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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몸이 떨어져 있으면 마음도 떠난다고...
대전 뜬 지가 얼마 되었다고... 내가 너무나도 과하게 생각하는건가?
그냥... 섭섭함을 떠나서 갑자기 가슴이 멍하고 심장이 멈추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4년이 넘는 시간동안 내가 고작 그것 밖에 안된건지도...
9월 17일 서울로 올라왔으니, 어제로 2개월 하고 3일이 지났다.
어제 문득 내 생각과 행동, 언행에 있어서 내가 까칠해져 가고 있음을 느꼈다...
머리가 다시금 아프기 시작했다. 감정 제어가 안된다...
그냥 모든게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콜텍/하이텍 농성장에 다시 찾았다. 벌써 올라간지 25일째이며, 단식 14일차다.
'자주 가봐야지' 하면서도 이런저런 업무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미안한 일이다.
지난주에 가고 어느덧 열흘째 만에 가보는 것 같다. 참 미안하다...
그래도 콜텍 사무국장님은 환한 얼굴로 나를 반겨 주시니 이들은 참으로 정겨운 분들이다.
오늘부터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에는 문화인들의 작은 음악회를 연단다. 첫날이어서 그런지 한 20여분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가수들의 잔잔한 음악은 매일같이 전쟁같은 삶을 살아가는 콜텍/하이텍 동지들이나 나나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는 것 같다. 그 속에 담긴 가사 속에서 웃음과 기운을 얻기도 하고 말이다. 방식은 다르지만 그들도 또한 나름 이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분들이겠다.
음악과 투쟁발언이 번갈아 진행되었다. 그 중에 하이텍 동지 한 분이 '우리는 아마도 금속에서 왕따 인가 봐요. 알고는 있지만 너무나 힘드네요' 하면서 울음을 떠트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서러웠을까? 21년동안 일한 일터에서 어느날 나가라고 했을때, 그리고 그동안 동료들을 생각하면서 딴 생각을 않고 이제껏 열심히 투쟁을 해왔는데... 금속노조에서조차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니...
곳곳에서 울음이 터졌다. 아프다...
노래공연을 마치고 마지막 투쟁영상물을 상영했다. 지난 2005년 충청지역에서 참으로 열심히 결합한 하이닉스매그나칩 지회 투쟁이다.
예전에도 몇번 봤던 영상물을 보자니 마음이 울컥했다. '참 열심히 가열차게 싸웠는데...'
2005년 5월 1일 노동절 당시 영상을 보니 기분이 새롭다. 그때 공장안으로 진격해서 참 많이 다치고 연행되었는데... 나도 그때 참 많이 얻어맞고 연행되었었는데... 그땐 지역동지들이 정말 하나같이 싸우고 말이다... 결국은 진 싸움이지만... 그때의 분노와 아픔은 지금 여기 양화대교에서 여전히 이어지고 있으니 참 기분이 묘하다.
대우자판 동지들로 보이는 분들이 처음 본 영상물인지 역시나 눈물 소리가 난다. 굳이 돌아볼 필요없이 느껴진다... 그들도 현재 그렇게 싸우고 있을니...
다행이도 날이 차갑지 않아서 좋다고 했는데... 위에 있는 동지들은 얼마나 추울지... 힘내시길...
9월 17일 서울로 발령나서 한 동안 작성하지 못했다가 오랜만에 글을 써서
10월 22일에 미디어충청(www.cmedia.or.kr)에 올린 [글쎄…8] 이다...
오늘 오전에 한 선배와 이야기를 나눴다.
내 개인적으로는 참 감사하고 좋은 선배다. 그 선배로부터 나는 비정규직운동을 그리고 대전을 선택했다.
오늘 선배가 내게 질문을 했다. "왜? 비정규직 운동을 하느냐?" "비정규직 운동이 안되는 이유는?" 등등...
