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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의 『이방인』, 법률 용어와 관련된 번역 문제, 그리고 이정서

  • 분류
    단상
  • 등록일
    2014/08/19 00:34
  • 수정일
    2018/02/21 23:15
  • 글쓴이
    푸우
  • 응답 RSS

한국인 소설가가 한국어로 소설을 쓰면서 법률 용어를 잘못 사용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소설만이 아니라 가끔 변호사들조차 법률 서면을 작성하면서 다소 부정확한 단어를 쓰는 경우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하물며 외국 문학에 등장하는 법정 장면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사소한 오류야 거의 필연일 수밖에 없다. 1. 원 텍스트를 작성하는 외국인 작가부터 정확한 법률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2. 외국어 사전들에서 해당 외국어 단어의 뜻을 충분히 알려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아예 대응하는 적절한 한국어 법률 용어가 없을 수도 있다) 3. 설령 그랬더라도 문맥에 따라 다르게 옮겨야 할 필요가 발생하기도 한다.

 

카뮈의 <이방인>은 부조리 문학의 대표적인 소설로 알려져 있지만 제2부에 이르러서는 형사 절차를 주된 소재로 삼는다. 그런 이유로 국내에 수종의 <이방인> 번역본이 있음에도 제각각 크고 작은 오류를 담고 있다. 내가 제출한 번역본 역시 오류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오류가 생기는 까닭은 위에서 말한 세 가지 이유에서 기인한다. <이방인>의 한국어 번역본에서 역시 이 세 가지 문제가 모두 발생한다.

 

 

첫째, 카뮈 본인의 부정확한 용어 사용이다. 제2부 제4장 첫째 문단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L'avocat levait les bras et plaidait coupable” 나는 이를 “변호인은 두 팔을 든 채 유죄를 인정하면서도”라고 번역했다. 다른 번역본도 비슷하게 번역했다. 원문 자체가 중의적이거나 복잡하지 않고, 번역에도 별다른 난점이 있진 않다. 문제는 “유죄를 인정”한다는 표현 그 자체다.

 

미국 형사 절차에서는 법관이 증거조사에 들어가기에 앞서 피고인에게 기소사실에 관하여 유죄로 답할 것인지, 무죄로 답할 것인지 묻는다. 이를 기소사실인부절차(起訴事實認否節次)라고 부른다. 유죄를 인정할 경우에는 증거조사를 생략한 채 곧바로 양형에 들어가게 된다. 반면 무죄라고 대답하는 경우에는 증거조사를 개시하게 된다.

 

프랑스와 한국을 비롯한 대륙법계 형사 절차에서는 원칙적으로 기소사실인부절차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프랑스가 몇몇 경죄에 대하여 최근 이 제도를 도입하긴 했지만 살인죄와 같은 중죄에 대해서는 여전히 인정되지 않는다. 설령 피고인이 자기 유죄를 인정하더라도 법관은 증거조사에 의해 독립적으로 피고인의 죄를 인지해야 한다. 이론적으로는 피고인이 스스로 유죄라고 말해도 법관이 무죄 선고를 내릴 수 있다(예컨대 책임조각 등의 사유로). 때문에 법관은 피고인에게 유죄로 답할지 여부를 묻지고 않고, 피고인이나 변호인도 굳이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이방인>의 배경이 프랑스 형사 절차가 적용되던 식민지 알제리인 이상 뫼르소의 변호인은 변론 과정에서 유죄를 인정한다는 취지의 말을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설령 변호인이 실제로 ‘유죄를 인정한다’는 단어를 사용했더라도 이는 ‘뫼르소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 자체는 다투지 않겠다’는 취지로만 다뤄질 수 있으며, ‘유죄 인정’이라는 표현이 내포하는 효과를 취할 수는 없다. 따라서 뫼르소가 변호인의 변론을 정리하며 “변호인은 두 팔을 든 채 유죄를 인정하며”라고 서술해서는 안 된다. 소위 말하는 ‘고증 오류’인 셈이다.

 

마치 이런 식이다. 한국에서 1심 법원이 피고인에게 사형 선고를 한 경우 피고인은 항소를 포기할 수 없다. 그런데 A라는 소설이 한국 법정을 묘사하며 피고인이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후 항소를 포기해서 이내 사형당했다고 서술한다고 치자. 이는 한국 형사 절차상 가능하지 않은 전개인 것이다. <이방인>도 마찬가지로, 변호인이 공판에서 유죄를 인정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는 전개다. 물론 <이방인>의 경우는 무슨 취지로 하는 말인지 이해해줄 여지가 있지만.

