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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2/20
    정신과 의사로서의 자괴감
    내맴
  2. 2008/02/20
    새로운 유형의 노이로제 환자들.
    내맴
  3. 2008/02/20
    2008/02/20
    내맴

정신과 의사로서의 자괴감

정신과 의사로서의 자괴감

봄이었나 싶더니 어느새 초여름의 문턱에 들어선 느낌이다.
해마다 목련꽃이 질 무렵이면 생각나는 환자가 있다.
전공과 상관없이 모든 의사는 치료가 잘된 환자도 잘 기억하겠지만 그보다는 삶을 달리하게 된 환자들을 잘 잊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주치의를 맡은 것은 전공의(레지던트) 1년차 시절이었으니까 실력은 없었지만 정말 열의 하나만은 대단했던 시절이었다.

그녀는 결혼한 주부임에도 상태가 악화되면 미스코리아 대회를 나간다고 살림을 하지 않는 증상이 있었다. 게다가 피아노를 배우면 키가 커져 미스코리아에 당선이 될 거라는 망상을 지닌 만성 정신분열병 환자였다. 그녀의 남편은 가난한데다가 나이도 많은 노총각이었다가 그녀를 만나 결혼했는데 자신에게는 너무 과분한 여자라고 여기며 오랜 병치레에도 전혀 지쳐 하는 모습이 없었다.

그는 면회시간마다 아직 증상이 가시지 않은 그녀에게 갖은 수모를 다 당하면서도 수시로 병원을 찾아왔다. 나는 남편을 그렇게 대하는 그녀를 보고 나도 몰래 미운 감정까지 들었는지 그녀를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계속 항정신병 약물을 올리고 수시로 면담실로 불러 강요에 가까운 일방적인 상담을 진행했다. 그녀의 망상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하나하나 따지고 그녀의 남편이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아느냐며 이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서서히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망상은 찾기 힘들게 되었고 남편에 대한 공격적 태도도 누그러졌다. 하지만 그녀는 점차 말수를 잃어갔고 어느날 부터인가 병든 정신으로 살아가는게 싫고 자신이 죽음으로써 친정식구들과 남편이 편해질거라며 강한 자살에의 집착을 보였다.

한동안 치료를 해서 그러한 우울감이 가시자 퇴원을 했는데 우려했던 대로 통원치료는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몇 개월 지나 목련이 송이채 뚝뚝 떨어질 무렵, 그녀의 남편이 찾아와 그녀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전해주고 힘없이 떠나갔다.

그 소식을 접한 후로 나는 한동안 자괴감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그리고, 섣부른 열정만으로는 환자를 치료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을 뿐더러 오히려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정신병환자가 가지고 있는 망상은 어찌보면 낭떠러지 같은 현실에서 위험하지만 그를 떨어지지 않게 붙잡아주는 썩은 동아줄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환자의 경우 그 썩은 줄만이 유일한 선택이고 삶의 위안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튼튼한 동아줄을 줄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채 썩은 동아줄만을 싹둑 잘라버린 셈이다.

오늘도 내 진료실 안에서는 은밀하고 기괴한 망상들이 떠돌아다닌다.
나는 그런 망상을 깨뜨리는 석공이 아니라 망상 속에 담긴 삶의 에너지를 좀더 건강한 형태의 에너지로 바꾸려는 연금술사가 되려고 노력한다.

-2004년 봄, 태능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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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유형의 노이로제 환자들.

“정신 분석가들은 이전보다 자주, 주로 관심의 상실과 주체성의 결여라는 특징을 지닌 새로운 유형의 노이로제 환자를 대하게 된다는 보고를 하고 있다. 정신과 의사는 자주 삶이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의문을 가진 환자를 만난다. 나는 이러한 상태를 <실존적 공허>라고 부른다.... (중략)... 나는 프로이드가 보나파르트 공작부인에게 보내 편지 속에서 ‘사람은 삶의 의미나 가치에 의문을 가질 때 그 사람은 병이 든 것이다.’라는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 나는 오히려 삶에 의문을 가진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인간임을 입증한 자라고 생각한다.”
 

