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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12/26
    이름모를 그대들 고맙습니다. [김진숙 부산본부 지도위원]
    큰붓
  2. 2011/12/23
    김석진동지 힘내세요.
    큰붓

이름모를 그대들 고맙습니다. [김진숙 부산본부 지도위원]

한국사회 올해의 인물 김진숙
목숨 하나 살려야 한다는
그 애절함들이 만든 기적
누가 상상인들 했겠습니까

 

 
» 김진숙씨가 지난 21일 저녁 부산구치소 앞에서 열린 송경동 시인 등 희망버스 참가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촛불문화제에 참석해 목도리를 다시 매고 있다. 크레인 농성 중 트위터로 친구가 된 ‘영도희야’씨가 김진숙씨에게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하고 있다. 부산/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한겨레>는 ‘올해의 인물’로 309일간 고공 크레인 농성을 통해 노동문제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사회적 연대의 소중함을 일깨운 김진숙씨를 선정했다. 그를 만나러 부산에 갔던 ‘희망버스’는 올해 한국 사회가 길어올린 가장 값진 성과물 중 하나다. 김진숙씨가 309일의 크레인농성을 되돌아보고 희망버스 탑승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글을 보내왔다. 국내 분야별 ‘올해의 인물’은 10면에서 만날 수 있다.

영도 바람은 유명하다. 일명 똥바람. 크레인은 24시간 흔들렸고, 바람이 심한 날은 토하기를 여러번. 그렇게 두어 달이 지난 어느날, 거짓말처럼 바람멀미가 멈췄다.

걱정하고 응원하던 수많은 사람들의 박수와 눈물 속에 크레인을 내려와선 땅멀미에 시달렸다.

흔들리는 땅, 갑자기 커진 사람들. 멀찍이만 보이던 사물과 차들이 눈앞에서 번잡을 떠는 어지러움. 이번엔 땅 위에서 토했다.

땅멀미가 웬만큼 가라앉자 방향감각이 문제가 됐고, 엘리베이터를 타는 법도, 계산하는 법도 새로 익혀야 했다. 그러면서 비로소 309일이 만만한 시간들이 아니었음을 깨달아 가고 있다.

힘든 날이 왜 없었겠는가. 그런 날은 크레인 위에 심은 상추, 치커리, 딸기, 방울토마토. 파르르 떠는 그 어린 것들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니들도 힘들지?”

추워서 힘들지 않으냐고, 이 더위를 쇳덩이 위에서 어떻게 견디냐고 사람들은 걱정하고 또 했다.

그러나 정작 힘든 건 사람으로부터 왔다.

끊임없는 강제침탈의 시도들, 한진 자본은 85크레인만 끌어낼 수 있으면 정리해고를 성공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자고 나면 불거지던 공권력 투입설이 시간이 지나면서 구체화되더니 특공대가 84호 크레인을 면밀히 정찰하고 가는 걸로 기정사실화되었다.

그런 움직임들이 트위터를 통해 알려지고, <알자지라>를 시작으로 외신들의 보도가 이어졌다.

‘공’권력으로는 더이상 어찌해볼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동원된 게 ‘사’권력이었다.

6월27일. 공권력의 힘을 빌려 조합원들을 쫓아내고 크레인을 완벽히 접수한 용역들. 그날부터는 매일매일이 전쟁이었다. 크레인을 둘러싼 용역들은 시도 때도 없이 크레인으로 뛰어올라왔고, 그게 여의치 않자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가리기 위해 크레인을 바닷가 쪽으로 끌고 가려는 작전이 매일매일 새롭게 펼쳐졌다.

크레인의 전기는 물론 주변의 전기까지 다 끊어진 깜깜절벽. 몸을 던지겠다는 의사를 행동으로 표현하는 걸로 저들의 시도를 저지할 수밖에 없었다.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하고, 그만 끝내고 싶은 유혹들.

 

그때마다 천사가 파견한 듯한 사람들이 왔다.

서울에서, 인천에서, 수원에서, 대전에서, 광주에서, 전주에서, 목포에서, 청주에서, 충주에서, 마산에서, 울산에서, 진해에서, 제주에서, 독일에서, 영국에서, 핀란드에서, 일본에서, 홍콩에서…. 그 먼 곳에서 달려와 온종일, 혹은 며칠씩 크레인만 바라보던 사람들, 퇴근하자마자 달려와 크레인을 바라보며 밤을 새우던 사람들, 매일 저녁 백배서원을 올리던 사람들. 김여진과 날라리 외부세력이 잉태한 웃음은 희망버스라는 기적을 낳았다.