 

그렇다면 번역자 입장에서는 아무리 원문대로 번역을 하더라도 법리적 오류가 담긴 번역본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아쉽긴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 정도 오류가 큰 흠이 될 수는 없지 않을까 싶다. 설령 기소사실인부절차의 연혁과 의의를 아는 사람이 저 표현을 보더라도 카뮈의 취지대로 무리없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둘째, 불한사전의 불충분한 용어 안내다. 제1부와 제2부에 등장하는 “témoin”이라는 단어가 그렇다. 불한사전은 ‘증인’이나 ‘목격자’라는 번역어를 소개한다. 법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대다수의 번역본은 이를 일관되게 ‘증인’이라고 번역했다. 하지만 불한사전이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뜻이 하나가 더 있다. ‘참고인’이라는 뜻이다.

 

경찰에서 조사받는 목격자가 ‘참고인’이라면, 법원에서 조사받는 목격자는 ‘증인’이다. 따라서 경찰이 ‘증인’을 조사한다는 표현은 다소 부적절하다. <이방인>의 경우, 제1부에서 레몽이 뫼르소에게 자기를 위해 경찰에 가서 “témoin” 노릇을 해달라고 한다. 경찰 조사이므로 ‘증인’이 아닌 ‘참고인’이 되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다소 부실한 사전 탓에 대부분의 번역본은 이를 ‘증인’으로 해두었다.

 

 

셋째, 문맥에 따른 용어 사용의 문제다. 뫼르소에게 “avocat”가 있는데, 사전에 따르면 이는 ‘변호사’라는 의미도 있고, ‘변호인’이라는 의미도 있다. 동의어처럼 보이는 두 단어지만 사실 뜻이 다르다. ‘변호사’란 타인을 소송대리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하나의 직업이라면, ‘변호인’이란 형사소송에서 피고인을 변호하는 지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민사소송에서는 ‘변호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없다.) ‘변호인’의 지위를 가진 사람이 꼭 ‘변호사’라는 직업을 가질 필요는 없는 셈이다.

 

물론 많은 경우 직업이 ‘변호사’인 사람이 ‘변호인’의 직책을 맡게 되므로 형사소송에서는 두 단어를 구분해서 사용하지 않아도 문제될 것이 없다. 한국 법체계에서 이 둘이 나뉘어서 그렇지 프랑스에서는 둘 다 “avocat”라는 같은 단어다.

 

다만 제2부 제3장에서 검사가 직접 뫼르소의 변호인을 언급하는 장면이 간접화법 형태로 등장한다. 이때는 명백히 형사소송에 참여하는 지위로서 ‘변호인’을 언급하는 것이므로 맥락상 ‘변호사’ 대신에 ‘변호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맞다. 마찬가지로 형사소송법에 따라 국가가 피고인에게 붙이는 변호인은 ‘국선변호사’가 아니라 ‘국선변호인’이라고 해야 정확하다.

 

 

다행히도 이런 종류의 오류나 오역은 매우 사소한 축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줄거리를 바꿔버릴 정도의 오류도 아니거니와, 작품에 대한 이해와도 큰 관련이 없다.

 

이정서의 <이방인> 번역본도 법률 용어와 관련해 이런저런 오류를 안고 있다. 다른 번역본과의 차이점이라면, 이정서 번역본에는 “역자노트”가 붙어 있어 이정서가 그런 오류에 이르게 된 비교적 상세한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혹은 그가 내놓은 결과물에는 문제가 없더라도, 거기에 이르는 과정에서 남의 번역본을 비판한 그의 서술에 오류가 있는 경우도 다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법체계나 법률 용어와 관련된 그의 주장은 대부분 틀렸다.

 

번역가란 법률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법에 대한 사소한 무지를 탓할 건 없지만, 그 무지가 남의 노력과 성과물을 함부로 깎아내리는 데 동원되었다면 마땅히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눈에 띄는 몇 개를 보도록 한다. 보아하니 이정서의 <이방인>은 쇄 별로 내용이 꽤 다른 모양인데 (독자로서 유감이다) 나는 2쇄를 기준으로 검토하겠다.

 

 

(1) 이정서의 “역자노트” 29.