선배의 그런 질문이 내겐 낯설게 느껴졌다. 단지 '해야되니까!" 하는 생각이외에는 다른 생각을 해보질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려웠다. 이래저래 이야기를 했지만 선배에게는 그다지 원하는 답이 안될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 그렇다. 종종 "운동을 왜 해?" 라고 묻는 선, 후배들이 있는데 그럴때마다 난 곤혹스럽다.
"아무도 안 하니까" 그게 답이다. 굳이 다른 답이라면 "이것 밖에 할 줄 몰라서...^^"
그냥 그래왔다. 내게 지금 하고있는 학비 일도 아무도 안 하기에 하는것 뿐이다.
선배랑 이야기를 나누면서 왠지 내게 지난 4년간의 활동에서 너무 계획적이지도 혹은 목표가 불분명했던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뚜렷이 뭔가 족적을 남긴것도 아니고... 그냥 그렇게 시간을 보낸것 같다는 생각이 나를 엄습해왔다.
그래서 가끔 그 선배가 좋다. 내가 혹시라도 잊고 있거나 생각지 못한 부분을 일깨워져서....
내 성격상 당분간 고민을 해야할 것 같다. "비정규직 운동을 왜 하는가?"
2008-01-29
아주 어릴 적 어머니는 당신을 품에 안고 책을 읽어주셨을 것이다. 조금 더 커서 걸어 다닐 수 있을 때에는 시골집 화롯불 옆에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군고구마를 구우면서 “옛날 옛날에…” 하면서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신 기억이 있을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 부모님이 사주신 동화책을 읽고, 동화 속 세계에 빠져 꿈꾸던 추억들이 있을 것이다.
뜬금없이 왠 동화 이야기냐고? 지금 우리가 아이도 아니고, 무슨 놈의 얼어죽을 동화 속 이야기를 하냐고 묻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우리는 어릴적 어른들이 들려준 외국동화 또는 전래동화를 그저 들어왔을 뿐이다. 우리가 들은 동화 속 주인공은 항상 예쁘고, 멋있고, 착하고, 내용은 늘 권선징악(勸善懲惡), 고진감래(苦盡甘來)등의 교훈적 내용이다. 그 동화 속 이야기 작자가 누구인지는 우리에겐 별로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다. 우린 그냥 그렇게 들었고 읽었을 뿐이다.
그러나 현실은 결코 동화 속과 같지 않다. 어릴 적 꿈과 현실은 극명하게 다르다는 것을 아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진 않는다.
90년대 초 독일에서는 역사학, 문학, 사회철학 등의 분야의 사람들이 동화를 재해석하고 원본을 재구성하는 등 동화를 새로 읽는 운동을 시작했다. 독일의 사회철학자인 ‘이링 페처(Iring Fetscher)’의 말에 의하면, “서양에서 동화의 의미는 원래 민중들의 ‘아주 의미있는 기별’이나 혹은 정보를 의미하는 것”이라 한다. 차츰 민중들 사이에서 의사소통이 활발해지면서 지배계급에 대한 비판의식이 생기게 되자, 당시 봉건지배계급들이 위기의식을 가져 의사소통을 막기 위해 탄압을 했다. 그로 인하여 차츰 백성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는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이링 페처 : 1922년 독일 넥카 강변에서 태어나 튀빙겐과 파리에서 철학, 역사, 문학을 공부하고 현재 프랑크푸르트대학 정치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이후에도 이러한 물꼬는 이어졌으나 지배계급의 탄압에 굴복하게 되었고, 그나마 복원된 것(18,19세기)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림형제, 안데르센’ 같은 사람들에 의해 현재의 내용으로 전달되고 있는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던 동화의 원래 내용은 어땠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공주이야기 중에 특히 잘 알려져 있는 백설공주의 원래 이야기를 독일의 사회철학자인 이링 페처가 찾아낸 이야기로 소개한다.
