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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당 정책위원회 부설 교육센터 <너른마당>

한국사회당 정책위원회 부설 교육센터 <너른마당>

2007년 봄 세미나 

 

 

 

○ 일시: 세미나 별 해당 요일의 저녁 7시~10시

○ 장소: 한국사회당 중앙당 대회의실 
 

[세미나 1] 현대 사회와 비판적 사회 이론 
  담당자: 이병훈(한국사회당 정책위원)
 
1회 4월 16일(월)
  : 위르겐 하버마스 Ⅰ - 의사소통행위론과 합리성 기획의 부활
2회 4월 23일(월)
  : 위르겐 하버마스 Ⅱ - 현대 사회의 병리화로서의 생활세계 식민지화
3회 4월 30일(월)
  : 위르겐 하버마스 Ⅲ - 민주주의의 새로운 모색
4회 5월 7일(월)
  : 니콜라스 루만 Ⅰ - 자기준거적? 자기재생산적 체계로서의 사회
5회 5월 14일(월)
  : 니콜라스 루만 Ⅱ - 현대 사회와 사회적 체계들의 작동
 
[세미나 2] 이주의 정체성 - 정체성의 이주
  담당자 : 윤철기(한국사회당 정책위원)
 
1회 4월 22일(일)
  : 정체성의 구조적 이해 I ― 현대사회의 이주와 정체성의 문제
2회 4월 29일(일)
  : 정체성의 구조적 이해 II ― 일반성의 셰마를 통해 본 정체성의 셰마
3회 5월 6일(일)
  : 포스트 콜로니얼리즘에 대한 비판적 이해 I ― 프란츠 파농의 저항적 민족주의
4회 5월 13일(일)
  : 포스트 콜로니얼리즘에 대한 비판적 이해 II ― 포스트모던 문화이론 : 호미 바바, 스튜어트 홀을 중심으로
5회 5월 20일(일)
  : 포스트 콜로니얼리즘에 대한 비판적 이해 III ― 페미니즘, 해체주의, 포스트 콜로니얼리즘 : 스피박 읽어내기
6회 5월 27일(일)
  : 결론 ― 이주의 정체성 - 정체성의 이주
 
[세미나 3] 독일 이상주의 강독― 칸트에서 헤겔까지
  담당자: 이현종(한국사회당 정책위원), 김치수(한국사회당 정책위원회 교육국장)
 
1회 4월 28일(토)
  : 임마뉴엘 칸트― 이상주의적 주체의 등장
2회 5월 5일(토)
  : 『순수이성 비판』에 대하여
3회 5월 12일(토)
  : 피히테에서 셀링까지 Ⅰ
4회 5월 19일(토)
  : 피히테에서 셀링까지 Ⅱ
5회 5월 26일(토)
  : 헤겔 ― 의식의 절망 또는 유희
6회 6월 2일(토)
  : 『정신현상학』에 대하여 Ⅰ
7회 6월 9일(토)
: 『정신현상학』에 대하여 Ⅱ
 
* 참가비는 무료입니다. 참가 문의 및 기타 문의는 홈페이지나 이메일을 이용해 주십시오.

 

2007년 4월 4일 한국사회당 정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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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사랑의 노래..[씨야]




겁이 난다.

 

내 사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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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FTA 저지 범국민총궐기대회


 


한미FTA 반대 여론이 날이 갈수록 높아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눈치만 보던 국회의원들마저 한미FTA 반대 대열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과 정부는 한미FTA를 끝까지 밀어붙이겠다고 오기를 부리고 있습니다.

민주적 절차마저 무시한 한미FTA의 체결 강행은 사회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것은 물론
헌법과 각종 법률들을 누더기로 만들고 우리 사회를 더욱 나락으로 떨어뜨릴 것입니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당장 한미FTA 협상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오는 3월 25일(일) 오후 3시 서울 시청 광장에서는
한미FTA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집회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함께 한미FTA 반대의 목소리를 높여봅시다.

