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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번역 2-5 (1)

이 번역은 1942년 갈리마르에서 출간된 L'étranger를 원본으로 삼으며, 때로 이휘영, 김화영, 이기언, 김예령, 이정서 번역을 참고한다.

 

한국에서 L'étranger 원본의 저작권은 소멸했다. 이 번역본은 무료로 배포 가능하다. 단, 영리 목적 사용은 불가능하며, 일부나 전부를 어떠한 형태로도 가공 내지 수정할 수 없다. 어차피 카뮈의 간결함을 한국어로 살려본답시고 내 멋대로 의역한 부분이 많아서 그렇게까지 신뢰할 만하진 않다.

 

 

제2부

 

V

 

부속 사제 방문을 거절했다. 세 번째 거절이었다. 할 말도 없고, 이야기 나누고 싶지도 않고. 어차피 조만간 보게 되리라. 요즘 내 관심은 어떻게 저 기계장치를 모면할지에 쏠려 있다. 불가피한 일에도 빠져나갈 길이 있을지. 감방을 옮겼다. 여기서 누우면 하늘이 보인다. 하늘만 보인다. 매일 같이 하늘의 얼굴빛이 낮에서 밤으로 기울기만 종일 바라본다. 누운 채, 머릿밑에 두 손을 괴고, 기다린다. 사형수 중에 저 냉혹한 장치를 모면한 사람이, 집행 전에 사라진 사람이, 경찰 경계선을 끊어낸 사람이 과연 있을지 얼마나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사형 집행에 관한 이야기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후회됐다. 그런 문제엔 항상 관심을 가져야 한다. 무엇이 닥쳐올지 결코 알 수 없다. 나도 신문에 실린 관련 기사는 더러 읽었다. 하지만 내가 호기심이 강하지 않아서 그렇지, 분명 전문 서적도 있을 테다. 전문 서적에는 탈출 사례가 소개됐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한 번쯤은 바퀴가 멈춰 서지 않았을까? 이 불가항력의 계획이 진행되던 와중에, 우연과 운이 따라, 딱 한 번이라도 무언가 바뀌었을 지도. 단 한 번! 어쩌면 그 한 번이면 충분했다. 나머지는 내 마음이 알아서 하리라. 신문은 사회에 진 빚을 자주 언급했다. 신문에 따르면 그 빚을 갚아야 했다. 그런데 그건 상상력을 자극하지 못했다. 중요한 건 탈출 가능성이었다. 냉혹한 의식을 뛰어넘는 도약, 희망할 기회를 활짝 열어주는 광란의 질주. 물론 희망이라고 해봤자, 달려가던 중 대뜸 총을 맞아 골목에서 쓰러지는 것이겠지만.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는 그런 사치를 누릴 수 없었다. 완전히 금지당했다. 기계장치가 나를 도로 붙잡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 무례한 확신을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확신의 근간이 된 판결과, 판결이 선고된 때부터 흔들리지 않고 계속된 전개 사이에 터무니없는 불균형이 있었던 까닭이다. 판결문을 오후 다섯 시가 아닌 저녁 여덟 시에 낭독했다는 점이나, 완전히 다른 내용의 판결일 수 있었다는 점이나, 내의를 갈아입어야 하는 사람들이 판단했다는 점이나, 프랑스 인민(아니면 독일 인민, 중국 인민)이라는 모호한 관념에 기대어 판결을 내렸다는 점을 모두 감안하면, 그토록 중요한 결정인데도 진지함이 많이 날아가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럼에도 일단 내려지고 나면, 그 순간부터 판결은 내가 온몸을 짓눌러대는 이 벽의 존재만큼이나 명백하고 진지한 효력을 지녔다.

