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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을 그린 화가, 조지프 라이트 [제 875 호/2009-02-11]

근대 미술 작품들 중 과학적인 기법을 도입한 그림으로 사람들은 점묘법으로 그려진 조르주 쇠라의 그림 ‘그랑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를 꼽고, 과학 실험을 다룬 그림으로는 영국의 화가 조지프 라이트가 그린 ‘진공 펌프 실험’을 꼽는다. 18세기 중반에 그려진 이 그림은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 즉 ‘이성과 계몽의 시대’로 불렸던 18세기적 분위기를 잘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이때의 과학 실험이 어떻게 행해졌는지도 명확하게 알려준다.

그림 속에서 구현되는 실험은 ‘진공’이 어떠한 상태인지를 보여주는 실험이다. 그림을 보면, 중앙 상단에 있는 커다란 유리 공이 눈에 들어온다. 유리 공 속에는 하얀 앵무새가 들어 있다. 그림 왼편에 서 있는 과학자는 유리 공과 연결되어 있는 펌프를 통해 공 안에 들어 있는 공기를 빼내려고 하고 있다. 유리 공 안의 공기가 완전히 빠져나가고 진공 상태가 되면, 안에 들어 있는 새는 산소 부족으로 죽게 될 것이다. 그림 속 과학자가 보여줄 실험은 바로 이것이다. 오늘날의 상식으로는 당연한 일이지만, 이 그림이 그려졌던 18세기에 이 같은 실험은 마치 마술처럼 보였을 것이다. ‘산소’의 개념이 발견된 것은 1770년대였고 이 그림이 그려진 정확한 시점은 1768년이다.



테이블에는 여러 가지 과학 실험 도구들이 놓여 있는데 그중에서 물컵 옆에 있는 ‘마그데부르크 반구’가 눈에 띈다. 마그데부르크 반구는 1654년 독일의 게리케가 마그데부르크에서 한 진공 실험에서 쓰인 반구다. 게리케는 두 개의 반구를 꼭 맞추고 두 안의 공기를 빼내면 반구 안이 진공 상태가 되어 두 반구가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험으로 증명해 보였다. 실험 당시 붙어 있는 두 개의 반구를 떼어내기 위해 16마리의 말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게리케가 독일 마그데부르크 시의 시장이었기 때문에 이 실험은 ‘마그데부르크의 반구’로 불리게 되었다. 조지프 라이트는 이 유명한 실험 기구를 그림 속에 포함시킴으로써 이 실험이 ‘진공’에 대한 것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다.

진공에 대해 사람들이 정확하게 알게 된 것은 이 마그데부르크의 반구 실험부터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과학자들은 진공이라는 상태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사용된 ‘물시계(clepsydra)’ 또는 ‘물도둑’이라고 불린 가느다란 대롱은 진공을 이용한 것이다. 물도둑은 일반 가정에서 국자 대용으로 쓰던 장치로 놋쇠 대롱 아래에 놋쇠 공이 붙어 있었고, 이 공 아래에 작은 구멍이 여러 개 뚫려 있었다. 이 물도둑을 물 안에 담그면 놋쇠 공 안에 물이 가득 차게 된다. 대롱의 끝을 엄지손가락으로 막은 후 물도둑을 꺼내면 놋쇠 공 안에 찬물은 흘러내리지 않는다. 이처럼 고대인들은 진공과 공기의 힘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는 못했지만 진공의 힘을 일상생활에서 이용했던 것이다.

‘진공 펌프 실험’의 화면은 전체적으로 어둡다. 어둠 가운데 놓여 있는 램프에서 나오는 환한 빛이 과학자와 구경꾼들을 비추고 있다. 이 극적인 빛은 ‘과학의 힘’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과학과 지식의 힘이 무지와 공포라는 어둠을 물리치고 모여든 사람들에게 올바른 방향을 제시할 것이라는 일종의 암시다.

재미있는 사실은 ‘진공 펌프 실험’ 속에 그려진 과학자의 모습이 현대의 과학자라기보다는 연금술사나 마법사를 연상시킨다는 사실이다. 그림 속 과학자는 긴 머리에 가운을 입고 극적인 표정을 지으며 유리 공 위에 달려있는 밸브를 조절하고 있다. 그는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구경꾼들에게 설명하며 밸브를 잠가서 새를 죽도록 내버려둘지, 아니면 새를 살려줄지 묻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림 속 과학자처럼 18세기 과학자들의 반은 과학자, 반은 마법사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저녁마다 부유한 가정들을 방문하며 과학 실험을 보여주었다. 이들의 과학 실험은 저녁 한나절의 여흥인 동시에, 아이들에게 과학적 지식을 알려주는 교육적인 효과도 있었다. ‘진공 펌프 실험’ 역시 이처럼 여염집에서 실시된 실험의 한 장면으로 보인다.

과학자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아이와 어른들, 연인, 철학자 등은 제각기 흥분에 찬 모습으로 과학자의 실험을 지켜보고 있다. 두 자매는 새가 곧 죽게 될까봐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으며, 새장을 든 소년은 과연 이 새장이 쓸모없어질지 궁금해하며 새장을 끌어내리고 있다. 화면 왼편에 앉아있는 또 다른 소년은 실험에 완전히 빠져든 듯, 몸을 앞으로 구부리고 실험 결과를 지켜보는 모습이다. 화면 오른편의 나이 든 남자는 과학의 힘으로 하나의 생명을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두려운 듯, 차마 시선을 유리 공에 주지 못하고 고개를 수그리고 있다.

18세기까지 화가들이 즐겨 그린 주제는 성경이나 고대 그리스 신화의 장면들, 또는 귀족이나 왕족의 초상화 등이었다. 서민들의 풍속화나 풍경화 등은 이때까지 고급 예술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귀족이 아닌 상인, 자본가, 시민계급이 성장하면서 화가들 역시 더욱 일상적인 주제를 그림에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그린 ‘일상’ 중에는 바로 이처럼 과학에 연관된 주제도 적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과학과 일상은 뗄 수 없는 관계였던 것이다.

글 : 이식 박사(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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