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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영화가 영화답다고 하는 것만큼 별 의미를 지니지 않은 듯한 문장도 드물 것이다. 그럼에도 이 문장이 아예 쓸모없진 않다. 예컨대 영화와 광고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이고, 여하간 영화를 여타 영상물와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내가 강아지를 녹화한 영상도 '영화'라고 할 수 있을까? 바꿔 말하면 무엇이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을 구분해주는가? 현대 미학에 이르러서 꽤 형식주의에 빠진 질문이지 않을까 싶지만, 그럼에도 특정한 예술 분야에 알맞는 고유한 문법이 있다면, 그 문법을 잘 간직하고 재해석하는 작품이 해당 예술 분야를 풍부하게 만들어준다는 잠정적 결론을 내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내 강아지 영상이 '영화'가 아니라고 강아지가 지닌 귀여움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어떤 영상물이 얼마나 '영화'다운지와 그 작품이 갖는 가치는 별개일 것이다.)
여기서 나는 영화라는 예술 분야가 지니는 특징을 두 가지 정도 짚고자 한다. 하나는 '어둠의 예술'이라는 특징이고, 하나는 '종합예술'이라는 특징이다.
<그들 각자의 영화관>에 등장했던 적지 않은 단편이 보여줬다시피 영화를 상영하기 위해서는 어둠이 필요하다. 영화는 필름을 영사기로 투영하면서 탄생한다. 그 투영된 빛을 보기 위해서는 나머지 사방이 어두워야 한다. 그래서 어둠은 영화의 전제다. 하지만 동시에 이 전제가 다소 낡은 것이 되었음을 차마 부정할 수 없다. 영화는 갈수록 다양한 기기, 어둠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자체 발광하는 기기에서 상영되며, 역으로 여타 영상도 어둠 속에서 볼 때 더 선명하게 잘 보인다. 그렇다면 '어둠의 예술'이라는 영화에게 고유(했던)한 문법을 어떻게 간직하거나 재해석할 수 있을까?
하나의 가설이긴 하지만, 나는 <그녀>가 영화의 외적 전제였던 어둠을 영화 안으로 끌어들여 내재적 전제로 바꾸려는 시도의 일환이라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어둠의 예술을 이어나가는데, 특이하게도 그 방식이 '점멸'이다. <그녀>는 점멸하는 영화다. 이 점멸의 감각은 영화사 로고와 동시에 들려오는 'Milk & Honey'라는 오프닝 스코어에서 시작된다. 꺼졌다가, 켜졌다가, 꺼졌다가, 켜졌다가… 그 외에 영화가 흐르는 동안 귀에 들려오는 스코어도 비슷한 패턴을 반복한다. 켜졌다가, 꺼졌다가… 한 번 'Loneliness #3', 'Some Other Place', 'Owl' 등을 들어보면 어느 정도 비슷한 인상을 받으리라 본다.
물론 음악에서 그치지 않는다. 화면은 끊임없이 어두워졌다가, 밝아졌다가, 어두워진다. 다만 템포가 그렇게 빠르지는 않다. 주욱 어두웠다가, 주욱 밝다. 밝을 때도, 무척 밝다. 테오도르가 사만다와 진솔한 이야기를 할 때, 화면은 지극히 어두우며, 절정에 이르는 순간 빛은 아예 자리를 비워버린다. 영화는 어둠을 서사 진행의 한 요소로까지 쓰는데, 어둠은 진정 테오도르가 자신과 자기가 맺는 관계를 탐구하고, 어쩌면 자기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이다. 물론 자기 한계를 넘어선 상태를 지속시킬 수는 없지만, 그 체험이 바로 이별을 극복하고 새로운, 다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밑거름이 된다.
어둠 속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덕분에 환한 햇빛 아래 일상이 계속된다. 다시 한 번 에이미의 대사를 들어보자. "우린 삶의 1/3 정도를 자면서 보내는데, 어쩜 그때가 가장 자유로운 시간일지도 몰라." <그녀>가 반복하는 점멸은 단순히 시간의 흐름만을 지시하지 않는다. 눈을 뜨기 위해 눈을 깜박여야 하듯이, 영화는 어둠이라는 간격을 통해 다음의 밝음으로 넘어가게 해준다. 이 어둠의 재해석이라는 측면에서, 일단 <그녀>는 자기 안에 영화다움을 간직한다.
다음으로 종합예술. 영화에는 보는 즐거움이 있다. 그리고 듣는 즐거움도 있다. 그렇다면 영화가 종합예술인 까닭은 시각과 청각을 모두 자극하기 때문일까? 가끔 거기에 만족하는 영화도 더러 있는 것 같고, 나도 분명 그런 영화들을 즐긴다. 하지만 보여줄 수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영화를 체험한다고 하기에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체험한다는 것은 자기가 '몸소' 겪는다는 것인데 시청각이 시청각에 머무른다면, 나는 단지 무언가를 듣고 보았을 뿐, 몸소 겪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바로 시청각이 시청각을 넘어설 때 체험이라는 기적이 일어난다.
<그녀>는 무언가 '보여주기'를 거부하는 영화다. 조금 선회해주자면 시각에 머무르기를 거부한다. 여기서 다시 점멸을 말하게 된다. 이 점멸, 이 깜박임은 눈을 감았다 뜨는 효과를 연상하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매우 간접적이긴 하지만, 눈꺼풀의 촉감을 느끼게 된다. 테오도르가 누울 때 반쯤 잠긴 눈꺼풀을 통해 영화를 바라보게 되며(실제 우리 눈꺼풀이 반쯤 잠긴 게 아니라 화면이 그렇게 구성되어 있다), 반대로 해변가 장면에서는 눈꺼풀을 파고드는 햇빛이 그대로 전달된다. 영화는 단지 눈에 상을 비추는 데 그치지 않고, 어둠과 빛이 눈에 닿게 한다. 어둠과 빛은 눈에게 도달한다. 그리고 이것은 시각을 넘어서는 촉각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빛과 어둠을 매만진다.
아니, 영화는 내내 공감각의 문제를 다소 노골적으로 다룬다. 사만다는 피아노 곡으로 장면을 그려낸다. 그리고 음악으로 사진을 찍는다. 무엇보다 <그녀>는 영화라는 매체가 촉각적인 매체가 아니라는 점과, 테오도르와 사만다가 실제로는 서로를 만질 수 없다는 점을 연결시킨다. 즉 서사(의 조건)와 영화적 매체가 긴밀한 상관관계를 갖게 된다. 그래서 영화는 최대한 시각을 정제한 채(어쩌면 반대로, 화면을 꺼버리면서 압도적인 시각을 제공하여), 관객에게 촉각을 전달하려 하고, 동시에 주인공들에게도 촉각을 전달하려고 한다. 여하간 테오도르는 사만다에게 "널 만질 수 있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며, 어느 순간부터 사만다는 "내 피부가 느껴져."라며 "네가 느껴져."라고 고백한다. 둘은 "우린 여기 함께 있어."라고 외치지만, 그 함께 있음이란 바로 서로를 어루만지는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서 체험의 기적, 종합예술이 발현된다.
무엇보다 만남과 이별이라는 영화의 주제가 점멸이라는 영화의 방식과 맞닿아 있다. 헤어짐이 있어야 마주침이 있듯, 어둠이 있어야 빛이 가능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에이미가 테오도르와 어둠 속에서 서로 의지하는 건 그래서 아주 우연은 아닐 것이다. 모든 만남은 어둠을 필요로 한다. 방식에 주제를 투영한다는 점에서, <그녀>는 영화다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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