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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에는 '회심' 이라는 개념이 있다.
하나님을 영접하고 체험하고 하는 ... 일종의 '마음 바꿈' 이다.
종교쪽에서는 이러한 회심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한다. 사람들을 '회심' 시키기 위해서.
나는 회심에 대한 공부를 살짝 하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든다.
사회주의자들이 자신의 신념에 따라 죽어가는 역사적 사실들을 보면서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까지 만들까..
사회적 관계에서? 사회주의적 신념으로? 적들의 탄압으로? ...
이러한 '설명'들은 나에게 완전히 이해되질 않는다.
이름없는 수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총 들고 싸우다 죽어가는 모습들...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열정? 신념?
과거에는 이해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 지금은....
회심을 알면서 비로서 그들이 죽어가면서 까지 그들의 신념을 지키려 했는지 이해가 되는 것 같다.
이것은 사회 과학으로는 설명이 안되는 부분이다. 물론 사회 과학의 범주도 아니다.
즉 비합리로만이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들이 죽어가면서 했던 행동들은 '이론'도 한부분이지만 더 큰 것은 마음 즉 감성이었던 것이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다 . 다만 사람의 마음만이 무지개 색으로 채워 넣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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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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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의지가 부족 할수록십자가를 보면
어떤고통도 견딜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 마음이 가난 할수록
황금의 부처님을 보면
마음이 부유 해진다.
그런다고 지금 내가 신종풀루에서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다고 내가 비정규직의 최저임금이
나아질 기미가 없다.
이럴때 나는 사회적 관계로 지금까지 계급의 역사를 인간의 역사로 회심하지 않을수 없다.
최저임금과 때론 체불임금으로 살때 나는 더욱 감성이 촉박되며 비합리적인 분노를 합리적인 이성으로 담금질 하지 않을수 없다.
내가 분노할수록 자본은 너무나 수판적이고 틀린명제로 과학적이다.
나의 분노 감성이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를 못한다.
(노동자 대회를 참가하고 내려가면서)
"비합리적인 말이 아주 합리적으로 들린다"
강아래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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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님이 느끼는 그 감정이 노동계급으로의 회심이 아닐까 합니다.이런 것들이 이론적으로 설명이 가능한가요?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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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작정하고 글을 좀 쓰보죠상경하여 전태일 다리에 갔다가 마로니 공원으로 앉았다가 그리고 책을 좀 읽었지요
왜냐하면 이번년도는 자본과 정권의 서민들의 민생과 민주주의에 대한 탄압과 죽임의 굿판이었습니다.
참 불행하였고 무기력한 한해 였습니다.
그래서 노동자대회에는 무엇을 생각하며 앞으로 실천적 정치투쟁을 인식할 것인가?
고민은 어떤 월간지를 통하여 여러사람이 토론한 진보와 민주진영의 현 정치국면을 전환하고 극복하기 위한 내용이었죠
토론의 주제는
"분단체제론과 변혁적 중도"라는 문제인식에서 출발합디다.
물론 그 구성원들은 우리의 사회구성과 성격에 대하여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한국자본의 발전사에서 보다 독립화된 자본의 착취메카니즘이 자주화된 한국사회라고 인식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여하튼 분단체제론은 한국사회의 국가론에 대하여 자주적인 측면의 주권의 차원에서 대외적으로 독립화된 완전한 국가기재들 즉 요즘에 다시 문제되는 작전권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국제정치관계의 복합적인 요인을 생각한다면 분단체제론은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외교적인 총화된 시각으로 한국사회의 규정을 생각해 볼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이문제를 한국사회의 규정을 분단체제론을 규정하고 변혁적 중도를 진보진영의 노선으로 하는 실천적 총화된 인식도 쉽게 수용하기 어렵다고 생각 합니다.
여하튼 지면에 드러난 토론의 문제인식들을 읽으면서 이명박정권과 자본 보수진영의 이번년도 집권행보에 대하여 내년에 정치일정을 볼때 그리고 당면한 용산참사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진보와 민주주의 힘을 어떻게 하나로 모을수 있을까?