옛날에 백설공주라고 불리우는 그림같이 예쁘고 착한 소녀가 양천의 성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소녀의 머리는 까맣고, 뺨은 눈처럼 희고, 입술은 핏빛처럼 빨갛습니다. 공주는 어느 날 아버지가 군대를 동원하여 백성들을 살해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궁궐의 모든 부귀영화가 백성들의 가난과 고된 노동을 통해 얻어진다는 것을 알고부터는 마음 속 깊이 슬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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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여러분들의 느낌은 어떤가? 우리가 알고 있는 백설공주와는 전혀 다르지 않은가.
이링 페처가 전하는 백설공주의 원래 이야기는 시민혁명 전후에 백성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혁명가 이야기 혹은 민중봉기적 이야기였다.
어떤 이들은 ‘동화는 동화일 뿐이야. 너무 현실에 접목시키지 마!’ 라고 할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백설공주는 너무나도 황당하지 않은가? 난장이에 의해 삶을 의존하고, 결말에서는 독약이 든 사과를 먹고 죽었는데 지나가던 왕자가 키스해서 살아났다?
그럼 왜 백설공주 이야기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로 둔갑한 것일까? 그건 아마도 당시 지배계급이 민중들이 정치적으로 불만 제기 또는 이야기 전달로 반란을 꿈꾸던 이들을 탄압하기 위해서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지배계급들에 의해 수정된 백설공주 등의 공주이야기는 현재에도 전달되어 ‘여자는 늘 약하고, 남자는 용맹하며, 어려울 때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나 새로운 삶을 얻는다’ 로 완전하게 탈바꿈 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봉건과 반봉건 그리고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과의 대립이야기인 백설공주의 이야기를 현재 우리 안방 드라마의 가장 기본적 이야기 틀 구성으로 대중들에게 전달되고 있으며, 이 시대 다수의 여성들은 내일의 ‘신데렐라’가 되기 위해서 성형하고 연예인을 꿈꾸고 있다. 또한 자본주의는 철저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고 있고 말이다.
그저 허무맹랑한 내용의 동화가 아닌, 현실을 바로 볼 수 있게 하면서 고민하고 새로운 사회를 꿈꾸게 하는 동화, 그것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꿈을 실어주는 우리들이 새로 해야 할 작업이 아닐까. 그 누가 알았겠는가? 백설공주가 혁명가였다는 사실을……
독일의 철학자 이링 페처처럼 자신의 아이들에게 들려줄 동화를 찾다가 이러한 동화 원작을 찾게 되었고, 바꿔 읽는 동화놀이를 한 것처럼, 이번 방학기간동안 아이들과 함께 기존의 동화를 새롭게 재구성해보면 어떠련지...
노래는 노가바(노래가사바꾸기)하면서, 이야기는 안 되겠는가...
* 참조 : 누가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깨웠는가? (이링 페처. 1991. 철학과 현실사)
2008-02-26 03시02분
옛날에 빨간 머리를 가진 꼬마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아이를 집에서나 동네에서나 학교에서도 ‘빨간 머리 소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동네에는 이 아이 외에는 빨간 머리를 가진 사람이 없었고, 또 사람들은 다른 종류의 사람들을 아무 이유도 없이 싫어하고 배척하였기 때문에, 소년은 아무런 기쁨도 없고 따돌림 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들의 학교성적 때문에 만족하지 못한 아버지는 소년을 욕하고 벌써 몇 번 때리기까지 했습니다. 어머니는 따돌림 느낌을 받지 않게 여동생에게 빨간 모자를 만들어주며 ‘빨간모자 소녀’ 라고 불렀지만 별 도움은 안됐습니다. 소년은 숲으로 가서 동물들과 노는 꿈을 꾸고는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소년은 늦게 일어났기 때문에 학교에 가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집에서 보이지 않는 곳까지 오자 소년은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덩굴 속을 헤치고 더 이상 갈 수 없는 데까지 왔을 때였습니다. 