희망버스가 오지 않았다면, 그리고 희망버스가 한번으로 그쳤다면 2003년의 상황은 반복되었을 것이다.

1월6일 새벽, 크레인에 오르던 순간, 이미 삶과 죽음은 내 선택이 아니었다.

강제침탈의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내가 크레인에서 몸을 던지겠다는 움직임을 보이자 저들은 바로 3, 4도크에 그물을 쳤다.

‘사람 목숨 하나쯤이야’ 할수록 그 목숨 하나를 살려야 한다는 애절함들. 그 애절함으로 만들어낸 희망버스. 희망버스의 모습은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다.

1차 750명이 2차에선 1만명이 되리라고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사람의 얼굴을 겨냥해 뿌려대던 최루액, 색소 섞은 물대포, 그리고 무차별적인 연행과 폭력. 저들도 두려웠던 것이다.

무참할수록 시간의 흐름은 더디다.

그 길었던 밤과 새벽들, 어둠이 주던 공포, 누우면 몸을 펼 수도 없었던 춥고 작은 공간, 아홉 걸음이면 허공에 닿던 좁고 위태로운 난간. 그 좁은 곳에서 일어난 일상치곤 너무나 다양했던 시간들. 매일매일 시시각각이 달랐던 309일. 아무 기약이 없었던 크레인에서 기다림을 가르쳐준 희망버스. 쇳덩어리 위에서도 푸른 잎을 키워낸 바람과 햇살들.

내가 반평생을 싸웠듯 앞으로도 싸움은 이어질 것이다.

해고자들은 복직을 기다리고 있고, 저들은 민주노조를 무력화시킬 복수노조를 꿈꾼다.

재능, 쌍용자동차, 전북고속, 강정 등 희망을 기다리는 곳은 너무나 많다. 그러나 희망버스를 탔던 우리 스스로 놀랐듯이 우린 엄청난 힘을 가진 사람들이다. 희망버스가 가진 가장 큰 힘은 각자 다른 깃발을 들고도 한 버스에 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아닐까.

송경동, 정진우가 출감하는 날, 맘껏 소리지르며 승리를 기뻐하자. 그리고 또다른 승리를 위해 희망을 싣고 달려보자.

2011년 12월22일 김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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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진동지 힘내세요.

아버지 영혼의 올가미, 그리고 가족, 동지

[칼럼] 아버지와 저희 가족이 받는 고통 반복돼서는 안 됩니다


필자
  
지난 2008년 현대미포조선 사내하청 용인기업 30여명의 노동자가 해고기간 5년 3개월 만에 대법원에서 승소해, 판결에 따른 조속한 복직을 요구하는 투쟁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저희 아버지를 비롯한 15명의 정규직 노동자들이 이 투쟁에 함께 연대했습니다.

4개월이나 지속된 연대투쟁은 사내하청노동자들의 전원 정규직 복직 합의로 종결됐습니다. 하지만 투쟁 과정에서는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연대투쟁을 벌였던 현대미포조선 정규직 노동자 15명의 대표였던 저희 아버지(김석진 현대미포조선 현장노동자투쟁위원회 의장)께서 현대중공업 경비대에 집단 심야테러를 당한 것입니다. 도저히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2009년 1월17일 오후 11시 30분경, 오토바이 헬멧으로 복면한 약 50~60명의 현대중공업 경비대는 소화기와 쇠파이프, 각목으로 무장하고 현대중공업 소유의 소각장 옆 인도에 설치된 농성장에 쳐들어와 소화기를 뿌려 앞을 볼 수 없도록 만든 후 아버지를 지목해 집중적으로 테러를 가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으로 후송됐고, 경비대는 농성물품과 수대의 차량을 부수고, 농성장 주변 물품 모두를 불태우고 도주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저희 가족의 참혹한 시련이 시작됐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약 1년간 상해치료를 받았습니다. 정신과 치료도 병행했습니다. 아버지 옆에서 지켜보는 저희 가족에게는 눈으로 보고도 차마 믿기 힘든 사실이었습니다. 거대권력 앞에서 일개 노동자가 아무리 힘없고 약한 존재라고는 하지만 여태껏 보아왔던 그 어떤 탄압보다도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당시 농성장 주변에는 전경차 1대와 30여명의 경찰병력이 배치돼 있었지만 그 누구도 불법테러를 자행하고 있는 현대중공업 경비대를 저지하거나, 현행범으로 체포하지도 않았으며 심야테러 후 몇 시간이 지나서 경비대는 경찰들이 보는 앞에서 승용차 20여대를 나눠 타고 유유히 공장 문을 빠져 나갔습니다.