토론은 대안적 문제인식에서 회의를 주지만 그들의 문제인식을 접할수 있었다는 측면에서는 진보진영의 정치의 과제를 해결할수 있는 지혜가 주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노동자대회에서도 각 유인물들을 읽으려고 했지만 별로 접할수 없었고요
하나의 제단체의 결의문 차원에서 정리되어야 하겠지요
진보와 민주주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형성과정이 두가지 영역에서 제도권적 정치와 민주주의 투쟁,민주주의의 대중투쟁과 자치에서 드러나는 문제가 내년의 진보진영의 정치투쟁의 결과로 나타날 겁니다.
지면의 토론을 보면 이론은 회색이라 할수 있지만 이론없이 실천의 과학적 전망은 있을수 없습니다.그렇다면 모든 이론은 회색인가?라는 역 질문 속에서 이것은 다시 역사적으로 철학적으로 어떤 이론적 명제를 절대의 과학으로 규정하는 것을 자연의 순환과 질서에서 모든 것은 변한다는 철학적인 함의가 더욱 긍정적인 의미겠지요
그래서 현실진단의 토론의 문제인식들을 보면 서양의 정치사 민주주의 발전사에 대하여 자본주의에서 필연적으로 형성되는 사회주의에 대하여 그 과학적 사고는 세계철학사에서는 모든 것은 변한다는 이론의 한계로서 소멸과 생성의 역사유물론적인 측면에서도 다른 철학적 방법론에서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소멸이 전제라는 겁니다.
하지만 역사의 전개에서 감성의 측면만으로 모든 이론은 회색이라고 규정하면 변한다는 것은 종교적인 신앙일 뿐 이론의 절대화가 물신화 되어 그것에 대한 신앙적 문제를 비판적이지는 못하다는 겁니다.
그럼으로 역사의 전개에서 세계사적 한국사회의 구성과 성격은 감성만으로 과학적이론을 폄하 할수는 없습니다.
사회주의자든 어떤 정치주의자든 감성적인 측면으로 마음에 따라서 자신의 대의도 있겠지만 정치란 세계(역사적 철학적 존재와 관계의 실제)에서 과학적 인식을 행위의 소신으로 부정할수는 없습니다.
이런면에서 토론을 보면 그 토론을 전개하는 사람들이 진보진영의 실천적 이론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 이지요 하지만 서로의 문제인식들을 정치과제의 동일화에 대하여 제대로 문제인식을 하고 있지 못합니다.
즉 서양의 정치발전사에서 우리의 자본주의 정도로 볼때도 철학의 인식이 심화되지 못한 측면도 있다고 봅니다.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주장하는 옳은 정치이념도 현재의 정치현실의 동학에서 보면 진보정당의 정치결과는 선거나 그 무엇에서도 대중의 고착화된 그 벽을 넘어서는 문제인식이 들 벼리되었다고 볼수 있겠습니다.
또한 하나의 진보정권을 창출하는 과정이 어떤 정치이념(자유주의적)이 마치 균형이론 처럼 서양과 동양을 넘어서는 과학과 영성(종교적 감성?)으로 세계를 인식한다면서도 진보진영의 정권 창출에 대한 사고가 인간의 철학적인 면보다 수단의 도구 디자인의 측면으로 진보진영의 대중적 한계를 수학적 결과를 말합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위험한 이명박의 아류로 볼수도 있습니다.
그럼으로 "투표로 복수하자"는 단순한 감성이 그 이면의 철학적 역사적 세계에서 고민하고 그들이 서세동점의 제국사적인 인식을 극복하였다고 하면서도 정치의 외연은 아이러니 하지 않을수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대중투쟁 역시도 제도권과 직접민주주의가 전체 정치일정과 현재의 정치지형을 과학적으로 사고하기 보다는 노동부문의 단면의 측면으로 어떤 노동이슈로 한국사회를 변혁과제를 사고하는 것은 이것도 모험적이지 않겠는가?
내년에는 진보진영의 정치투쟁의 중요한 갈림길 입니다.
드러난 문제에서 잘 정리하여 서민의 생존과 민주주의 위기에 희망이 되는 진보정치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겁니다.