[한미FTA 저지 범국민총궐기대회]
  - 일시/장소 : 3월 25일(일) 오후 3시 서울 시청 광장
  - 주       최 : 한미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

[참여 방법]
  - 당원 여러분들께서는 당일 집회 장소로 바로 오시거나
  - 집회 준비를 도와주실 분들은 오전 10시 중앙당으로 오시면 됩니다. 당원 여러분들과 함께 피켓 등의 집회 준비물을 만들 계획입니다.
  - 기타 문의사항은 조영권 한국사회당 서울시당위원장(02-3275-1146, 019-385-6510)에게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2007년 3월 22일
한국사회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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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상곡...[자우림]

 

 

좀처럼 자우림은 좋아해지지가 않았는데..

 

추천할만한.. 곡..

 

요즘의 내 맘을 반영한 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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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부는 것은 더운 내 맘 삭여주려
계절이 다가 도록 나는 애만 태우네
꽃잎 흩날리던 늦봄의 밤
아직 남은 님의 향기
이제나 오시려나, 나는 애만 태우네




애달피 지는 저 꽃잎처럼
속절없는 늦봄의 밤
이제나 오시려나, 나는 애만 태우네





구름이 애써 전하는 말
그 사람은 널 잊었다





살아서 맺은 사람의 연실낱 같아 부질없다
꽃 지네 꽃이 지네, 부는 바람에 꽃지네
이제 님 오시려나, 나는 그저 애만 태우네





바람이 부는 것은 더운 내 맘 삭여주려
계절이 다 가도록 나는 애만 태우네





꽃잎 흩날리던 늦봄의 밤
아직 남은 님의 향기
이제나 오시려나 나는 애만 태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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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석]정자결의

 

  정자 결의                       - 박경석          

                                                김유미 기자 

 

 

3일은 정태수 장애해방운동가의 기일입니다. 1968년 제주에서 태어난 정태수 열사는 어릴 적 소아마비로 인해 양쪽 목발을 사용해야 하는 지체장애인이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 전산 직업교육을 받던 그는 장애인을 둘러싼 사회 구조적인 억압을 인식하고 저항운동을 시작합니다. 88년 장애인의 열악한 현실과 동떨어져 화려하게 서울 장애자올림픽이 열리자 올림픽조직위원회 점거투쟁을 벌입니다. 이후 생존권 쟁취를 위한 장애인 노점상 최정환, 이덕인 열사 투쟁으로 구속되기도 했고, 사회복지시설인 정립회관의 비리 척결과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였습니다. 현장 투쟁을 중심으로 진보적 장애운동체 건설을 위해 헌신하다가 2002년 3월 ‘장애인 청년학교’ 수련회 중 과로로 돌아가셨습니다. 당시 함께 투쟁했던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준) 집행위원장의 ‘정자결의’라는 글을 통해 정태수 열사가 고민하고 꿈꾸었던 장애해방 세상을 생각해봅니다. <편집자 주>

 

△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준) 집행위원장.
ⓒ 프로메테우스 김유미
83년. 행글라이딩 사고로 다쳐서 5년 동안 집구석에서 아무도 만나지도, 만날 수도 없었던 세월을 보낼 때, 외롭다는 감정은 차라리 사치였다. 외로움보다 더 무서운 것은 무덤같은 무감각이었다. 세상에 대하여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나의 하반신처럼...

88년. 세상에 나왔다.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에 컴퓨터를 배우는 직업훈련생으로 입학했고 그곳에서 사람을 만났다. 그 전에 만났던 사람들과 전혀 다른, 너무나 내 삶에 생소한 사람들 ... 바로 장애인이었다.

 

‘가슴이 빠게지도록 사무치는 이 강산에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거부한다던 복종을 달게 받지 않겠다던 ...’