늑대가 나타나서는 소년에게 친절하게 말을 걸어서 같이 맛있는 딸기를 따면 나중에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둘은 산딸기를 땄고, 점심때쯤에는 세 바구니가 싱싱한 산딸기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자 늑대는 말했습니다. “얘야, 바구니 두 개를 넝쿨로 같이 묶어서 내 등 위에 걸면 너는 바구니 한 개만 들고 가면 된다. 그러면 훨씬 빨리 집에 갈 수 있을거야” 기쁨에 가득 차서 소년은 늑대와 함께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소년은 학교도, 동네도, 친구들도 모두 잊어버렸습니다. 이렇게 딸기를 따 가지고 왔으니 얼마나 자 기를 환영할까 하고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있었습니다. 늑대도 사람들이 자기를 칭찬하고, 고마워할 것이라는 생각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전혀 다른 일이 벌어졌습니다. 소년의 아버지는 그 동안 아이가 학교에 안 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들이 늑대와 나란히 평안하게 오는 것을 보자 아버지는 분통이 끓어 올랐습니다. 아버지는 커다란 막대기로 늑대의 예민한 주둥이를 내리치자, 늑대는 캐캥거리며 도망가버렸습니다. 소년은 벌로 매를 맞고 방 안에 갇혔습니다. 다음 날 동생과 함께 할머니에게 떡과 포도주를 갖다 드릴 수도 없었습니다. |
방금 소개한 글은 ‘빨간모자 소녀’ 동화의 앞부분이다. 놀랍게도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빨간머리 소녀’는 그림형제가 소개해서 현재까지 전해지는 동화인 것이다. 그동안 여러분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앞부분의 내용을 모른 채, 그림형제로 인하여 뒷부분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필자가 ‘빨간모자 소녀’ 동화원본의 앞부분을 소개하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동화 속에 감추어진 인간의 잔혹함이다. 그럼, 이 글을 읽는 독자는 왜 그림형제의 ‘빨간모자 소녀’ 앞부분이 소개되지 않았나 하고 의구심을 가질지 모른다.
소개한 동화원본에서 빨간모자 소년은 늑대와 같이 딸기를 딴다. 그리고 소년과 늑대는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할까?” 하고 즐거워한다. 늑대는 소년의 짐을 들어주는 친절함도 보인다. 이렇듯 늑대는 사악한 존재가 아님을 동화원본에서는 소개한다. 최소한 적은 아님을 동화원본에서는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소년의 아버지는 분노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늑대랑 어울렸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막대기로 늑대의 예민한 주둥이를 내리치고 쫒아버린다. 늑대는 무척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며, 화가 났을것이다. 그래서 그림형제의 ‘빨간모자 소녀’에서 늑대는 복수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빨간모자 소녀에서 늑대의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시길.
늑대는 할머니를 잡아먹고 소녀를 잡아먹고 잠을 잔다. 지나가던 사냥꾼이 늑대임을 알고 가위로 배를 갈라 그 안에 소녀와 할머니가 나왔다는 것은…
그건 단지 늑대의 장난이었을 뿐이다. 애당초 할머니를 잡아먹을 생각이 없었던 것이고, 소녀를 잡아먹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동화라 하더라도 늑대가 잡아먹었는데 할머니랑 소녀가 멀쩡할 수 있는가? 그건 동화원본 앞부분에서 소년의 아버지에게 맞았던 것에 대한 단순한 장난이었을 뿐이지 복수도 아니었다. 그러나 사냥꾼은 가위로 가른 늑대의 배에 돌맹이를 집어넣어 꿰매버린다. 늑대는 배가 무거워 움직이지 못해 결국 죽는다. 결국 사람이 늑대를 죽인다.
과연 독자들은 그림형제의 ‘빨간모자 소녀’ 이야기가 해피엔딩 이라고 생각하는가? 늑대가 사람을 잡아먹는 것은 나쁜 것이고, 사람이 늑대를 죽이는 것은 당연한 일인가.