 

제2부 제1장에서 뫼르소의 변호인과 예심판사가 “charges”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이정서는 김화영이 “charges”를 ‘수임료’로 번역한 것을 두고 “charges”에는 ‘수임료’와 ‘기소’라는 의미가 둘 다 있지만 여기서는 ‘기소’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정서가 드는 근거는 세 개다. 첫째, 프랑스 저소득층을 변론해주는 국선변호인은 국가로부터 보수를 받으므로 예심판사와 수임료를 논할 필요가 없다. 둘째, 예심판사에게 기소 권한이 있으므로 둘이 기소를 논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세 번째 근거는 법과 상관없으니 따로 적어놓지 않는다.

 

우선 프랑스어 사전을 보면 “charges”에 ‘기소’라는 의미는 나오지 않는다. 프랑스어로 ‘기소’는 ‘poursuite’ 내지 ‘accusation’이다. 그러므로 “charges”에 ‘기소’라는 뜻이 있다는 이정서의 주장은 사전에 의해 뒷받침되지는 않는다.

 

다음으로 그의 두 가지 ‘법리적’ 근거를 보자. 첫째 근거는 그 자체로 아주 틀리진 않았다. 하지만 국선변호인 제도가 꼭 저소득층을 위한 제도는 아니라서 아주 정확한 설명은 아니다. 그리고 변호인과 예심판사가 수임료에 대해 논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 수임료를 논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 더구나 이정서는 뫼르소의 변호인이 국선변호인이라는 점이 대단한 근거인 것처럼 말하지만, 따지고 보면 사선변호인도 의뢰인으로부터 수임료를 받기 때문에 굳이 예심판사와 수임료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국선변호인은 같이 국가로부터 보수를 받는 입장에서 예심판사와 돈 이야기를 할 이유가 조금이라도 더 있는 셈이다. 여하간 변호인이 굳이 예심판사와 수임료 이야기를 안 할 것이라는 지적 자체에는 어느 정도 공감할 수는 있다.

 

둘째 근거와 관련해, <이방인>이 쓰였을 당시 적용되었던 프랑스 구 형사소송법(1808)에 의거, 예심판사에게 부분적으로 기소 권한이 있었던 것은 맞다. 하지만 살인죄와 같은 중죄의 경우 예심판사에게 기소권(재판회부 결정권)이 있는 것은 아니었고 고등검찰청 송부 결정권이 있었을 뿐이다. 이 송부 결정권을 이정서는 ‘기소’라고 파악한 모양인데, 중죄의 재판회부 여부를 고등검찰청에서 최종적으로 결정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고등검찰청 송부 결정을 ‘기소’로 파악하는 것은 그다지 적절하지 않다.

 

단순하게 보아 예심판사가 기소권을 갖는다고 하다라도 그가 변호인과 기소 여부를 논해야 하는 건 아니다. 유죄협상제가 도입되지 않은 프랑스 형사절차를 고려하면 예심판사가 변호인과 기소 여부를 논할 당위는 더더욱 떨어진다. 마치 경찰이 수사를 개시할지 말지를 용의자와 의논해서 결정하는 꼴이다.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둘이 수임료 이야기를 하는 것만큼이나 기소 이야기를 하는 것도 어색하다는 말이다.

 

‘기소’라는 번역어는 사전에 잘 나오지도 않을 뿐더러, 이정서가 드는 근거도 빈약하다. 그렇다면 어떤 번역이 가장 적절할까? 프랑스 형사소송법에서 ‘charge’는 증거, 피의자/피고인에게 불리한 사항, 혐의, 비용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현행 프랑스 형사소송법 제81조는 예심판사에 대해 “Il instruit à charge et à décharge.”라고 규정해두고 있으며, 한국 법무부는 이를 “예심판사의 수사대상에는 피의자에게 불리한 사항과 유리한 사항이 포함된다.”라고 번역한다(법무부, 2011). 혹은 제1권 제3편 제1장 제1절 제목인 “De la reprise de l'information sur charges nouvelles”는 “새로운 증거에 기한 예심수사의 재개”라고 번역한다.

 

해당 장면이 예심수사 중에 예심판사와 변호인이 대화하는 장면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사항’, ‘증거’, ‘혐의’ 정도가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프랑스 형사소송법은 “charges”를 ‘비용’이라는 의미로는 사용해도 ‘기소’라는 의미로는 사용하지 않으므로 이정서의 주장은 명백히 틀렸다.

