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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펌]성.인종차별 사회의 다문화정책에서 배제된 이들

한국女-이주男 가족이 말하는 ‘다문화’
성.인종차별 사회의 다문화정책에서 배제된 이들
<여성주의 저널 일다> 정혜실
 
 
[필자 정혜실님은 현재 ‘다문화가족협회’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파키스탄인 남편과 결혼하여 15년간 생활해 온 경험을 토대로, 한국사회의 가부장제와 인종주의의 폐해를 지적하고, 다문화관련 법제도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짚어보는 글을 기고하였습니다. 이 기사는 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편집자 주]
 
1994년 파키스탄에서 결혼식을 올린 후 두 달간의 여행을 마치고 남편과 함께 귀국한 그 첫날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첫날이 바로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공부하고 활동하는 이유가 시작된 날이기 때문이다.
 
김포공항 출입국에서 서남아시아 출신 파키스탄 남성이 바로 한국인여성인 나의 남편이기 때문에, 우린 따로 출입국사무실에 불려가서 여러 가지 질문(?)을 받았다. ‘국가적 위계’와 ‘여성’, ‘인종’, ‘차별’ 등의 생각들이 머리를 어지럽게 스치고 지나갔다.
 
1시간이나 지연된 입국심사에서 화가 나서 “내가 미국사람이랑 결혼해도 이렇게 했겠어요?” 했더니, “아니요” 라는 간단한 대답이 돌아와 기가 막혔다. 비참하고, 뭔가 울컥하는 기분으로 한국에서의 결혼생활은 시작되었다. 그러한 일들은 나와 비슷한 결혼을 선택한 다른 여성들과 경험을 공유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국적 연애와 결혼, 그 자유로움?
 
▲2006년 5월 <이주노동자 축제>  ©외국인이주노동자대책협의회
1990년대 초 이주노동자들이 국내에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정착 기간들이 늘어나자 한국인여성과 연애하고 결혼하는 사람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한국사회엔 전과 다른 국제결혼 양상이 하나 둘 나타났다. 전엔 주로 여성들이 서구국가 출신 남성과 결혼해 한국을 떠나던 것으로 생각해왔는데, 아시아남성과 결혼한 여성들은 한국에서 살고자 했기 때문이다. 가족을 위해 한국에서 경제활동을 할 수밖에 없는 아시아남성의 현실과 맞닿아 있었다.

 
그러나 함께 살기로 결정했다고 해서 그렇게 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외국인남편에게는 반드시 체류할 자격으로 ‘비자’(Visa)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시 국제혼인법은 한국 특유의 ‘부계중심’ 법체계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아무것도 보장해주지 못했다. 외국인아내들의 경우 한국남성과 결혼하면 바로 국적이 부여되었던 반면에 말이다.

 
그나마 받을 수 있는 체류자격은 C-3와 같은 친지나 가족방문 같은 비자로, 3개월 이상 체류할 수 없고 노동도 할 수 없었다. 이마저 불법체류사실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이미 체류기간이 넘은 남편들은 해당 되지 못했다. 또, 3개월이 넘을 때마다 가까운 국외로 나가서 비자를 연장해 올 경제적 형편이 되지 못한 남편들은 결국 불법체류자로 전락했다.

 
한편 자녀들은 외국인등록에 의해 살아야 했고, 한국인으로 살기 위해선 비혼모의 자녀처럼 살아야 했다. 한국인으로 포섭되지 못한 자녀들은 의료혜택도, 교육의 혜택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경제적인 여유가 되어 외국인 투자형식의 법인회사를 설립했던 몇몇 사람들의 경우는, 이러한 결혼관계에서 특권층이나 다름없었다.

 
이주남성과 결혼한 한국여성의 사회적 위치

 
때문에 나의 결혼생활은, 경제적으로 잘 사는 것이 차별에 맞설 수 있는 힘이 된다는 생각에 집중돼, 남편과 함께 정말 열심히 ‘돈’이라는 걸 벌었다. 돈이 많은 걸 해결해주리라는 생각과, 차별에 대해 함께 연대해서 운동을 하기보다는 나 하나 잘살면 된다는 생각이 더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사업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어려워지는 날도 있었다. 그럴 때 돈을 좇아 움직이는 일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깨달았다.