 

 

그러다 엄마가 해주시던 아버지 이야기가 하나 생각났다. 아버지와는 안면부지였다. 내가 아는 거라곤 엄마가 들려주신 이야기밖에 없었다. 그는 살인자 사형 집행을 보러 갔다. 갈 생각을 하니 속이 메스꺼웠단다. 그래도 보러 갔었고, 돌아오는 길에 토했다. 아침이었는데 한참 토한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조금 역겨웠다. 이제는 이해가 갔다. 그게 참 당연했다. 사형 집행만큼 중요한 건 없고, 결국 사람이 진정 관심을 가질 만한 일이라곤 사형 집행밖에 없다는 걸 왜 여태 깨닫지 못했을까! 만에 하나 교도소에서 나가게 된다면, 사형 집행은 모조리 보러 다니리라. 나갈 가능성을 고려하다니, 실수였다. 어느 이른 아침 경찰 경계선을 넘어서게 된다고, 그러니까 반대편으로 나가게 된다고 생각만 해도, 내가 사형 집행을 구경하러 왔다가 나중에 토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만 해도 독을 탄 기쁨의 물결이 마음에 차올랐으니까. 그런데 이건 이성적이지 않았다. 이런 가설을 세우도록 나 자신을 가만 놔둔 건 실수였다. 곧이어 지독할 만큼 추웠으니. 담요 밑으로 움츠러들어야 했다. 덜덜 떨리는 이를 멈출 수 없었다.

 

 

당연하지만 언제나 이성적일 수는 없다. 예컨대 나는 가끔 법안을 만들어보곤 했다. 형벌 제도를 수정했다. 사형수에게 기회를 주는 게 핵심이었다. 천 분의 일 확률이면 문제를 개선하는 데 충분했다. 환자(나는 사형수가 ‘환자’1라고 생각했다)를 열에 아홉 죽일 수 있는 화학 약품을 만들면 될 것처럼 보였다. 환자도 그걸 안다는 게 조건이었다. 한 번 꼼꼼하고 차분하게 검토해보자. 날을 떨어뜨리는 방식은 어떠한 기회도, 그 어떠한 기회도 주지 않는다는 결함을 지니고 있지 않았던가. 재고의 여지조차 남기지 않고 환자의 죽음을 결정했다. 종결된 사건, 확고한 결합, 돌이킬 수 없는 합의였다. 만약 놀랍게도 날이 빗나가면, 다시 시작할 뿐이었다. 그러면 상황이 조금 난처해지겠지. 사형수는 기계가 제대로 작동하길 바라게 될 테니까. 이게 바로 단두대의 결함이었다. 어떤 관점에선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게 바로 좋은 조직의 비결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형수도 결국 정신적으로 협력해야 했다. 그도 모든 일이 사고 없이 진행되길 바라게 됐다.

 

 

게다가 나는 이 문제들에 관해 여태 부정확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단두대 앞에 서기 위해서는 단으로 된 사형대 위로 올라가야 한다고, 계단을 딛어야 한다고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네. 1789년 혁명 때문인 것 같다. 그러니까, 내가 이 문제에 관해 지금껏 배우거나 본 모든 것들 때문에. 그런데 어느 날 아침, 크게 화제가 됐던 어떤 사형 집행 당시 신문에 실렸던 사진 한 장이 기억났다. 사실 기계는 땅바닥에 그대로 놓였다. 그보다 간단할 순 없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좁았다. 더 일찍 머리에 떠오르지 않아 이상할 정도였다. 사진에 실린 기계는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깔끔하고, 번쩍거렸다. 인상적이었다. 우린 언제나 모르는 걸 과장해서 생각한다. 모든 것은 오히려 간단했다. 기계는 다가오는 사람과 같은 높이에 있다. 사형수는 마치 다른 사람을 만나러 가듯 기계에 다가선다. 역시 난처한 상황이었다. 사형대를 오르고, 광활한 하늘을 향해 상승한다면 상상력이 매달릴 수라도 있었다. 한편, 여기선 기계장치가 또다시 모든 걸 짓눌렀다. 조심스럽게, 약간 수치스럽게, 무척 정교하게 죽임을 당했다.