선입견(先入見). 사물·인물 등에 대해 미리 접한 정보나 자신이 처음 접했을 때 가진 지식이 강력하게 작용하여, 그들 대상에 대해 형성되는 고정적이며 변화하기 어려운 평가 및 견해를 말한다. 이는 곧 늑대는 나쁘고 사악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시키게 하기 위하여, 동화의 전달 과정에서 분명 그림형제에 의해 보수적으로 변질됐을 거다.
그래서 늑대에 대한 정보는 누군가에 의해 공포감으로 포장되어, “늑대가 나타났다~ 늑대가 나타났다~”는 거짓말에 아이가 신나고, 어른들은 공포감에 빠진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라 하겠다.
고정된 관념을 타파하고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우리는 현대사를 통해서 지금도 경험하고 있다. 우리의 고정관념은 우리가 사소하게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는 건 아닌지 한번쯤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참고 - 누가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깨웠는가? (이링페처. 철학과 현실사. 1991)
2008-02-12 09시02분
옛날에 한 소녀가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내가 죽자 재혼했는데, 새어머니는 소녀를 하녀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거만한 의붓언니들이 무도회에 가고 피아노를 치며 연애를 하고 다니는 동안, 소녀는 더러움과 잿더미 속에서 끝도 없이 고되게 일을 해야 했습니다. 얼마 동안 이런 굴욕적이고 고된 생활을 한 뒤에, 소녀는 무엇인가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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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가. ‘혁명가 백설공주’에 이어서 황당한가?
지금의 신데렐라로 변형시킨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아마도 지배계급에게 있어서 대응하는 민중들을 제압하기 위한 수단이 아닐까. 지금도 다수의 노동자들이 자신이 노동자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고 있는데 과거는 어떨까? 거기다가 왕이 지배하는 시대에 민중들이 하나둘씩 모여서 왕의 통치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이에 대해 반란을 꿈꾼다면?
그러기 위해서는 지배계급에게 있어서는 모종의 방치가 필요했을 거다. 우리가 알고 있던 ‘공산당이 싫어요!’ 라고 외치면서 북한 괴뢰군에게 총 맞아 죽었다는 이승복 어린이의 이야기가 당시 박정희 정권이 반공 사상을 심어주기 위해 만든 가상의 이야기였다는 것처럼, 여성은 사회적 지위에서 낮으며, 나약한 존재임을 계속적으로 강조하여, 그저 여성은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는 나약한 존재로 포장한 것이 아니런지...
미국의 저널리스트 콜레트 다울링(Colette Dowling)의 말을 빌리자면, “동화 속 신데렐라처럼 본인 스스로는 자립할 수 없는 여성이 '백마 탄' 왕자님이 나타나서 자신의 인생을 변화시켜 주길 기대하는 심리”를 일종의 신데렐라 콤플렉스라고 설명한다.
오랜 세월동안 누적된 억압과 차별의 벽을 허물고 자립하고 세상과 맞서야 할 때, 오히려 반대적인 생각을 주입시킴으로써 스스로 자기 비하나 열등감에 빠져서 억압과 차별적인 사회요소를 그대로 받아들인 게 아닐까 싶다.
겨울방학이 거의 끝나가고 있는 요즘, 아이들에게 그냥 동화책을 내밀게 아니라 그 속에는 성차별 요소는 없는지 조리요리 살펴보고 새롭게 아이들에게 들려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어릴 적 이런 생각해 본 적 없는가?
예전부터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항상 ‘철수와 영희 그리고 바둑이’로 표기하냐고...
* 참조 - 누가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깨웠는가? (이링 페처. 1991. 철학과 현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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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금욜에 카페 빵의 김영등 대표가 콜트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가져달라고 해서 첨으로 콜트라는 회사를 알게되었어요.(부끄-_-;;)오늘 블로그 글을 보고 좀 더 알게되었네용.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