 
그 일은 다행스럽게도 잘 풀렸지만, 1년 이상을 지옥 같은 느낌으로 살면서 새롭게 나와 같은 처지의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결혼 초 ‘도대체 한국에서 여자로 살아간다는 게 뭐지?’ 하고 의문을 품게 만들었던 남성중심의 국가 안에서, 여성인 나를 다시 자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혼인제도’에서의 국제결혼을 한 한국여성의 사회적 위치, 이웃과 살면서 알게 된 남다른 시선, 공적 기관인 법무부출입국이나 대사관 등에서 받았던 차별대우들로 인해, 얼마든지 자유롭게 사랑도 연애도 결혼도 가능하리라 믿었던 마음은 무너졌다. 사실은 일상의 삶을 지배하는 구조, 즉 사회시스템 안에서 철저히 가부장제에 의해 구속 받고 있었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해답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제도적인 변화인 법을 바꾸는 일과, 사람들을 시선을 바꾸어 낼 인식의 변화가 필요했다. 하지만 내가 과연 그 변화의 주체자로 나설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힘을 실어 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찾은 것이 (사)안산이주민센터였고, 또 하나는 여성학이었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변화를 원하는 여성들의 모임인 ‘파키스탄커플모임’을 2000년대 들어와 알게 되었고, 이들과 지금까지 함께 활동해오고 있다.

 
처음에 결혼관련 비자도 없던 시절에 많은 활동가와 당사자 여성들의 노력, 결혼이민자여성에 대한 정책 실시, 그리고 호주제 폐지운동과정에서 국제결혼 관련법제들도 바뀌었다. 이제 F-2라는 비자로, 외국인남편의 체류와 노동이 보장되고, 국적 취득도 보다 쉬워져 체류기간 2년 이상이면 누구나 신청할 수 있게 됐다. 재수까지 해가면서 귀화시험을 봐야 했던 나의 남편과는 달리, 지금 결혼하는 사람들은 귀화시험도 면제된다.

 
이처럼 2009년 현재, 제도상으로 두드러지는 차별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다문화가족지원법’도 생겼는데, 그 법에서 이주남성이든 결혼이민자여성이든 모두 다문화가족으로서 지원받을 수 있다고 하니 말이다.

 
외국남성들로부터 한국여성을 보호한다?

 
▲ 2008년 3월 2일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앞 <미등록 이주아동 교육권 보장>을 위한 서명운동.  ©외국인이주노동자대책협의회 제공
그러나 우리가 2007년에 ‘다문화가족협회’라는 협회를 창립한 이유는, 새로 제정된 ‘다문화가족지원법’을 통해 국가가 어떤 식으로 우리를 배제하고 있는지 알게 됐기 때문이다.

 
‘다문화가족’이라는 법적 정의는 한국인배우자와 결혼한 이주남성이나, 결혼이민자여성, 그리고 그 자녀로 구성된 가족들만으로 제한하고 있다. 이주노동자가족들이나, 난민은 배제된다. 또, 정책시행에서 많은 정부산하기관이나 지원단체들이 사업의 초점을 ‘결혼이민자여성’의 사회통합에 맞추고 있어, 여전히 이주노동자 남성과 결혼하는 여성과 이들의 가정들은 차별을 겪고 있다.

 
국가의 노골적인 차별을 느낄 수 있는 처음단계는 역시 혼인신고와 관련비자발급 단계다. 불법체류자로 있던 남편이 혼인신고를 통해 비자를 받아 한국으로 들어오고자 한다면, ‘비자를 노리고 한 결혼’이라는 의심을 당연히 받게 된다. 연상의 여자나, 이혼경험이 있는 여성, 장애여성이 이주노동자와 결혼한다고 한다면, 그 또한 위장결혼이나 비자목적 결혼으로 의심받는다.

 
아니면 ‘정상적인 여자’가 이주노동자와 결혼한 것은, 유혹을 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이주노동자 남성의 성적인 능력이나 언변 문제가 부각되면서, 한국여성들을 순진하고 어리석은 여성들로 취급한다. 결혼과정에서 여성의 ‘성적자기결정권’은 도무지 인정되지 않는다.