 

 

늘 두 가지 문제를 생각하며 지냈다. 새벽과 상고. 그래도 더 이상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며 거기에 정신을 쏟고자 애썼다. 하늘이 초록색으로 변했다. 저녁이었다. 다시 생각의 흐름을 돌려보려고 했다. 내 심장에 귀를 기울였다. 그토록 오랫동안 함께 해온 이 소리가 언젠간 멈출 수 있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나는 무언가를 제대로 상상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심장 박동이 머리에까지 미치지 않을 찰나를 떠올려보려고 시도했다. 헛수고였다. 새벽이나 상고가 여전히 머리에 맴돌았다. 일부러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오히려 가장 이성적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들은 새벽에 온다. 결국 그 새벽을 기다리며 밤을 보냈다. 갑작스레 놀라는 건 질색이었다. 무언가가 닥칠 때 맨정신인 게 낫다. 그러다 보니 낮에만 잠깐 눈을 붙였고, 밤은 지새웠다. 하늘에 난 창으로 빛이 태동하기만을 끈기 있게 기다렸다. 그들이 으레 작업을 치르는 시간 즈음이 가장 힘들었다. 자정이 지나면, 나는 기다렸고, 동정을 살폈다. 내 귀가 이토록 많은 소리를 감지한 적은 없었다. 그토록 작은 소리를 분간한 적도. 게다가 어떤 면에선 나는 그 기간 내내 운이 좋았던 셈이다. 발걸음 소리를 들은 적은 없으니. 엄마는 우리가 전적으로 불행해지지는 않는다고 종종 말씀하셨다. 다채롭게 물들기 시작하는 하늘과 감방으로 스며드는 햇살을 보며, 감방에 앉은 채, 엄마 말씀에 수긍했다. 얼마든 발걸음 소리가 들려올 수도 있었다. 내 심장이 터져버렸을지도 모른다. 비록 자그만 기척에도 문가로 달려갔지만, 비록 귀를 나무에 갖다 댄 채 내 숨소리가 들리기를 실성한 듯이 기다렸지만, 숨소리가 흡사 개 헐떡이듯 쉬어버려 놀랐지만, 심장은 결국 터지지 않았다. 또 스물네 시간을 벌게 됐다.

 

 

낮에는 종일 상고를 생각했다. 이끌어낼 수 있는 최대한의 생각을 뽑아낸 것 같다. 제각각 어떤 효과가 있는지 따졌고, 가장 좋은 결과를 얻어냈다. 항상 최악을 가정했다. 상고 기각. “그럼 죽는 거지, 뭐.” 다른 사람들보단 먼저 죽겠지. 분명했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 사실 서른에 죽든 일흔에 죽든 중요하지 않다는 걸 모르진 않았다. 당연하다. 어찌 됐든 다른 남성이나 여성이 살아갈 테니까. 수천 년 동안 그런 식일 것이다. 결국 이보다 명백한 건 없었다. 지금 죽든 20년 후에 죽든, 죽는 건 여전히 나였다. 그 순간, 20년을 더 살아간다는 생각에서 끔찍한 비약을 느껴 사유가 조금 방해됐다. 20년 뒤 내가 이 상황에 봉착하게 됐을 때 무슨 생각을 할지 상상해보며 비약을 메꿨다. 일단 죽는다 치면, 언제 어떻게 죽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확실했다. 그러므로(이 ‘그러므로’가 사유에서 표상하는 모든 걸 놓치지 않는 것이 어려웠다), 그러므로 상고 기각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 순간, 오로지 그 순간, 나한테 일종의 권리가 주어졌다. 두 번째 가설을 다뤄도 된다고 스스로 허락한 셈이었다. 감면. 피와 몸이 솟구치며 터질 듯한 기쁨으로 눈을 따갑게 했다. 가라앉히느라 귀찮았다. 이 외침을 진정시키고 누그러뜨려야 했다. 태연하게 두 번째 가설을 다뤄야 했다. 그래야 어차피 첫 번째 가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보다 잘 수긍할 수 있었다. 마음이 진정되면 한 시간 정도 안정을 취할 수 있었다. 그거라도 어딘가 싶었다.

