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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회_Scan의 후기

조금 긴 후기 - 중구난방


우선, 바이러스에 의한 질병을 논할 때,
'환자'가 있고, '보균자'가 있다. 또, '감염인'이라는 말이 있다.

일단 '환자'는 말 그대로 지금 그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거야 특별히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

문제는 '보균자'라는 말인데,
"병원균을 몸 안에 지니고 있어 다른 사람에게 병원균을 옮길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다.
한편, '감염'은, "미생물이 동물이나 식물의 몸 안에 들어가 증식하는 일"을 의미한다.
(네이X 사전 찾아봤음.)

간단히 말하자면,
나는 '보균자'라는 표현보다는 '감염인'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 본다.
일단, 병원균이 사람의 몸에 들어가서 증식한 것이지,
사람이 병원균을 돈을 주고 사오거나, 어디서 퍼온 것이 아니다.
주머니속에 지갑을 넣듯이, 사람이 병원균을 꼭꼭 챙겨가지고 다니는 게 아니다.
그리고 '보균자'는 암적인 존재다. '병원균'의 전염성을 고려할 때,
'보균자'는 타인에게 병원균을 전염시키는 주체가 된다.
반면에 '감염인'은 말 그대로 감염되어 있는 사람을 의미할 뿐이다.
'병원균'의 전염에 대해서 주체가 되지는 않는다.
병원균이 스스로 전염하는 것이지, 사람이 일부러 전염시키는 것은 아니다.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초등학교 1학년때인지 2학년때인지, 학교에서 처음으로 간염검사를 받았는데,
나는 항원은 있고, 항체는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위에서 설명한대로 말하자면,
나는 HBV (Hepatitis B Virus - B형 간염 바이러스) 감염인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니, 거의 이 사회에서 "B형 간염 보균자"라고 부른다.

내가 그 검사 결과를 처음 받았을 때,
'항원'이라는 말과 '항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아무도 그게 무슨 뜻인지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저 검사 결과가 나온 종이를 부모님께 가져다 드리라고만 했다.
부모님은 그걸 받아보시더니, 그냥 괜찮다고 했다.
간염검사 후에, 예방접종이 있었는데,
예방접종은 항원과 항체가 둘다 없는 사람들만 했다. (당연한 거지...)
나는 예방접종을 할 필요가 없었는데, 그때까지도 나의 상태를 모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서, 초등학교 4학년때
'항원'과 '항체'가 어떤 건지 알게 되었을 때,
(그때까지 1년에 한번씩 학교에서 간염검사를 했는데, 매번 똑같은 결과였다.)
그때서야 내 몸에 B형 간염 바이러스가 있다는 의미인지 깨달았다.
그러나, 내가 또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환자"라는 것과 "감염인" 혹은 "보균자"라는 것의 차이였다.
나는 환자가 아니었음에도, 환자인 줄로 알고 있었다.
이때는, 부모님한테 진지하게 나 병원가서 치료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했는데,
부모님은 예전처럼 "괜찮다"라는 말씀만 반복하셨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B형 간염은 치사율도 몇% 있다고 들었는데, 지금 내가 그거 걸렸는데, 괜찮다니...
(지금도 치사율이 몇%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이젠 그것도 모를만큼 둔감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건데,
그때의 나는 이게 다 우리집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그런거라고 생각했다.
어느정도 어려운 것은 알고 있었으니까, 내 병원비를 댈 여력이 있겠나 싶었다.

학교에서 친구들하고 같이 검사를 받게 되다보니,
결과가 적힌 종이를 받아서 서로 돌려보게 되었는데,
우리반에 나랑 다른 한 아이가 '항원'만 양성이었다.
다른 아이들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땐 몰라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우리 둘은 며칠동안 불결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며칠뿐이었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는 만약에 백신이 없었다면, 이런 일들이 며칠뿐이었을까하는 의구심이 든다.
백신은 개인적으로 바이러스에 대한 방어를 하는 의미도 있지만,
전염에 대한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결정적인 매개체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그때쯤(초등학교 4학년)의 내가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
나는 내 몸안에 있는 나쁜 바이러스를 이렇게 그냥 방치하고 있다가는
악화되어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계속 하였다.
내가 그 치사율 몇%에 해당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항상 남들보다 약한 존재라고 생각했고, 남들보다 건강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하나는 "보균자"라는 자기존재의 부정이었다.
내가 "B형 간염 보균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나는 내가 다른 사람을 병들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누구도 나를 피하지 않았지만, 나는 내가 먼저 누구든 피해야 할 것 같았다.
수건도 같이 쓰면 안된다고 하고, 밥도 같이 먹으면 안된다는데
모두들 그냥 그렇게 함께하고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나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는 암적인 존재 같았다.
너희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너희들을 죽일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어.
그러고 싶지는 않은데, 그렇게 될 지도 몰라...

이런 공포스러운 생각들은
"보균자"와 "환자"의 결정적인 차이를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지워졌다.
놀랍게도 몇년이 지나도 내가 아프지 않은 것이었다.
중학교 1학년때쯤엔가 들은 이야기로는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고 (6개월에 한번인가...)
안 아프면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살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야
"보균자"라는 말이 "환자"와 어떻게 다른 건지 인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잘 살아왔다.
그 동안, 내 몸에 있던 HBV가 누군가의 몸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았을 지는 모르나,
이것으로 인하여 크게 아프지는 않고 잘 살아왔다.
이걸로 인하여, 신체검사 3등급 나왔고, 군대를 가야했다.
(군대를 갈 정도라면, 전염의 문제로 봐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야기지.)
여태까지 헌혈이라는 것을 해본적도 없다.
나는 헌혈을 해서는 안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인식하고 있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더라도, 내 '더러운' 피가 누군가에게 들어간다고 생각하면
또 그것만큼 끔찍한 일도 없었다.


정리하자면,
이런 경험에서 중요했던 것은
"환자"와 "감염인"에 대한 명확한 구분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성을 의미한다.
"감염인"은 미래의 환자가 될 수 있지만, 현재의 "환자"가 아니다.
또, "보균자"가 아니라, "감염인"이라는 것이다.
스스로 병원균을 퍼뜨리려는 사람이 아니다. 감염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생활하고 있는 것은
HBV의 (어쩌면 내가 살아 있는 시간보다 길지도 모를) 잠복기이기 때문이라는 것.

에이즈, HIV (Human Immunodeficiency Virus - 인체 면역 결핍 바이러스)의 경우는?
잠복기가 (약을 통해서라도) 길어진다면, 또 백신을 개발한다면...
HBV처럼 이 사회속에서 공존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우리의 공포는 이미 전염에 의한 죽음으로 한정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

중구난방을 통해서 에이즈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고도
이젠 함께 가야하는 병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나는 아직까지 공포를 떨치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저 어디서부터 꼬여있는지 알게 되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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