젊은 나이에 무슨 놈의 가슴이 그렇게 빠게져서 복종을 달게 받지 않아 온통 거부한다는 것인지, 내 감성에는 전혀 와닿지 않던 그 노래를 술만 먹으면 불러대던 정태수를 그곳에서 만났다. 그리고 장애인을 위해 정부가 많은 돈을 들여서 치루어 줄려던 ‘88올림픽장애자올림픽’을 거부한다고, (감히 지가 뭔데 무례하게!) 올림픽조직위원회를 깡패처럼 점거하고 난동부리다 경찰에 잡혀갔다 나왔다는, 그 이야기를 태수와 그의 똘마니들에게 무슨 훈장처럼 떠벌리며 술을 먹던 박흥수 형을 그 곳에서 만났다.

그들은 매일 술을 먹으며 무엇인가를 모의했다. 그것이 알고 싶었다. 당시 그 복지관에서는 ‘장애인의 건강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훈련생들에게 점심시간마다 국민체조를 시켰는데, (직원들은 자유롭게 점심시간을 즐겼다.) 그들은 그것을 거부하는 투쟁을 조직하고 있었다. 장애인들이 복지관에서 시키는 규칙을 따르지 않고 항명을 하다니... 그런 정신으로 장애인인 주제에 어떻게 비장애인들과 경쟁을 할 수 있는가. 빨갱이 장애인들 같으니라고...

 

너무나 ‘착한’ 장애인이었던 나는, 곧장 선생님에게 그 사실을 일러바쳤다. 그리하여 그들의 ‘국민체조 거부투쟁’은 소수 몇 명의 쿠테타로 끝났다.

그 후로 나는 그들 몇 명에게 ‘따’ 당했다. 너무나 착한 장애인인 나의 주위에는 그래도 여전히 온건파와 사랑파의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 과격파에게 ‘따’ 당한 나는 곧 외로워졌다. 왜냐면 그들의 질퍽한 정이 좋았고 소곤대는 이야기가 너무 궁금했기에... 그래서 자존심을 접고 그들이 만나는 술자리를 열심히 따라다녔다. 그 만남은 무뇌상태에 있던 나를 의식화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그들은 그것을 ‘약물치료’라 불렀다. 흥수형과 태수는 장애인의 문제가 ‘내 탓이요’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의 탓’이라는 것을, 그래서 비참한 장애인의 현실을 바꾸려면 사회를 ‘개량’도 아니고 ‘변혁’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조금 과격한 것 같았지만 맞는 것 같았다.

△ 정태수 열사는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민족열사묘소에 묻혀 있다. ⓒ 김유미
어느 날 흥수 형은 태수와 나를 불렀다. 우리집 아파트 앞 정자였다. 돈이 없어 소주에 안주는 오징어 한 마리였다. 그리고 술을 따르며 말했다. 장애해방을 쟁취하기 위해 강고한 조직을 건설하자고 제안했고, 그래서 우리 3명은 죽을 때까지 동지가 되자고 맹세했다. 장애인 세 명의 ‘정자결의’였다.

장애인운동에도 여러 출신들이 많은데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출신의 장애인들은 싹틈 동문회를 구성했고 그 당시 평생 장애인운동의 활동가로 결의한 사람은 3명이었다. 그들과 함께 외로운 길을 선택했다. 사람들이 별로 가려고 하지 않는 길을 ... 괜시리 ‘정자결의’ 땜시로 인생이 질퍽하고 처절하게 된 것 같다. 그 이후로 선택의 연속이었다.

운동도 다양하지만, 그들과 함께 했던 주 종목은 점거분야였다. 장애인복지관을 졸업한 해에 장애인훈련생의 기만적인 취업현실을 폭로하며 복지관을 점거하는 투쟁으로 화려한 점거의 주특기가 시작되었다. 함께 처음 점거를 결의하며 결행했던 그날, 태수는 말도 하지 않고 머리를 아예 빡빡 밀고 나타났다. 장난이 아니었다. 충격이었다.

