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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그리고 <베스트 오퍼>

  • 분류
    단상
  • 등록일
    2014/07/02 20:48
  • 수정일
    2014/08/19 00:55
  • 글쓴이
    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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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종로 거리 걸으면서 여긴 참 도시구나 싶었다. 적적한 여름 공기 가르며 빨간 옷을 걸친 남성을 지나쳐 버스 정류장으로 다가섰다. 이내 기다리던 버스가 서 있는 곳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앉을 수 있을까 내심 기대하고 올라 탔으나 마지막 자리가 눈 앞에서 사라졌다. 라디오를 통해 울려퍼지던 음악은 멎고 뉴스가 나왔다.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그녀>라는 영화를 보고 귀가하는 길이었다. 나름 밝고, 나름 무거운 영화의 줄거리는 잠시 뒤로 하더라도, 중간 중간 명도가 낮은 영화였다. 불이 꺼진 홀 안에서 혼자 빛나는 스크린 위로는 마찬가지로 불이 꺼진 침대 위 테오도르가 비쳐진다. 창백한 자막만이 화면의 균형을 깨뜨리며 눈을 괴롭혔다.

 

 

영화는, 우습게 들릴 수도 있지만, 굳이 보여주려고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잘 정돈된 직각 구도들과 각자 있을 자리에 알맞게 채색된 색감을 못 본 척 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그런데 그 깔끔한 사물들은 왜 그 자리에 있었을까? 마치 두 주인공의 관계가 간직하는 유동성과 부드러움을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관계가 놓였다. 시각이 자리를 내준 곳에.

 

 

사만다는 그렇게 테오도르를 만졌고, 테오도르도 사만다와 접촉했다. 손 끝으로 곤두세우는 팔의 솜털 하나 하나와 포개진 입술, 그 어루만짐은 음성을 타고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어루만짐이었다. 터질 듯한 설렘으로, 익숙한 긴장감으로, 오르가즘은 가장 눈부신 어둠이었다.

 

 

그런데 사만다는 무언가 또 다른 것이 된다. 산장에서 사만다와 테오도르, 철학자 셋이서 대화한다. 사만다는 음성으로는 전달하기 힘든 감정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그 순간, 질적 도약이 일어난다. 유동적이었지만 여전히 서로를 만질 수 있던 둘인데, 사만다는 기화하기 시작한다. 마치 테오도르 옆에서 끓던 주전자 속 물처럼. 사만다는, 더 이상 만질 수 없는 존재가 되고, 테오도르를 떠난다.

 

 

둘은 이별한다. 이별은 힘들다. 납득되지 않는 방향으로 흐른다. 이제 사만다의 목소리는 사라진 채 테오도르라는 피사체만 남는다. 안개 뿐인 앞을 걸어가는 테오도르지만, 이미 어루만짐의 세례는 이루어졌다. 그 교감의 충만함이. 테오도르는 두 발을 딛고 에이미와 옥상으로 알라간다. 나란히 앉는다. 그 어두운 고요 가운데 에이미는 테오도르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베스트 오퍼>

 

 

비오는 거리를 보며 잠깐 7년 전 일을 떠올린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던 그 여름 밤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다른 사람이었을 것이다. 만물이 서로 영향을 미친다고는 하지만, 조금 더 솔직해지자. 세상 모든 사건과 사물이 한 개인에게 같은 의미를 지니진 않는다.

 

 

여기서부터는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 <베스트 오퍼>의 줄거리와 개인 감상이다. 스포일링이 포함되어 있다. 엔니오 모리꼬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볼만한 영화이지 않을까 싶다.

 

 

경매사이자 감정인인 버질 올드먼은 어느 날 한 여성으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클레어 이벳슨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부모님이 남기고 간 저택에 있는 물건들을 감정해서 팔아달라고 부탁한다. 결벽증이 있는 버질, 광장공포증을 앓는 클레어. 둘은 천천히 사랑에 빠지고 병도 차차 치료된다. 그리고 반전. 클레어는 버질이 비밀스레 모아오던 회화 컬렉션을 훔치려고 연기했을 뿐이다.

 

 

버질이 컬렉션을 모을 수 있도록 도왔던 친구 빌리 휘슬러, 자동인형을 조립하며 연애 상담을 하던 로버트 모두 한 패였다.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어 충격을 받은 버질. 버질은 프라하의 한 카페에 들어가 클레어를 '기다린다'.

 

 

모든 게 거짓이었다! 그리고 질문이 꼬리를 물기 시작한다. 자동인형도 로버트의 위조품이었나? 버질에게 상담하러 온 로버트의 여자친구도 연기였을까? 관리인도? 다락방에 숨었던, 비 쏟아지는 날 버질을 구하러 달려온 클레어도? 컬렉션 앞에서 눈물을 흘린,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클레어마저? 버질의 결벽증은 호전된 것이 아니었던가? 버질은, 따지고 보면 조금 재수없는 이 할아버지는 마침내 세계에 의지하고 자기를 조금이나마 열기 시작하지 않았던가?

 

 

의문은 끝끝내 이 영화 자체를 정조준한다. 굳이 장르적 철저함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영화는 2시간 가까이 자신을 사랑 영화, 성장 영화로 소개하고, 그렇게 발전해 나가고 또 그렇다고 관객을 끊임없이 설득한다. 그런데 끝에 가서 그 가면을 벗고선 사실 범죄 영화였음을, 반전 영화였음을 갑작스럽게 밝힌다. 애잔한 로맨스를 지켜보던 관객으로서는 충격일 수밖에. 그렇다면 이 영화, 영화 자체는 사랑 영화에 대한 위조품인가?

 

 

글쎄, 결국 '진짜' 사랑 이야기는 아니었으니 위조품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고백하듯 "모든 위조품에는 진품의 미덕이 숨겨져 있다." 그러므로 우아하고 깊은 사랑 영화를 부단히, 부단히 흉내낸 이 영화는, 어딘가에 사랑 영화일 수밖에 없는 흔적을 감춰 놓았다. 클레어 역시 그저 속임수일 수만은 없는, 진정한 이별의 미덕을 버질 마음에 담아 두었다. 그래서 버질은 사기행각의 피해자로서 행동하지 않고 연인의 과거를 더듬어 찾아가는 사람이 된다.

 

 

이제 비가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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