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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2/25
    [일다펌]무엇을 느끼고 원하는지 알 수 없게된 사람들 (1)
    내맴
  2. 2009/02/12
    일다 기사 중에서(6)
    내맴

[일다펌]무엇을 느끼고 원하는지 알 수 없게된 사람들

두려움과 불안에 대한 ‘방어기제’ 무엇을 느끼고 원하는지 알 수 없게된 사람들 [여성주의 저널 일다] 최현정 지금,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느끼고 있는지 잘 알아차리고 계십니까? 어떤 경우에는 너무나 명확하여 쉽게 알아차리고 그 원하는 바를 해소할 수 있지만, 또 어떤 경우에는 어떻게 해소하느냐의 문제는커녕 무엇을 원하고 느끼는지조차 알아차리기 힘듭니다. 사람에게 경험이 쌓여가고 인생이라는 것이 점점 더 복잡한 의미로 얽혀갈수록, 후자의 경우가 더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왜 우리는 우리가 무얼 느끼고 원하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것일까요? 눈앞에 떡이 하나 놓여있습니다. ‘저걸 먹고 싶다’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점심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배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도 납니다. 맛있게 먹습니다. 배가 고팠던 것이군요. 두 번째 상황입니다. 떡이 있고, 며칠 동안 애인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습니다.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떡을 천천히 씹으면서 지루한 느낌이 들고, 떡을 아무리 많이 씹어 삼켜도 허기짐이 줄지 않는 느낌에 슬픕니다. 배가 고팠던 것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봅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세 번째 상황입니다. 떡이 있고, 며칠 동안 애인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으며, 약속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보기로 한 친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무슨 맛인지도 모를 떡을 점점 격하게 씹고 있습니다. 나는 정말로 배가 고팠던 것일까요? 해결되지 못한 소망은 고스란히 남아 마음을 침식시킨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인생의 그 떡을 그저 먹어버리고 맙니다. 왜 떡을 원했는지, 왜 먹었는지, 잘 모르고서 말입니다. 그리고는 배가 고파서 먹었다고 생각합니다. 배가 고파서 먹은 것이라면 다행입니다. 배고파서 떡을 먹었다면 탈이 날 일이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떡의 맛을 느끼면서 먹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친구를 향한 화 때문이었다면, 혹시 친밀한 관계에 대한 불안이나 공허감이었다면, 아마 떡을 먹다가 체할지도 모릅니다. ‘먹고 싶다’ 아래 놓인 진짜 욕구나 소망을 알아차릴 수 있다면 화나, 불안이나, 공허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텐데요. 물론 불안이나 공허감은 너무나 지독한 감정이기 때문에, 이를 차단하고 이로부터 벗어나고자 애쓰면서 차라리 떡을 꿀꺽꿀꺽 먹는 식으로 대처하는 것이 더 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저 떡을 먹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떡만 먹기 때문에 우리의 불안과 공허감은 끝내 보살핌 받을 수가 없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취하려 할 때, 그 동기는 참으로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는 데는 여러 맥락과 이유가 놓여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 맥락과 이유를 잘 알지 못한다면 우리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 힘들고,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한 채 이를 허투루 다루기 십상입니다. 물론 때로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았는데 해결하는데 필요한 용기나 방법이 부족하여 해결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어찌되었건, 해결되지 못한 소망은 해결될 때까지 우리 안에 남아 자유로움과 창의성을 가로막고 마음을 침식시키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내 욕구를 가리는 행위는 어디서 비롯된 습관일까 아이들은 무엇을 원하고 느끼는지 참 잘 압니다. 아주 솔직하게 느끼고 표현하지요. 천사 같은 모습은 그런 데서 느껴집니다. 그러나 어른이 될수록 점점 무얼 원하는지, 무얼 느끼는지 알아차리기 어려워지지요. 