그 후 흥수 형과 태수는 치열하게 투쟁했다. 태수는 복지관 졸업 후 위장취업을 설파하며 구두수선 하는 미찌꼬바 형태의 작업장에서 장애인을 조직하였고, 흥수 형은 청계천에서 노점하는 장애인들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장애인운동조직을 건설하기 위해 장애인운동청년연합회,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 등 장애인운동조직의 가장 왼쪽에서 현장의 토대를 건설하고자 노력했던 조직에서 열심히 꼴아 박았다.

장애인복지법개정과 장애인고용촉진법제정의 양대 법안 투쟁, 정립회관 시설비리투쟁, 최정환·이덕인 열사 투쟁, 장애인노동권쟁취투쟁 등의 과정에서 수많은 점거와 단식, 삭발, 그리고 도피와 감옥생활로 80년 후반과 90년을 관통하며 현장투쟁을 조직하기 위해 온 몸과 마음을 던졌다. 그리고 2000년을 접어들며 흥수 형은 가난과 절망스런 현실운동에 지쳐 술로, 태수는 투쟁의 과로로 젊은 나이에 죽어갔다.

△ 정태수 열사와 함께 활동했던 동료들과 그 후배들은 매년 그의 기일에 즈음해 추모제를 연다. ⓒ 김유미
싹틈 출신의 ‘정자결의’의 세명 동지 중에 나는 혼자 남았다. 그들과 함께 했던 10년이 넘는 세월을 통해 나는 몸으로 분명히 확신하는 것이 생겼다. 그리고 머리로 정리했다.

 

과격하지만 ‘맞는 것 같았던’ 그 사실이 ‘맞다’라는 것이다. ‘운동단체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그 시대를 사는 민중들이 진실을 꿰뚫어 보고, 말하고, 힘을 모으기 위한 희망의 물리적 근거로서 기능하는 데 있다.’는 서준식 선생님 생각이 맞다. 그들은 물리적 근거로 기능하는 장애인운동조직을 건설하려했다. 그래서 가난하고 처절했고 고통스러웠다. 현란한 시대의 변화 속에 운동은 여의도에서의 로비로 전락되고 현장의 물리력은 그것을 치장하기 위한 기능으로 변질된 지금의 현실에서, 희망의 물리적 근거로서 조직을 건설하기 위해 여전히 현장에서 빡세게 꼴아 박는 것이 고통스럽고 외롭다.

 

고통스럽고 외로운 길이었지만, 흥수 형과 태수가 내게 보여주려 했던 과격하고 물리적인 현장 투쟁들은 가슴이 빠게지도록 비참한 장애인들의 야만적인 현실에 대한 거부이며 불복종이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그래서 비록 홀로 남았을지라도 그 길에 있음이 좋다. 그리고 내가 장애를 가졌을 때 느꼈던 무감각보다 고통과 외로움을 느낄 수 있는 지금이 보다 행복하다.

박경석/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준) 집행위원장

                                                                                                                   > 2007.03.03 00:23  프로메테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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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식]나, 사회주의자

 

험한 세상을 살다보면 때로 몸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꾸며야 할 경우도 있다. 그러나 나는 험한 세상에 가슴을 펴고 나서는 일보다 꾸밈으로써 자신을 보호하는 일이 더 두려울 때가 있다. 꾸밈에 익숙해질 때 그 꾸밈은 어느새 나의 실체가 될 수도 있으며 일상화된 꾸밈 속에서 나의 삶 자체가 위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써놓고 고백하건대 나는 사회주의자다.

 

어린 시절 나에게는 작은 `커밍아웃(coming-out)' 사건이 있었다. 재일 한국인 2세로 일본에서 태어나 유·소년기를 일본에서 보낸 나는 코흘리개 시절부터 박해받는 소수자로 사는 일의 슬픔을 알았다. 당시 `조선'은 그들의 대화 속에서 모든 열등한 것, 야비한 것, 난폭한 것, 냄새 나는 것을 가리키는 대명사이다시피 했다. 중학교 3학년, 나는 비겁했던 나의 침묵과 눈치보기를 깨고 수많은 일본인 학우들 앞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내가 `조센징'임을 고백했다. 그 `커밍아웃'은 분명 16살 소년에게 가혹한 시련이었지만 나에게는 그보다 50이 넘은 내가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사회주의자'임을 고백하는 일은 한층 더 가혹한 시련이라고 느껴진다.