 
 

Deuxième partie

 

V

 

Pour la troisième fois, j'ai refusé de recevoir l'aumônier. Je n'ai rien à lui dire, je n'ai pas envie de parler, je le verrai bien assez tôt. Ce qui m'intéresse en ce moment, c'est d'échapper à la mécanique, de savoir si l'inévitable peut avoir une issue. On m'a changé de cellule. De celle-ci, lorsque je suis allongé, je vois le ciel et je ne vois que lui. Toutes mes journées se passent à regarder sur son visage le déclin des couleurs qui conduit le jour à la nuit. Couché, je passe les mains sous ma tête et j'attends. Je ne sais combien de fois je me suis demandé s'il y avait des exemples de condamnés à mort qui eussent échappé au mécanisme implacable, disparu avant l'exécution, rompu les cordons d'agents. Je me reprochais alors de n'avoir pas prêté assez d'attention aux récits d'exécution. On devrait toujours s'intéresser à ces questions. On ne sait jamais ce qui peut arriver. Comme tout le monde, j'avais lu des comptes rendus dans les journaux. Mais il y avait certainement des ouvrages spéciaux que le n'avais jamais eu la curiosité de consulter. Là, peut-être, j'aurais trouvé des récits d'évasion. J'aurais appris que dans un cas au moins la roue s'était arrêtée, que dans cette préméditation irrésistible, le hasard et la chance, une fois seulement, avaient changé quelque chose. Une fois ! Dans un sens, je crois que cela m'aurait suffi. Mon cœur aurait fait le reste. Les journaux parlaient souvent d'une dette qui était due à la société. Il fallait, selon eux, la payer. Mais cela ne parle pas à l'imagination. Ce qui comptait, c'était une possibilité d'évasion, un saut hors du rite implacable, une course à la folie qui offrit toutes les chances de l'espoir. Naturellement, l'espoir, c'était d'être abattu au coin d'une rue, en pleine course, et d'une balle à la volée. Mais, tout bien considéré, rien ne me permettait ce luxe, tout me l'interdisait, la mécanique me reprenait.

 

 

Malgré ma bonne volonté, je ne pouvais pas accepter cette certitude insolente. Car enfin, il y avait une disproportion ridicule entre le jugement qui l'avait fondée et son déroulement imperturbable à partir du moment où ce jugement avait été prononcé. Le fait que la sentence avait été lue à vingt heures plutôt qu'à dix-sept, le fait qu'elle aurait pu être tout autre, qu'elle avait été prise par des hommes qui changent de linge, qu'elle avait été portée au crédit d'une notion aussi imprécise que le peuple français (ou allemand, ou chinois), il me semblait bien que tout cela enlevait beaucoup de sérieux à une telle décision. Pourtant, j'étais obligé de reconnaître que dès la seconde où elle avait été prise, ses effets devenaient aussi certains, aussi sérieux, que la présence de ce mur tout le long duquel j'écrasais mon corps.

 

 

Je me suis souvenu dans ces moments d'une histoire que maman me racontait à propos de mon père. Je ne l'avais pas connu. Tout ce que je connaissais de précis sur cet homme, c'était peut-être ce que m'en disait alors maman : il était allé voir exécuter un assassin. Il était malade à l'idée d'y aller. Il l'avait fait cependant et au retour il avait vomi une partie de la matinée. Mon père me dégoûtait un peu alors. Maintenant, je comprenais, c'était si naturel. Comment n'avais-je pas vu que rien n'était plus important qu'une exécution capitale et que, en somme, c'était la seule chose vraiment intéressante pour un homme ! Si jamais je sortais de cette prison, j'irais voir toutes les exécutions capitales. J'avais tort, je crois, de penser à cette possibilité. Car à l'idée de me voir libre par un petit matin derrière un cordon d'agents, de l'autre côté en quelque sorte, à l'idée d'être le spectateur qui vient voir et qui pourra vomir après, un flot de joie empoisonnée me montait au cœur. Mais ce n'était pas raisonnable. J'avais tort de me laisser aller à ces suppositions parce que, l'instant d'après, j'avais si affreusement froid que je me recroquevillais sous ma couverture. le claquais des dents sans pouvoir me retenir.