탄압은 이후에도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현대중공업 경비대와 경찰 권력을 능가하는 정신적인 탄압은 현대중공업과는 관련이 없는 제3의 인물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법원이 저희 아버지에게 명한 업무방해금지가처분으로 인해 제3의 인물들의 소속을 이 글에서 언급을 할 수는 없지만, 저희 가족들을 위협하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자택감시를 하고 외출 시 미행을 하고, 아버지를 비방하는 현수막을 설치하는 등 그들은 입에 담기조차 힘든 수많은 악행들을 자행했습니다. 인권이 중시되는 오늘날 사회에서는 도저히, 상식적으로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비인간적인 악행을 공공연히 자행해 온 것입니다.    

위 사건과 관련해 국회에서는 2009년에 국회 진상조사와 경찰청 국정감사가 열렸고, 2010년에는 울산지방경찰청 국정감사와 2011년에는 노동부 국정감사가 열렸습니다. 이처럼 강력한 사회적 고발과 문제제기가 이루어졌지만 가해자인 현대중공업은 현재까지도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경찰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22일 서울 여의도 한나라당사에 정몽준 의원에게 보내는 항의서한을 접수한 후 일인시위에 나선 필자.


저와 저희 가족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를 향한 거대자본의 말도 안 되는 탄압이 유효하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고, 그 무엇보다 엄정하고 공정해야 할 공권력인 법과 경찰의 도덕의식 부재와 나태함, 권력에의 동조를 보고 겪으며 엄청난 좌절과 실망을 거듭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굳은 결심을 가지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앞이 보이지 않는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 가족은 현대중공업 심야테러사건의 진실을 반드시 밝혀내고 현대중공업과 경찰청에 분명한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몇 년 동안이나 해결되지 않고 있는 이 사건으로 인해 저희 아버지는 극도의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리시며 최근에는 장기적으로 지속된 경찰, 검찰, 법원 조사와 재판, 벌금, 징계, 상해치료, 정신과치료로 인해 취업치료가 불가능해 병가휴직을 내고 병원치료를 받고 계십니다.

저희 어머니 또한 아버지와 함께 투쟁하시다 모 노무관리자에 의해 상해치상을 당해 병원치료를 받는 등 저희 가족의 수난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최근 법원에 의해 저희 어머니에게 상해치상을 가한 노무관리자가 벌금형을 받은 바도 있습니다.

세계적 대기업인 현대중공업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생존권 요구에 심야테러를 가하고 이에 책임을 묻자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제3의 인물들이 나서서 아버지에게 온갖 정신적 탄압을 자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그 연장선으로 개인에 대한 참혹한 탄압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 역시 그 누구도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이 같은 일이 노동현장에서 절대 되풀이돼서는 안 됩니다.

투쟁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최근 12월 울산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대중공업경비대 심야테러 문제 해결을 위한 울산시민대책위원회'를 준비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대책위원회가 구성되면 3년간 서울과 울산을 오가며 외롭게 싸워 오신 아버지와 어머니 저희 가족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희망이 될 것입니다. 잘못된 사실은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 사회 노동현장의 현실이며 제대로 해결되지 않을 경우 노동현장은 점점 더 암흑이 되어 갈 것입니다. 이제는 단결한 노동자의 힘을 보여줘야 할 때입니다. 주체적이고 당당하게 불의 앞에서 맞서는 노동자야말로 진정한 노동자의 모습일 것이며 우리 사회의 미래를 밝혀줄 전구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울산지역과 전국에 계시는 많은 노동자분들의 연대와 지지를 호소합니다.
  
[울산노동뉴스]  김소연(성공회대 학생) / 2011-12-22 오후 8:5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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