 

실은 나는 김만제 한나라당 정책위 의장의 `사회주의' 발언이 나왔을 때 이 고백을 하고 싶었다. 닥치는 대로 `사회주의'로 몰아대는 소리들과 핏대를 세우고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소리들이 소용돌이쳐 순식간에 집단 히스테리 속으로 빨려 들어갔던 그 때, “너 사회주의자!”라는 말은 사실 거의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었다. 그것은 `사회주의'라는 언어가 갖는 본래 의미와 아무런 상관없는, 차라리 미운 놈에게 증오와 공포의 이미지를 한꺼번에 뒤집어씌우기 위한 하나의 저열한 욕설에 가까웠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광기 속에서 나는 어린 시절의 나보다 더 비겁한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사회주의는 자유·평등이라는 인권의 근본이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근대 시민혁명을 거쳐 인류에게 보편적인 가치로서 제시된 자유·평등 이념은 시민혁명의 귀결인 초기 자본주의국가의 출현과 더불어 `보편적인' 것이 아닌 `재산과 교양 있는 시민'의 전유물로 낙착되었다. 이런 현상을 두고 당연히 당시 `재산과 교양'이 없는 민중들은 “혁명에 대한 배신”이라며 신랄한 비판을 가했으며, 시민혁명의 이념을 완성시키고 보편적인 자유·평등을 이루기 위한 대안적 시스템을 모색하게 되었다. 즉 사적 소유, 시장, 임노동, 이윤 등에 상징되는 시스템 대신에 여러 가지 형태의 협동사회에 대한 모색이 그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운동이 바로 근대적인 의미의 사회주의운동에 다름이 아니며 따라서 원래 사회주의의 핵심을 이루는 이념은 `보편적 자유·평등'이다. 논리적으로 사적 소유, 시장, 임노동, 이윤으로 상징되는 시스템 내에서 `보편적 자유와 평등'의 이념이 실현되지 않는 이상 온갖 종류의 사회주의적 희망은 지구상에서 사라질 수가 없게 돼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주의자는 언제나 실패해도 역사 속에서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날 사회주의를 꿈꾼다.

 

많은 종류의 소수자가 그렇듯이, 예를 들어 이국에서 차별과 싸우며 살아가는 16살 소년이 그렇듯이, `자유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자유와 인권을 억압당하는 50대 인권운동가도 한 사회의 지배구조 속에서 그 사회의 폭력성과 불합리함을 그 몸으로 직접 보여주는 억압정치의 피해자이다. 모든 소수자의 `커밍아웃'이 역사적으로 정당했듯이 나는 한국 사회에서 `사회주의자'임을 고백하는 나의 행동이 최소한 병든 사회의 광기에 맞서는 자유로운 인간의 책임 있는 행동이라고 믿고 싶다.

 

누가 이렇게 묻는다. “너 사회주의자냐?”. 나는 대답한다. 자연스럽게, 담담하게 그리고 어깨에 힘을 빼고 “그래, 나 사회주의자”. 이런 사회가 빨리 오기를 소망한다.

 

서준식/인권운동사랑방 대표 

 

                                                                 > 편집 2001.08.26(일) 18:09 / 한겨레 / 여론칼럼 / 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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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식]활동가들에게..

 

 

저마다 쓰라린 상처를 부둥켜안고 오늘도 ‘인간의 권리’를 생각하는 활동가들!

세상이 변해도,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변한 세상에 익숙해져도 아직 우리에게 남아있는 슬픔과 분노를 우리는 꼭꼭 간직하고 있어야하네.

그것은 우리의 전부여서는 안되지만 분명 우리의 생명일 터이네

서두르지 말기 바라네.