 

 

Mais, naturellement, on ne peut pas être toujours raisonnable. D'autres fois, par exemple, je faisais des projets de loi. Je réformais les pénalités. J'avais remarqué que l'essentiel était de donner une chance au condamné. Une seule sur mille, cela suffisait pour arranger bien des choses. Ainsi, il me semblait qu'on pouvait trouver une combinaison chimique dont l'absorption tuerait le patient (je pensais : le patient) neuf fois sur dix. Lui le saurait, c'était la condition. Car en réfléchissant bien, en considérant les choses avec calme, je constatais que ce qui était défectueux avec le couperet, c'est qu'il n'y avait aucune chance, absolument aucune. Une fois pour toutes, en somme, la mort du patient avait été décidée. C'était une affaire classée, une combinaison bien arrêtée, un accord entendu et sur lequel il n'était pas question de revenir. Si le coup ratait, par extraordinaire, on recommençait. Par suite, ce qu'il y avait d'ennuyeux, c'est qu'il fallait que le condamné souhaitât le bon fonctionnement de la machine. Je dis que c'est le côté défectueux. Cela est vrai, dans un sens. Mais, dans un autre sens, j'étais obligé de reconnaître que tout le secret d'une bonne organisation était là. En somme, le condamné était obligé de collaborer moralement. C'était son intérêt que tout marchât sans accroc.

 

 

J'étais obligé de constater aussi que jusqu'ici j'avais eu sur ces questions des idées qui n'étaient pas justes. J'ai cru longtemps - et je ne sais pas pourquoi - que pour aller à la guillotine, il fallait monter sur un échafaud, gravir des marches. Je crois que c'était à cause de la Révolution de 1789, je veux dire à cause de tout ce qu'on m'avait appris ou fait voir sur ces questions. Mais un matin, je me suis souvenu d'une photographie publiée par les journaux à l'occasion d'une exécution retentissante. En réalité, la machine était posée à même le sol, le plus simplement du monde. Elle était beaucoup plus étroite que je ne le pensais. C'était assez drôle que je ne m'en fusse pas avisé plus tôt. Cette machine sur le cliché m'avait frappé par son aspect d'ouvrage de précision, fini et étincelant. On se fait toujours des idées exagérées de ce qu'on ne connaît pas. Je devais constater au contraire que tout était simple : la machine est au même niveau que l'homme qui marche vers elle. Il la rejoint comme on marche à la rencontre d'une personne. Cela aussi était ennuyeux. La montée vers l'échafaud, l'ascension en plein ciel, l'imagination pouvait s'y raccrocher. Tandis que, la encore, la mécanique écrasait tout : on était tué discrètement, avec un peu de honte et beaucoup de précision.

 

 

Il y avait aussi deux choses à quoi je réfléchissais tout le temps : l'aube et mon pourvoi. Je me raisonnais cependant et j'essayais de n'y plus penser. Je m'étendais, je regardais le ciel, je m'efforçais de m'y intéresser. Il devenait vert, c'était le soir. Je faisais encore un effort pour détourner le cours de mes pensées. J'écoutais mon cœur. Je ne pouvais imaginer que ce bruit qui m'accompagnait depuis si longtemps put jamais cesser. Je n'ai jamais eu de véritable imagination. J'essayais pourtant de me représenter une certaine seconde où le battement de ce cœur ne se prolongerait plus dans ma tête. Mais en vain. L'aube ou mon pourvoi étaient là. Je finissais par me dire que le plus raisonnable était de ne pas me contraindre.