 

 

(2) 이정서의 “역자노트” 38.

 

마리는 결과적으로 법정에서 뫼르소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고 만다. 이정서는 왜 마리가 그런 증언을 했을까 탐구하며, 마리가 “예심을 맡았던 ‘차장 검사’”에게 뫼르소에 대한 유리한 증언도 할 수 있을 거라는 약속을 받았기 때문에 불리한 증언도 일단 한 것이라고 단정한다. 과감한 추측인데도 이정서는 단정한다. 그래서 이정서는 마리가 차장 검사에게 이용당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 형사소송법 체계상 차장 검사(avocat général)는 당해 사건의 예심(cours d'instruction)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는다. 예심은 예심판사(juge d'instruction)가 주관할 뿐이며, 차장 검사는 공판 단계에 이르러 공소유지의 임무를 맡을 뿐이다. 실제 소설을 보더라도 차장 검사는 공판 이전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차장 검사가 예심과 관련된 서류를 검토할 수야 있겠지만 적어도 예심을 담당하는 당사자는 아니다. 따라서 “예심을 맡았던 ‘차장 검사’”라는 표현 자체가 성립할 수 없으며, 차장 검사가 예심에 관여해 마리와 모종의 대화를 나누었다고 볼 소설 내적, 혹은 법리적 근거 역시 찾을 수 없다.

 

 

(3) 이정서의 “역자노트” 40.

 

이정서는 김화영이 “se défendre”를 ‘변명’이라고 번역한 것을 비판하며, ‘변호’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원문이 대명동사로 쓰인 점을 감안하면 ‘자기 변호’ 정도가 될 것이며, 실제로 이정서는 “스스로를 변호”라고 옮겼다.

 

그런데 ‘변명하다’와 ‘스스로를 변호하다’ 사이에는 실제로 무슨 차이가 있을까? 이정서는 대단한 뉘앙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법적 관점에서 본다면 ‘변명 = 자기 변호’다. 한국 형사소송법 제72조와 제200조의5 모두 피의자나 피고인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서술한다. ‘변명’은 적확한 용어인 것이다. 이정서의 비판은 과잉되었다.

 

 

(4) 이정서의 “역자노트” 47.

 

카뮈는 뫼르소의 변호인을 두고 “Il a plaidé la provocation très rapidement”라고 묘사한다. 이정서는 이를 “그는 도발에 대해 황급히 변론한 다음”이라고 옮기면서, 이 도발이란 뫼르소에 대해 사형을 청구한 검사의 도발을 가리키며, 변호인은 거기에 변호(항의)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원문을 분석해보면 “la provocation”은 “a plaidé” 동사의 직접목적보어, 즉 해당 동사의 대상이 된다. 영어의 3형식 문장(S+V+O)과 유사하다. 따라서 한국어 구문에 맞게 원문을 재구성하면 ‘la provocation을 a plaidé하다’가 된다. “la provocation”은 ‘도발’이라는 의미이므로, ‘도발을 a plaidé하다’가 된다. 한편 이정서는 ‘도발을’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도발에 대해’라고 번역했는데, 이는 직접목적보어로서 ‘도발’을 제대로 번역하지 않고 원문의 문장 구조를 비튼 것이다. 마치 ‘나는 사과에 대해 먹었다’와 같은 문장이 되어 버렸다.

 

“a plaidé” 동사는 ‘변론하다’, ‘변호하다’, ‘주장하다’ 등의 의미를 지닌다. ‘변호하다’가 주로 사람을 대상으로 쓰인다는 점을 감안할 때 ‘변론하다’나 ‘주장하다’가 더 적절하며, ‘변론’이 개별 주장을 모두 포괄한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도발’이라는 구체적 지점 내지 쟁점을 내세운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주장’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정리해보면 ‘그는 도발을 주장했다’로 옮길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도발’이란 무엇일까? 프랑스 구 형법(1810) 제321조에 의하면 피고인이 자신을 도발(provoqués)한 피해자를 살해한 경우, 양형에서 감경이 이루어진다. 변호인이 ‘도발을 주장했다’는 것은 바로 이 구 형법상 감경 사유인 ‘피해자의 도발에 의한 살인’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이정서가 변호인이 검사의 도발에 항의했다고 파악한 것은 문장 구문에 맞지 않고, 프랑스 법체계를 간과한 처사다.

