음 점거를 결의하며 결행했던 그날, 태수는 말도 하지 않고 머리를 아예 빡빡 밀고 나타났다. 장난이 아니었다. 충격이었다.

그 후 흥수 형과 태수는 치열하게 투쟁했다. 태수는 복지관 졸업 후 위장취업을 설파하며 구두수선 하는 미찌꼬바 형태의 작업장에서 장애인을 조직하였고, 흥수 형은 청계천에서 노점하는 장애인들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장애인운동조직을 건설하기 위해 장애인운동청년연합회,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 등 장애인운동조직의 가장 왼쪽에서 현장의 토대를 건설하고자 노력했던 조직에서 열심히 꼴아 박았다.

장애인복지법개정과 장애인고용촉진법제정의 양대 법안 투쟁, 정립회관 시설비리투쟁, 최정환·이덕인 열사 투쟁, 장애인노동권쟁취투쟁 등의 과정에서 수많은 점거와 단식, 삭발, 그리고 도피와 감옥생활로 80년 후반과 90년을 관통하며 현장투쟁을 조직하기 위해 온 몸과 마음을 던졌다. 그리고 2000년을 접어들며 흥수 형은 가난과 절망스런 현실운동에 지쳐 술로, 태수는 투쟁의 과로로 젊은 나이에 죽어갔다.

△ 정태수 열사와 함께 활동했던 동료들과 그 후배들은 매년 그의 기일에 즈음해 추모제를 연다. ⓒ 김유미
싹틈 출신의 ‘정자결의’의 세명 동지 중에 나는 혼자 남았다. 그들과 함께 했던 10년이 넘는 세월을 통해 나는 몸으로 분명히 확신하는 것이 생겼다. 그리고 머리로 정리했다.

 

과격하지만 ‘맞는 것 같았던’ 그 사실이 ‘맞다’라는 것이다. ‘운동단체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그 시대를 사는 민중들이 진실을 꿰뚫어 보고, 말하고, 힘을 모으기 위한 희망의 물리적 근거로서 기능하는 데 있다.’는 서준식 선생님 생각이 맞다. 그들은 물리적 근거로 기능하는 장애인운동조직을 건설하려했다. 그래서 가난하고 처절했고 고통스러웠다. 현란한 시대의 변화 속에 운동은 여의도에서의 로비로 전락되고 현장의 물리력은 그것을 치장하기 위한 기능으로 변질된 지금의 현실에서, 희망의 물리적 근거로서 조직을 건설하기 위해 여전히 현장에서 빡세게 꼴아 박는 것이 고통스럽고 외롭다.

 

고통스럽고 외로운 길이었지만, 흥수 형과 태수가 내게 보여주려 했던 과격하고 물리적인 현장 투쟁들은 가슴이 빠게지도록 비참한 장애인들의 야만적인 현실에 대한 거부이며 불복종이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그래서 비록 홀로 남았을지라도 그 길에 있음이 좋다. 그리고 내가 장애를 가졌을 때 느꼈던 무감각보다 고통과 외로움을 느낄 수 있는 지금이 보다 행복하다.

박경석/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준) 집행위원장

                                                                                                                   > 2007.03.03 00:23  프로메테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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