물론 처음부터 느끼고 인식하기 어려워하는 기질을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개는 자라온 환경이나 인생의 큰 사건에 따라 그 능력이 변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욕구를 표현했다가 혼이 났을 수도 있고, 욕구 실현이 금기되는 환경에서 자랐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치명적인 환경에서 자라, 자기 욕구를 인식하고 우선시하는 법을 아예 익히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자기 욕구를 중시하지 않는 누군가로부터 그런 삶의 방식을 배웠을 수도 있고, 욕구를 드러내었다가 처벌받은 어떤 경험으로 인해 ‘욕구를 알아차리면 안 되는 법’을 익히게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충격적인 사건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자기 욕구를 차단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인생에서 어떤 경험이 반복되면서, 혹은 어떤 특별한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서, 특정한 방식으로 자기 내면의 욕구를 가로막는 습관을 키우게 되는 것이지요. 왜 욕구를 가리게 되는 것일까요? 욕구를 가리는 행위란 매우 강력한 어떤 위협이나 불안, 혹은 깊은 상실감을 피하고 감당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존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작동하는 마음의 방패막이자 보호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방어’라고 설명합니다. 방어란 ‘정신분석’이라는 심리학 학파에서 비롯된 개념으로, 정신분석을 만든 프로이트라는 사람이 이러한 특정 심리적 작동기제를 그렇게 설명했습니다. 군사 개념을 통해서 마음의 기제를 은유하기 좋아했던 프로이트가 이러한 작동법을 일컬어 ‘방어기제’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왜 방어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면을 이해하는 일 방어기제는 아주 어렸을 때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되고, 그런 방식이 아주 유용했던 터라 계속 그 방식을 사용하게 되면서 성격으로 굳어갑니다. 어떤 경우에서이든 특정 방어가 우리의 성격으로 자리잡은 이유는 그 당시 그 방어가 필요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어린 시절의 두려움이나 충격적인 상황이 사라진 이후에도 방어가 지속되면서, 내면의 두려움은 점점 방치되고, 우리는 내면의 진실한 욕구를 들여다보지 못한 채 타인과 진정으로 만날 기회를 박탈당하게 되기도 합니다. 누군가가 ‘방어적’일 때, 우리는 그에게 다가가기 쉽지 않습니다. 급기야 매우 왜곡된 방식으로 자기 내면의 어려움을 종식시키려는 결과를 초래하지요. 이를테면 조스트라는 심리학자는, 우리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외면하기 위해서 경제성장이나 부의 축적에 골몰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퀴블러-로스라는 정신의학자는, 몇몇 의료진들이 환자들을 홀대하거나 지나치게 냉정하게 대하는 이유에는 의료진 마음 안에 죽음에 대한 깊은 두려움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남겼지요. 물질적 풍요에 골몰하거나, 냉정함으로 무장하는 것은 두려움에 대한 우리의 방어기제가 발현된 모습 중 하나입니다. 왜 그런 방어가 생기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면, 그의 방어 이면에 놓인 깊은 내면과 만날 기회가 생길 수 있지 않을까요. 여러분은 두려움이나 불안, 상실감을 피하고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서 어떻게 스스로를 방어하고 계십니까. 방어하는 것도 능력이겠거니와, 왜 방어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보다 더 가까워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두려운 나머지 방어하고자 애쓰고, 그 대가로 수많은 희생을 치르게 되기도 하며, 진실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는 것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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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기사 중에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끔찍하다. 처음에 참세상 기사로 이 사건을 접했을 때 일단 들었던 생각은 가해자가 정말 미친 게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위원장이 체포된 다음날..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대체 어떻게?? 도저히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이었다. 내가 어디까지 감정이입을 해야 적절한 것인지 판단이 서질 않는다. 여러가지 글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 날 당시의 상황이 자꾸만 머릿속으로 그려지고 두려운 감정이 앞서게 된다. 나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나를 납득시키기 위해, 내 의견을 꺾어놓기 위해 누군가 나를 저렇게 짓밟으려 할 수도 있다는 건 정말 무서운 일이다. 피해자는 그 상황에서 어떤 기분이었을까. 얼마나 가슴이 답답했을까. 