 

 

(5) 이정서의 “역자노트” 51.

 

교도소 부속 사제가 뫼르소를 방문한다. 원문은 “recevoir”인데, 김화영은 ‘면회’, 이정서는 ‘접견’이라고 번역했다. 이정서는 ‘접견’이라고 번역해야 한다며 사전에서 두 단어를 비교해보라고 하며 사전을 인용해 놓았다. 사전에서 ‘접견’은 “[법률] 형사 절차에 의하여 신체의 구속을 받고 있는 피고인이나 피의자와 만남. 또는 그런 일.”이라고 나와 있다. 반면 ‘면회’는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는 어떤 기관이나 집단생활을 하는 곳에 찾아가서 사람을 만나 봄.”이라고 나와 있다. ‘면회’가 ‘접견’보다 포괄적이고 넓은 개념이다. 그런 만큼 ‘면회’도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정서는 당연히 자기처럼 번역해야 한다고 자신하는 모양이다.

 

이정서는 ‘접견’이 법률 용어이므로 그게 정확한 번역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법률 용어인 것과 정확한 번역인 것은 다른 문제다. 도리어 법률 용어는 딱 정해진 대로 쓰이지 않는 한 오류가 나기 쉽다. 제각각 매우 한정적인 용법만을 지니고, 그 범위를 함부로 벗어날 수 없다. 위에서 보았듯이 김화영의 ‘변명’이라는 번역은 상황에 알맞았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반면, ‘접견’이라는 법률 용어는 이 상황에 딱 알맞는 단어는 아니다.

 

의아하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사전에는 신체가 구속된 피고인을 만나는 걸 ‘접견’이라고 설명하고 있고, 부속 사제도 구속된 피고인인 뫼르소를 만난 것인데 말이다. 한 번 ‘접견’의 의미를 더 자세히 따져보자. 아무리 사전이 정확하다고 해도 법률 용어에 관한 한 법률 자체의 설명보다 정확할 수는 없다.

 

재소자의 접견을 규율하는 주된 법은 형의 집행 및 수용자의 처우에 관한 법률이다. 이 법의 제41조 제1항은 “수용자는 교정시설의 외부에 있는 사람과 접견할 수 있다.”라고 규정한다. 여기서 눈여겨 볼 점은 ‘교정시설의 외부에 있는 사람’이라는 부분이다. ‘접견’이란 외부 사람을 만난다는 맥락을 내포한 것이다. 수용자가 교정시설에 소속된 사람과 만나는 행위를 ‘접견’이라고 부르진 않는다. 예컨대 재소자가 교도관과 만나는 것을 ‘접견’이라고 하진 않는다. 교정시설 내 사람을 만날 때는 접견과 관련된 규정과 절차가 적용되지도 않는다.

 

마침 뫼르소가 만나는 사제는 보통 사제가 아니라 교도소 부속 사제다. 교정시설에 속한 종교인이라서 교정시설 외부에 있는 사람으로 볼 수 없다. 따라서 부속 사제가 뫼르소를 만나는 것을 두고 ‘접견’이라고 하는 것은 다소 어폐가 있다. 한국의 형의 집행 및 수용자의 처우에 관한 법률 역시 ‘접견’과 ‘종교상담’을 전혀 다른 조항에 규정해두고 있으며, 교정본부 홈페이지를 보아도 접견 관련 안내와 종교생활 관련 안내는 구분되어 있다. 이정서의 ‘접견’ 번역이 오역이라고 단정지을 필요는 없겠지만 반드시 그와 같이 번역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면회’가 무난하며, 나는 사제가 직접 뫼르소의 감방으로 찾아온다는 점에 착안해 ‘방문’으로 번역했다.

 

 

(6) 이정서의 “역자노트” 53.

 

뫼르소는 사형 선고를 받고 나서 “pourvoi”를 할지 말지 고민한다. 김화영은 “pourvoi”를 ‘상고’로, 이정서는 ‘항소’로 옮겼다. 이정서는 1심에 대한 상소는 ‘항소’, 2심에 대한 상소는 ‘상고’이므로 1심을 마친 뫼르소로서는 ‘항소’를 고민하는 게 옳다고 주장한다.