 

 

C'est à l'aube qu'ils venaient, je le savais. En somme, j'ai occupé mes nuits à attendre cette aube. Je n'ai jamais aimé être surpris. Quand il m'arrive quelque chose, je préfère être là. C'est pourquoi j'ai fini par ne plus dormir qu'un peu dans mes journées et, tout le long de mes nuits, j'ai attendu patiemment que la lumière naisse sur la vitre du ciel. Le plus difficile, c'était l'heure douteuse où je savais qu'ils opéraient d'habitude. Passé minuit, j'attendais et je guettais. Jamais mon oreille n'avait perçu tant de bruits, distingué de sons si tenus. Je peux dire, d'ailleurs, que d'une certaine façon j'ai eu de la chance pendant toute cette période, puisque je n'ai jamais entendu de pas. Maman disait souvent qu'on n'est jamais tout à fait malheureux. Je l'approuvais dans ma prison, quand le ciel se colorait et qu'un nouveau jour glissait dans ma cellule. Parce qu'aussi bien, j'aurais pu entendre des pas et mon cœur aurait pu éclater. Même si le moindre glissement me jetait à la porte, même si, l'oreille collée au bois, j'attendais éperdument jusqu'à ce que j'entende ma propre respiration, effrayé de la trouver rauque et si pareille au râle d'un chien, au bout du compte mon cœur n'éclatait pas et j'avais encore gagné vingt-quatre heures.

 

 

Pendant tout le jour, il y avait mon pourvoi. Je crois que j'ai tiré le meilleur parti de cette idée. Je calculais mes effets et j'obtenais de mes réflexions le meilleur rendement. Je prenais toujours la plus mauvaise supposition : mon pourvoi était rejeté. « Eh bien, je mourrai donc. » Plus tôt que d'autres, c'était évident. Mais tout le monde sait que la vie ne vaut pas la peine d'être vécue. Dans le fond, je n'ignorais pas que mourir à trente ans ou à soixante-dix ans importe peu puisque, naturellement, dans les deux cas, d'autres hommes et d'autres femmes vivront, et cela pendant des milliers d'années. Rien n'était plus clair, en somme. C'était toujours moi qui mourrais, que ce soit maintenant ou dans vingt ans. À ce moment, ce qui me gênait un peu dans mon raisonnement, c'était ce bond terrible que je sentais en moi à la pensée de vingt ans de vie à venir. Mais je n'avais qu'à l'étouffer en imaginant ce que seraient mes pensées dans vingt ans quand il me faudrait quand même en venir là. Du moment qu'on meurt, comment et quand, cela n'importe pas, c'était évident. Donc (et le difficile c'était de ne pas perdre de vue tout ce que ce « donc » représentait de raisonnements), donc, je devais accepter le rejet de mon pourvoi.

 

 

À ce moment, à ce moment seulement, j'avais pour ainsi dire le droit, je me donnais en quelque sorte la permission d'aborder la deuxième hypothèse : j'étais gracié. L'ennuyeux, c'est qu'il fallait rendre moins fougueux cet élan du sang et du corps qui me piquait les yeux d'une joie insensée. Il fallait que je m'applique à réduire ce cri, à le raisonner. Il fallait que je sois naturel même dans cette hypothèse, pour rendre plus plausible ma résignation dans la première. Quand j'avais réussi, j'avais gagné une heure de calme. Cela, tout de même, était à considérer.

 

 

* * *

 

간단한 노트. 거의 끝나간다! 'patient'을 일단 '환자'라고 옮겨놓긴 했는데 아마 각주가 필요한 번역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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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뫼르소는 사형수를 ‘patient’으로 지칭한다. 오늘날 ‘환자’라는 의미로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지만, 간혹 ‘수형자’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patient’이 ‘고통받는 자’, ‘감내하는 자’라는 라틴어인 ‘patiens’에서 파생된 데서 기인한다. 따라서 뫼르소가 사형수더러 ‘patient’이라고 할 때는, 사형수가 마치 환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수형자로서 성질도 드러내고, 사형수가 고통받고, 감내하는 자라는 점 또한 은연중에 드러낸다.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