서둘러 세계나 사회를 설명하려 하지 말기 바라네.

자기에게 세계나 사회를 설명할 능력이 없음을 개탄하지 말기

바라네.

법률가나 교수의 지식은 우리에게 분명 부러운 것이지만 그러나 결코 기죽지 말게.

그런 것들은 우리의 삶, 우리의 희망에 비하면 결국은 왜소한 것들이네.

슬픔과 분노로 말미암아 운동가는 이 악덕과 폭력에 가득 찬 오늘을 래디컬하게 거부하고 내일을 고대하면서 살수 있는 사람들이라네.

 

우리는 현실을 초월하고자 하는 의지와 희망 때문에 살아 있을 수 있고  현실을 하나하나 바꿔 나가는 기쁨 때문에 살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이라네.

 

지식을 부러워하지 말고 단심[丹心]을 간직해주게.

그리고 그 단심에 긍지를 느껴주게! 운동가에게는 운동가만의

본령이 있고 사명이 있고 능력이 있네.

조리가 통하지 않는 세상에서, 교수의 목소리가 고작 기십 명이

참석하는 토론회에서만 답답하게 맴돌고 있을 때,

변호사의 법률지식과 진실의 주장이 그게 무슨 대수냐는 듯

보수적인 판사에 의하여 묵살 당할 때, 그 현실을 뚫을 사명과 힘을 지닌 사람은 바로 우리와 같은 운동가들이라네.

인간의 존엄이 일상적으로 짓밟히는 이 세계에서,

무엇이든 옳다고 주장되려면 그 옳음을 육체로써 고수하고

육체로써 외치는 물리적 근거가 있어야하는 법이고 그런 물리적

근거를 갖지 않는 주장은 대체로 허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라네.

 

두려워 말게. 몸을 던져주게. 이 어두운 세상에서 항상 옳은 것이

 힘있게 주장되기 위한 물리적 근거로서 존재해 주게.

그런 씩씩한 활동가로서 남아주게. 그러나 단심은 그저 선량한 것과는 다름을 명심해야 하네.

선량함은 의심의 여지 없이 미덕이지만 운동가가 가져야 할

충분조건은 아니네.

선량함은 반드시 자기희생을 반드시 요구하지 않지만

단심은 이미 그 속에 자기희생을, 죽음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라네.

또한 운동가는 기관차 처럼 맥진하면서 구체적인 성과를 올려야

하며 이런 활력이야말로 다름이 아닌 단심에서 나오는 것이라네.

 

살아가 주게. 전문성을 갖추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고,

그러나 운동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 주게. 자기 운동의 철학적 의미를 천착하면서,

그러나 대중과 함께.

살아가 주게. 때로는 아득하게 깊숙이, 때로는 한없이 넓게 운동의 의미와 기술을 추구하면서.

 

저마다 쓰라린 상처를 부둥켜 안고오늘도‘인간의 권리’를 생각하는 젊은 활동가들!

험한 밥을 먹고 닳아빠지도록 싸구려 옷 빨아 입어야 하는 너희.

휴가도 없고 퇴근 시간도 없는 너희.

용기를 가지고 버티어 주게.

너희 나이 40이 넘어, 세상에 대한 통찰력이 충만한 능력있는 활동가가 될 때까지.

그런 너희를 보는 것이 나의 꿈이란다.

너희가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마음을 다하여 헌신하는 것이 바로 나의 큰 꿈이란다.

 

 

1995년 3월15일 서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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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그네들 처럼...

 

하나씩 써나가고 만들어 나가야지...

 

이제 한번 진보 블질 속으로 빠져볼까나...

 

 

 

에밀리오님의 [진보넷에서 블질을 한다는 것은] 에 관련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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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업,업!!

 

 

평택지역에 대한 줄다리기가 이제 시작되려나???

 

이미 알던 소식이었는데도

 

현실에서의 직면해서 받는 느낌들은

 

역시나 사람을 흥분시킨다.  후훗..

 

 

잘~~만들어나가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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