 

이정서의 설명은 3심제 하에서, 그것도 원칙적으로 볼 때만 타당하다. 엄밀하게 보자면 3심제 하에서도 1심 판결에 불복해 고등법원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대법원에 상소할 수도 있으며, 이는 ‘항소’가 아니라 ‘상고’에 해당한다. 실제로 한국 형사소송법은 예외적으로 1심에서 곧바로 대법원으로 상소하는 것을 허용하며, 이를 ‘비약상고’라고 부른다.

 

사실 항소심에 하는 상소가 ‘항소’, 상고심에 하는 상소가 ‘상고’이다. 말장난 같지만, 상소라는 행위가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받아주는 법원이 먼저 있다는 뜻이다. 현행 한국 법체계에서 대법원은 상고심의 지위를 차지한다(이외에도 몇 가지 지위를 더 점하긴 한다). 그렇기 때문에 판결에 대해 대법원에 상소하는 것은 그것이 몇 심에 대한 불복인지를 불문하고 ‘상고’가 된다. 그런데 보통 2심 판결에 대해 불복해서 대법원에 상소하기 때문에 2심에 대한 상소를 흔히 ‘상고’라고 부를 뿐이다. 또한 2심 형사 판결이 확정된 뒤에도 이에 예외적으로 불복할 수 있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는데, 사실관계를 다시 다투는 경우 2심이 다시 심판하기 때문에 ‘재심’이라고 부르는 반면, 법률관계를 다시 다투는 경우 대법원이 심판하기 때문에 ‘비상상고’라고 부른다.

 

결국 1심에 대한 상소는 항소, 2심에 대한 상소는 상고라고 단순하게 볼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제도의 구체적 운용에 따라 알맞은 용어를 골라야 한다. 뫼르소에게 적용되었던 프랑스 구 형사소송법(1808)은 중죄법원(cour d'assises)이 살인 사건의 1심을 담당하도록 하되, 그 판결에 대해 파기원(Cour de cassation)에 상소하는 것만을 허용했다. 3심제가 아닌 2심제로 운영되었던 것이다.

 

파기원에 상소하는 것을 바로 “pourvoi”라고 한다. 프랑스 법체계에서 최종심이자 법률심인 파기원에 하는 상소라는 점을 감안할 때 거기에 대응하는 한국 법률 용어는 ‘상고’이다. (절차법상 상고이유가 법률 위반 사유에 한정된다는 점을 감안한 것이다.) 당연하지만 법무부 역시 프랑스 형사소송법의 “pourvoi”를 ‘상고’라고 번역한다. “pourvoi”를 ‘항소’라고 번역하는 것은 오역이거나, 최소한 현재 학계에 의해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 번역이다.

 

 

위에서 지적한 것 외에도 이정서의 번역본에는 ‘피고/피고인’, ‘참고인/증인’, ‘신문/심문’, ‘고소/고발/기소’ 등의 용어가 제대로 구분되지 않은 부분이 다수 있었다. 

 

누차 말했지만 법률 용어와 관련해서는 오류가 날 수도 있다. (물론 너무 지나치면 안 되겠지만.) 그런데 “역자노트”를 통해 자기는 옳고 남은 틀렸다고 강하게 주장했다면 그런 오류에 대한 허용 가능성은 매우 낮아질 수밖에 없다. 적어도 법리적인 부분에 관한 이정서의 번역과 주장은 신뢰할 만하지 않다. 이정서한테 그가 “역자노트”에 남긴 말을 되돌려준다.

 

“이렇듯 역자는 기본적인 프랑스의 법률 체계조차 들춰 보지 않고, 프랑스어를 남들보다 조금 더 잘한다는 자신감에 (사전을 잘 안 보는 편집자차럼) 자기 상식으로 그 뜻을 옮겨서 소설을 완전히 왜곡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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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8. 26. 23:08

 

예심판사의 기소 권한과 관련해, 프랑스 구 형사소송법(1808)에 따른 권한이 그렇다는 점을 명시했다. 기존 글과 내용 변화는 없다. 한편, 프랑스 현행 형사소송법에 따르면 예심판사는 모든 죄에 대하여 고등검찰청을 거치지 않고 재판에 회부할 권한이 있다. 단, 예심판사에 의한 재판 회부를 기소로 보아야 할지, 이송으로 보아야 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릴 수 있다.

 

이외에도 몇 가지 띄어쓰기를 통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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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9. 20. 18:50

 

한국의 사형제도와 관련해 잘못된 내용을 적어 수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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