 
이주여성들의 비자 처리 기간의 신속함에 비하면, 연애과정을 통해 결정된 한국여성들의 국제결혼은 참으로 까다롭다. 그 명목은 한국여성을 ‘보호한다’는 것으로 정당화되고 있다.

 
이러한 국가적 ‘보호의식’은 한국인남성들에게도 전이되어 나타나는데, 한국여성들의 국제결혼을 반대하는 각종 활동단체들의 내용에서 확연히 알 수 있다. 한국남성들이 ‘단속해야 할 누이’로서 한국여성을 바라보는 가부장적 지배의식과, 단일민족으로서 순혈성이 손상되는 것에 대해 우려하는 인종주의가 뒤섞여 있다. 또 그들은 이주남성들로 인한 한국여성들의 피해사실을 과장하거나 왜곡 포장하여, 외국인혐오증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사실 이런 인식이 특정단체에 속한 남성들만의 것은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도 알게 모르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걸 피부로 느낄 때가 많다. 과거로부터 ‘화냥년’, ‘양공주’, ‘혼혈아’ 등이 내포하고 있는 차별적인 인식들이 한국인의 의식을 지배해왔음을 알 수 있다.

 
국가권력과 성(젠더)의 문제, 그리고 인종과 계급의 문제가 중첩되어 나타나는 이러한 문제에서 한국여성이든, 이주여성이든 자유롭지 못하다. 삶이 어렵고 지난하면 제일 먼저 희생의 대상이 되는 가족 내 여성들이다. 호주제는 폐지됐지만, 남성의 가부장적 부계혈통을 이어가는 가족제도의 실질적 변화는 갈 길이 멀다.

 
성/인종/계급문제 중첩…‘연대의 자리 넓어지길’

 
▲ '보노짓 사건'을 계기로, 2009년 8월 25일 열린 <한국사회 성.인종차별문제 토론회>   ©사진- 다문화가족협회 제공
올 여름, 우리 사회는 이러한 핵심적인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됐다. 그 자각의 불씨를 지핀 것이 ‘보노짓 사건’이다. 버스에서 한국여성과 함께 있던 인도출신 남성이, 한국인남성으로부터 심한 인종차별, 성차별 발언과 폭력적인 행위를 당했다. 두 사람은 경찰서에 가서도 공권력의 차별까지 겪었다.

 
이 사건을 통해 그간 각자의 영역에서 활동해오던 이주노동자, 이주여성, 여성, 그리고 인권단체들이 연대하게 되었다. 70여 개 단체들이 ‘성.인종차별 대책위원회’를 꾸려 연명하고 함께 활동하고 있다. 성(gender)의 문제이면서, 인종차별의 문제이고, 국가, 계급 등의 문제들이 서로 교차하고 중첩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함께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국제결혼여성과 남성에 대한 차별, 서구와 제3세계 출신의 사람들 간 계층이 형성되는 모습, 모국어로 자녀를 기르는 일들이 쉽지 않은 이주여성들, 국가의 저출산 문제를 해결할 도구로 이용되는 이주여성의 재생산권리 등 문제들이 산재해 있다.

 
그래서 연대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하다. 한국여성과 이주여성들의 결혼문제가 따로 일 수 없고, 국제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들이라도 공통의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인종’이라는 문제를 놓고 보았을 땐, 여성이나 남성이나 다 같이 직면한 문제이기도 하다. 한국이라는 국가 안에서는 누군가의 특정 문제로 보일 수 있지만, 내가 국가적 경계를 넘어 잠시 타국이라는 곳에 발을 디딘 순간 나의 문제로 직면해 다가옴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 국가의 평범한 여성으로서 단지 ‘결혼’이라는 걸 했을 뿐인데, 이렇게 내 삶이 정치적으로 변화되어 가는 경험을 하게 되면서 오늘도 케이트 밀레트의 이 말을 되새긴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다.”