감성을 위한 "비합리적인"것은 어떤 이론을 절대화 하는 것에 대한 합리적 문제인식이라고 봅니다.그렇다고 이러한 문제인식을 하지 못하고 감성속으로 투항 한다면 그것은 우려스러운 것이 아닐수 없습니다.
구조주의와 해체주의에 대한 진정한 소통을 위한
철학적 문제인식,"사유하는 도덕경"이 책이 괜찮은 것 같습니다.
앙겔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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ㅜㅜ 감동적입니다ㅜㅜ강아래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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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작정하고 글을 쓰셨는데.. 저는 님의 글을 자세히는 모르겠군요.. 그리고 저는 사회과학이 갖는 범주를 폄하 한적이 없었습니다. 그럴 생각도 없구요. 단지 나는 더이상 내가 아는 사회과학과 철학으로는 세상을 바꾸는데 한계가 느껴져서, 보다 다 깊은 성찰을 하고 있는 중이랍니다.강 아래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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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개해주신 책은 기회가 닿으면 읽어보도록 하지요.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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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버션을 몰라서 컨버세이션을 쳐 보았죠단어의 의미는 너무 달랐습니다.
회심(마음바꿈)과 대화는 단어의 의미가 너무 다르죠
객관의 세계와 주체적인 마음은 회심의 개념에 따라서 변화의 의미는 너무도 다르게 됩니다.
그럼으로 코드 역시 감성에 대함은 서로가 인식의 상태가 다를 겁니다.
아마도 철학사에서 철학이 관념적 역사의 구성물이 아니고 지금 여기서 구체적으로 작동하는 지혜라면 지혜는 과학적 이론도 감성도 세계에서 분리할수 없다고 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철학의 인식론의 방법에서는 감성이 객관에 대한 이론의 구성물 보다 우선 한다면 그래서 감성으로 느낌으로 자신의 마음씀에 따라서 객관의 세계는 달리인식 될수 있다고 볼수는 있습니다.
문학이나 영화를 볼때 전 역사의 사실에 대한 문학이나 영화를 본적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빨치산의 문학이 한때 유행 하였고 영화도 그랬다고 봅니다.
그러나 문학과 영화수단을 떠나서 이것은 엄연한 역사의 사실이고 오늘의 이데올로기에서도 사회구성원들이 이러한 사실에서 자유로울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그때의 역사의 격동기 변혁의 공간에서 사회주의를 이론적으로 자신의 삶의 지혜로서 정립하여 살았던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역사의 공간에서 현실과 평론의 구성은 생동함에서 전혀 다른 것이라고 봅니다.
현실에서 사회주의론을 과학적 사고로 정립하지 못하며 단지 정의와 진실 인간의 휴머니티로 죽어간 사회주의자도 있었다고 봅니다.
그들을 감성적으로 신앙화 해버리면 3가지의 ? 의문부호에서는 하나가 되겠지요
이론적으로 평론적으로 이해할수 없습니다.
나의 경험적 인식론으로 말하자면 자본론(자본-)도 삶의 훌륭한 좌표가 되었습니다.물론 그것은 노동의 현실에서 노동법과 그 체계와 구체와 추상의 노동법의 산물에 대한 철학의 바탕은 자본론을 보면 임금 노동시간 노동력이 상품가치 구성에서 드러납니다.즉 상품가치 구성에서 근로기준법의 각 조항들과 체계가 자본론 속에서 등식화 되는 노동부의 실무가 다들어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임금의 문제로 산재의 문제로 그외 여러가지의 근로기준의 문제로 노동법의 해설의 수수께끼가 자본론 안에 있다는 겁니다.
지본론을 알면 한국사회의 현실에서 나의 사회적 처지 노동의 처지가 한 눈에 보입니다.그러나 이것을 투쟁의 도구화 하면 자유주의적 노동법이나 사회주의적 노동법이 수단에서는 같을 겁니다.하지만 법철학의 구성에서는 인간과 사회 그리고 노동에 대한 가치구성이 철저하게 인식이 다르게 될 것입니다.그럼으로 자본론은 자본주의 역사를 분석하는 것만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자본이 노동을 착취하는 계급적 인식을 넘어서는 우리의 인간존중과 홍익사상,나아가서 서양의 인간해방의 철학의 깨달음도 그 속에서 드러 납니다.