- 빅터 프랭클 <심리요법과 현대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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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정신과 의원을 오픈한지 한달 반이 넘었습니다. 3년 전 개원의사로 지낼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을 받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사람들이 병원에 가지고 오는 문제들이 많이 다르다는 느낌입니다. 물론 지역적인 특성이나 책의 영향도 있겠지만 지금 병원을 찾는 사람들은 딱히 정신과 환자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고 싶은 것이 없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왜 살아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직장생활의 의미가 없다!’ 등 실존적 공허감과 삶의 방향성 부재에 따른 문제를 많이 호소합니다. 실제로 그들의 문제를 잘 표현해줄 수 있는 적절한 진단명도 없습니다. 물론 우울감이나 과도한 걱정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우울증'이나 '불안장애'라고 진단내릴 수도 없지 않습니까?   

   
저는 한동안 프로이드 외에 다른 정신분석가들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몰랐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프로이드의 이론만으로 제 삶의 문제가 잘 이해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기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고 해서 ‘실존적 공허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뒤늦게 저는 다른 정신의학자들과 심리학자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의미와 가치를 찾아가는 인간의 행위를 내적 갈등에 대한 방어기제로만 바라보는 것은 지나치게 편협한 시각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깨달음을 기초로 저는 심리상담과 자기계발이라는 두 분야의 일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앞으로 많은 정신과 의사들이 현 정신의학적 진단체계로는 정의내리기 어려운 사람들을 더 많이 마주할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정신의학은 정신의 병리현상에 대한 관심만이 아니라 인간의 다채로운 정신에 대해 보다 폭넓은 접근이 이루어질 것이라 봅니다.  
 
존재에 대한 의문, 삶의 의미에의 탐색, 자기실현에의 지향성, 생산적인 삶에 대한 도전과 열정... 이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존중되어져야 할 인간만이 지닌  종적 특성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렇다면 한편으로 우울이나 불안때문에 삶의 무의미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현실때문에 우리가 우울이나 불안에 시달리는 것은 아닐까요?
 

- 2007. 6. 7 週 2회 '당신의 삶을 깨우는' 문요한의 Energy Plus [10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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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20

'고통을 치유하는 것은 고통을 철저히 경험하는 수밖에 없다!'는 말이 과연 지금 이 시점에서 보물섬 님의 마음에 다가갈 수 있을까요? 통과할 수 밖에 없겠지요. 통과하지 않으면 더 커지고 길어질뿐이겠지요. 통과하면서 고통에 담긴 의미와 반복되는 대인관계의 패턴을 알게된다면 그것은 고통이 주는 선물이겠지요.

혼자 힘으로 감내하기 어려우면 제가 운영하는 '더나은 삶 정신과'를 찾으셔도 좋습니다.
541-7771로 연락주시거나 www.mentaltraining.co.kr로 들어오셔서 예약하실 수 있습니다.
2007-05-02 19:31:53

 

뒷산에서 길을 잃다
 
우습지 않은가
뒷산에서 길을 잃다니
눈 아래로 낯익은 얼굴들이 빤히 보이는데
한 달에 몇 번씩 오르는 뒷산에서
물통을 두고 온 약수터를 찿지 못해
두시간씩 세 시간씩 오르내리는 꼴이라니
더 우스운 사실은
그곳에서 만난 사람 누구도
길을 모르더라는 사실이지
-그냥 길을 따라 걷고 있을 뿐이더라구
약수터에 두고 온 때 낀 물통만 아니었다면
그들처럼 그냥 길을 따라 걸으련만
차마 손타고 물때 낀 물통을 포기할 순 없더군
자네도 길을 잃어보게
뒷산에서 길을 잃었다고 말할 수 있는지
약수터에 두고온 물통을 포기할 수 있는지
우습지 않은가
뒷산에서 길을 잃다니
 
              - 곽효환  시집 <인디오 여인> 중에서 -
 
 
 
낯선 곳에서 길을 잃는 것은 길을 잃는 것이 아니다.
모르는 길을 어떻게 잃을 수 있는가. 가장 두려운 것은
`아는 길을 잃는 것`이다. 아니, `안다고 착각하던 길`을
잃는 것이다. 나는 지금 내가 가는 길의 의미를 진정으로
아는가? 혹시 관성으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관성으로 일어나고, 관성으로 출근하고, 관성으로 퇴근하고,
관성으로 숨 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누구라도 어느 날 문득
뒷산에서, 앞산에서, 아니 제 집에서 길을 잃을 수 있다. 그러나
길을 잃을수록 자신이 또렷이 보이는 법이니 길을 잃고 자신을
찿을 것인가, 자신을 잃고 관성의 길을 갈것인가.
- 시인 반칠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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