 
삶의 주체로 살아가다 보면, 일상의 작은 개인사적 일들이 결국 국가구조 안에 놓여 있는 일들일 수 있음을 알게 되기도 하고,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기에 새삼 관계의 중요성을 깨닫게도 된다. 그래서 고민해 본다. 여성이, 또 남성이 ‘사람으로 사는 일’이 자연스럽고 편안하고 자유스러운 날들은 언제 올 것인가? 그리고 그날이 가까워지는 날들을 위해 함께 고민하는 연대의 자리가 자꾸 넓어지기를 바라며 물어본다.

 
“우리 같이 하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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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MB 정권, 공기업 노조를 파괴하기 위해 칼을 뽑아들다

2MB 정권, 공기업 노조를 파괴하기 위해 칼을 뽑아들다

발전, 가스에 이어 철도공사도 단협해지 통보해
 
11월 24일 오후 7시경 철도공사 측에서 철도노조에 단체협약해지를 통보했다. 철도공사는 이 날 오후 2시부터 진행된 교섭 자리에서 기존 입장보다 더욱 더 후퇴된 안을 새롭게 들고 나와 막무가내로 노조의 양보만을 종용하다 교섭이 파국으로 치닫자 오후 7시가 되어 기습적으로 단협해지를 통보한 것이다. 철도공사의 단협해지통보는 지난 5일 발전노조, 11일 가스노조에 이어 대규모 공기업 사업장 노조에 대한 3번째 단협해지다. 철도공사의 이 같은 행보는 올 상반기 허준영 전 경찰청장이 사장으로 부임하면서부터 이미 어느 정도 예견되었던 일이었다.
 
허준영 사장은 지난 3월 취임하자마자 노조 측의 사장취임반대 기자회견을 빌미로 31명의 조합원을 곧바로 고소했으며, 취임 이후부터 지금까지 철도노조와의 본 교섭을 모조리 거부해왔다. 이는 사상유래가 없던 일로써 노조 활동에 대한 탄압은 쉬지 않고 계속되었고, 이후 10월 9일에는 운전조합원의 하루 파업을 이유로 42명, 11월 5, 6일 1차 파업을 이유로 155명이 추가로 고소되었다. 뿐만 아니라 10월 26일에는 노조핵심 교섭위원을 포함해 3명이 해고되었고, 11월 4일에는 2년 전 노조활동을 이유로 12명의 조합원이 징계를 받기도 했다. 철도노조 중앙쟁대위는 25일 기자회견문을 통해 지난 3월 허준영 사장 취임이후 총 510여명에 이르는 조합원이 고소고발 및 입건조치 되었다고 밝혔다.
 
앞서 지적했듯 이 같은 철도공사의 단협해지 통보와 일련의 노조탄압행위들은 발전, 가스공사에서의 단협해지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이명박 정부에서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노동조합활동을 말살하기 위해 직접 칼을 빼들고 공격에 나선 것이다. 지난 9월, 이미 일부 언론을 통해 기획재정부가 각 부처에 매월 공공기관의 단체협약 개정 현황을 점검해 제출하라고 지시한 사실이 알려진 바 있다. 한국노총 관계자 역시 기획재정부 고위급 관계자가 이후 모든 노사문제에서 노동부나 노사정위원회가 아니라 기획재정부가 직접 주도할 것이라고 전해왔다는 점을 폭로하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 공기업 사장자리마다 줄줄이 MB라인 인사들로 채워지고, 촛불집회로 잠시 주춤했던 공기업선진화방안이 다시금 본격화되면서 각 공기업마다 수천명에 달하는 인력감축 계획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고, 이러한 흐름에 맞춰 민주노총 산하 대규모 공기업 노조 파괴에 앞장서기 위해 이명박 정부의 대리인 격으로 기획재정부가 두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고 있는 것이다.
 