자본론은 독서할때 모두가 다 진실을 회피할수 없는 불교적인 측면의 화두가 주어질 겁니다.인간의 삶이 무엇이냐고 물을때 나의 행위와 살아온 삶에 대하여 반성하고 성찰하게 됩니다.여기서 나의 사회적 처지에 대한 마음과 생각은 바뀝니다.
교회에서,절에서,성당에서 도덕이란 하늘높은 곳에서 마음 깊은 곳에서 이것들과 단절하며 지금까지 비인간적인 내가 회심하는 인간이 됩니다.
이 대목에서 너무 감성적인 비합리적인 상태가 되는군요
강에서 강아래로 더욱 감성이 깊어 지기도 하는것 같습니다.
단증하자면 모든 이론이 다 회색일수는 없습니다.
회색의 의미는 부정적이지만 긍정적입니다.
변한다는 사실이 존재와 관계의 실재들의 세계지만 변하는 그것이 이론을 구성하고 반영하고 해체하기도 합니다만 그것의 개념적 어떤 이론을 절대화 해서는 안됩니다.그것은 신앙이겠지요 그런점에서 맑스도 사회민주주의자 이지 사회주의 과학론의 교주가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는 때로 목숨도 결단 할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진실이겠지요
진실은 진심이 발동할때 일 겁니다.
물론 마음이지요
그러나 이것을 감성이라고 분노라고 해서 인간의 이성보다 우위의 개념은 아니라고 봅니다.
로고스와 필은 하나라고 봅니다.
강아래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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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저는 막스를 교주로 생각한적은 별로 없는것 같은데.. 왜 제가 막스를 교주로 생각한다고 생각하나요? .. 여전히 저는 사회분석의 방법으로 유물변증(크게 보아)을 사용 합니다. 아직 더 좋은 방법을 알지를 못하기 때문에요..요즘은 이성은 인간의 감정속에 한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비합리를 공부하는 것이구요.. 간단히 말해 신들의 싸움속에 들어간다고나 할까...
참고로 저는 약간 내공이 있는 무신론자랍니다.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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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종교가 없지만 신부님과 수녀님 스님들을 존경 합니다.그리스도 안에서 부처님 안에서
그들의 실천은 무신론자들의 귀감이 아닌가 생각되어 집니다.
용산참사와 관련하여 보더라도 최후로 남은자는 그들 입니다.
아마도 가난한자와 힘없는자들을 위해 그 고통을 부여잡고 자신들이 그 고통을 나눔니다.
현장에서 그분들의 강론이나 사회평을 들어보면 그들의 삶과 말이 말속에서 빈틈이 없습니다.그것이 두렵고 무한한 신뢰의 권위가 마음에서 들릴때가 있었습니다.
그럼으로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는 사회의 어떤 무신론의 이념의 힘의 권위보다 더욱 진실합니다.
"어둠속에 빛을"
그것은 남일당이 어둠이지겠지만 사실은 빛이라는 겁니다.그러면 어둠은 어딥니까?그 어둠의 대상이 타도의 대상이 아니라 그들은 용서의 화해의 빛으로 어둠을 밝게 한다는 겁니다.
현실은 아니지요 어둠의 세력이 그분들의 진실을 외면하고 마치 용산이 어둠인 것처럼 보입니다.
아마도 사회정치권력은 지금의 어둠의 세력 정치권력에게 심판을 할 겁니다.
이것은 사필귀정입니다.
그때에 그들을 위해서 포용하는 이 누가 있겠습니까?
바로 종교이며 신부와 수녀님 스님들 이십니다.
이해할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거죠
또한 종교의 현실은 어둠의 세력과 야합한 현실이라고 말할수도 있습니다.
이런 복잡한 사회 현실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해야 하는 겁니다.
이전에는 종교를 부정적으로만 바라 보았는데 종교가 소중하다고 생각 합니다.그럼으로 유신론자의 각자의 자유를 더욱 존중하는 우리사회가 되어야 할 거라고 생각 합니다.
강 아래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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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렇게 생각하시는 군요...일리가 있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