성폭력 사건을 겪으면서 피해자가 고통을 겪는 이유는 더 이상 예전처럼 편안하게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피해자 혼자서 끙끙 앓고 있지는 않을런지 걱정이 되고 마음이 정말 아프다. 노동운동내의 여성활동가들은 이번 일을 통해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 주변에 아는 사람도 별로 없기도 하고 입을 여는 사람도 없고 그래서 답답하고 궁금하다. 난, 솔직히 운동을 그만두고 싶었다. 정말, 변하지 않는구나.. 변하지 않는구나.. 아무리 해도 변하지 않는구나.. 아무리 외쳐도 아무도 변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 때.. 너무나 크고도 깊은 좌절감이 나를 휘감았다. 무릎을 꿇고 엎드려 조용히 울고 싶었다. 실제로 인터넷 기사를 읽으면서 모니터를 앞에 두고 한참을 울었지만. 돈 있으면 여성주의 책이나 한 권 좀 사보던가 100인 위원회 글 한 편이라도 좀 진지하게 읽어볼 것이지 그 동안 우리가 피를 토해내며 뿜어냈던 이야기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얼마 전 한 여성활동가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여성주의적 문제를 부차화하고 자신의 삶을 뿌리째 성찰하지 않는 한 이 운동은 반쪽짜리 밖에 될 수 없을 거라고. 그 말이 현실화될까봐, 정말 맞는 말이 될까봐 사실 너무 두렵다. 뿌리가 뽑혀 나가는 듯한 느낌이다. <일다 기사 중에서>----------------------------------------- 셋째, 가해자 김씨의 성폭력과 강간 미수 행각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입니다. 피해자 측에 따르면 이석행 위원장이 A씨의 자택에서 검거된 바로 다음 날, 대책을 논의하자며 만난 김씨는 귀가한 A씨의 집에 침입해 성추행하고 강간을 여러 차례 시도했다고 합니다. 성폭력은 권력관계를 기반으로 일어나는 범죄이고, 가해자들은 여러 의도에서 범행을 저지릅니다. 상대방에게 수치심을 주기 위해 성폭력을 행하기도 하고, 분풀이로 가해하기도 하며, 입막음을 하거나 자기 수하로 끌어들이기 위한 방편으로 성적 폭력을 휘두르기도 합니다. 이번 사건은 여러 정황을 통해, 후자에 가까울 것이라는 추정을 하게 됩니다. 위원장이 검거된 바로 다음 날이라는 정황도 그렇고, A씨를 설득하고 같은 편으로 포섭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A씨로 하여금 조직을 순순히 믿고 따르도록 회유하는 임무를 띤 가해자 김씨가 어떻게 그 와중에 자신이 설득해야 할 대상인 A씨에게 성폭행을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정치인의 이른바 ‘정치적 스킨십’의 실체를 본 적이 있습니다. 우근민 전 제주도지사의 여성단체장 성추행 사건을 통해, 선거를 앞두고 다른 정당을 지지하는 여성단체의 대표를 자신 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방편으로 성추행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밝혀진 적이 있었습니다. 또 작년에 보도된 ‘스포츠 성폭력의 실태’에서도 지도자(교사)들이 학생들을 자기 선수로 만들기 위해, 다루기 쉽게 하기 위한 일환으로 성폭행을 가하고, 감독교사들끼리 ‘코칭(가르치는)의 수단으로’ 성폭력의 방법을 사용해볼 것을 권하는 얘기도 서슴지 않는 것이 보도된 적이 있었습니다. 여성을 성폭행함으로써 자신과 특별한 관계로 만들고, 무력하게 만들어 순순히 따르도록 하려는 의도인 것입니다. 이는 ‘이상한 개인’의 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정치적 스킨십’이란 한국의 가부장적인 정치문화 속에 자리잡은 것이고, 스포츠 지도자들의 성폭행 역시 교사들 사이 공유되고 전수되는 경험이었습니다. 이처럼 성폭력 예방을 위해서는 성폭력이 일어나는 근본적인 이유부터 제도적인 문제까지 아울러 봐야 합니다. 성폭력 범죄와 사건 은폐의 배경이 된 조직문화 필요할 땐 갈급하게 요청하며 헌신을 요구하고, 공무원 신분이 위협받는 희생을 한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동지로서 의견을 귀담아듣지 않으며, 위원장 검거 이후 대책을 이야기하고 조직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 만난 당일 집으로 찾아가 강간을 시도했던 민주노총 중앙간부의 범죄행위는 여성을 비하하고 동등한 주체로서가 아닌 성적 대상으로, 혹은 도구로 바라보는 조직문화의 연장선 상에 놓여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성폭력 사실이 알려진 다음에도, 민주노총 지도부에서 피해자를 보호하고 도와주지 못한 채 오히려 감시를 하거나 조직을 생각하라고 압력을 넣는 일이 가능한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헌신과 희생을 요구하면서도 운동의 주체로 인정해주지 않는 조직, 도움을 준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는 조직, 동지가 아닌 성적 대상으로 취급하는 조직, 중앙간부로부터 성폭력을 당했음에도 도움이 되어주지 못하는 조직. 이렇게 먼저 신뢰를 저버린 조직에 대해 A씨가 믿음을 가져주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이 의문은 비단 A씨만 아니라 모든 여성들이 이 사건을 통해 갖게 된 의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근본적인 의문에 대해 민주노총은 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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