필수유지업무준수와 합법파업에 발목잡혀있는 공투본 총파업
 
정부의 이러한 공격에 대항하여 철도, 발전, 가스 노조 등 8개 공공부문단위노조에서는 공동투쟁본부를 꾸리고 지난 6일 하루 공동 총파업에 돌입했다. 예년에 비해 많은 조합원이 집회 일정에 참여하고, 3개 노조가 연대하여 동시 파업에 돌입할 수 있었던 것은 확실히 달라진, 기존에 비해 더 나아진 점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필수유지업무 때문에 파업의 효과는 예전 같지 않았다. 정부와 사측에 실질적인 타격을 전혀 줄 수 없었던 것이다. 필수유지업무로 인해 파업의 효과가 무력화될 것이라는 사실을 노리고 사측과 정부는 보란 듯이 11월 6일 총파업을 하루 앞둔 지난 5일 발전노조에 단협해지를 통보했고, 닷새 후인 11일 가스공사에 대해서도 단협해지를 통보했다.
 
철도공사 역시 끝까지 본 교섭을 거부하는 듯 하다가 철도노조에서 11월 5, 6일 총파업 일정에 돌입하자 본 교섭은 아니지만 집중교섭을 진행하겠다고 밝히며 이전과는 약간 달라진 태도를 보였다. 노조는 사측의 이 같은 변화를 받아들여 본 교섭 고수 입장을 관철시키지 않고 특별 교섭팀 구성에 합의하였으며 임시대의원대회를 통해 확정되었던 쟁의일정(11월 14일~22일)까지 미루었다. 하지만 결국 사측으로부터 단협해지가 통보되었고, 이를 통해 사측은 애초부터 이 문제를 노조와 교섭으로 풀 생각이 없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단체협약 없는 노조는 종이 호랑이일 뿐
싸우지 않는 노동자, 권리를 빼앗긴다
 
철도노조는 26일 새벽4시를 시작으로 무기한 파업에 돌입하겠다고 선포했다. 그리고 기존과 마찬가지로 필수유지업무를 준수하겠다고 밝혔다. 현실적으로 조합원들의 상태를 고려했을 때 무조건적으로 불법파업을 각오하고 하루아침에 필수유지업무를 극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장 투쟁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철도, 발전, 가스 노조 현장 활동가들은 조합원들에게 지금의 위기가 어디서부터 비롯됐는지 지속적으로 일깨워야 한다. 사측은 벌써부터 단체협약 없이도 정년 보장과 임금 인상이 가능하다는 식의 이데올로기 공세를 퍼붓고 있다. 그러나 이는 모래 위의 성일뿐이다. 투쟁으로 단체협약을 지켜내지 않으면, 싸우지 않으면 결국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모두 빼앗겨 버리게 될 것이다.
 
1997년 IMF 위기 이후 심화된 노동유연화로 인해 사회 곳곳 전 산업적으로 비정규직화가 진행된 지 오래다. 이제 이명박 정권은 마지막 남은 정규직 노동자들의 일자리 마저 없애기 위해 공기업 노조부터 목줄을 죄고 있다. 단협해지가 통보된 이후 6개월이 지나면 기존단체협약이 자동으로 소멸된다. 노조 간부들과 조합원들은 이 6개월이라는 시간을 두고 머릿속으로 수많은 계산을 하고 있을 것이다. 6개월 이후에 정말 단체협약이 소멸될 것인가, 아니면 6개월 안에 사측과의 교섭을 통해 간신히 합의안을 도출해낼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6개월이라는 시간 계산 이전에, 87년 노동자 대투쟁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의 피와 땀으로 쟁취해낸 노동조합활동에 대한 권리자체가 뿌리 뽑혀 나가고 있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노동자 대투쟁이 있기 전, 20년 전 무주공산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철도, 발전, 가스 노조의 투쟁이 실패하여 단체협약이 없어지거나 있으나마나 한 반쪽짜리 단체협약으로 개악된다면 남한 자본가들과 이명박 정부는 더욱 더 일치단결하여 지금과 같은 공격의 추세를 밀고 나갈 것이고, 이 같은 흐름이 즉시 다른 공기업 노조들, 서울지하철노조나 도시철도노조 등으로 확산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이를 막아내기 위해선 무엇보다 똑같은 상황에 처해있는 발전, 가스 노동자들의 연대투쟁, 공동투쟁의 흐름이 굳건하게 지속되어야 한다. 개별 단위의 이해에만 집중하는 순간 각개격파 당할 공산이 크다. 공동투쟁의 흐름을 명확히 하고, 다른 공공부문으로 연대투쟁을 확산시키는 일이 가장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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