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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무방비 도시>

<영화 무방비 도시>

후배의 좁은 자취방에서 나보다 훨씬 나이가 어린 ‘영화 마니아’들 틈에 끼어 앉아 영화 『무방비 도시(Open City)』를 본 적이 있습니다. 영화의 뒷부분 절반은 이탈리아 지하군 포로에게 가해지는 나치 친위대의 무자비한 고문과 그에 대한 숭고한 저항이 그 내용의 중심입니다. 화면 가득 폭력이 난무하고 비명이 넘쳤습니다. 같은 인간이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저럴 수 있는가…. 영화를 보고 나서 젊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건, 마치 공포영화로군요.”

“웬만한 공포영화보다 더 무섭군요.”

그러나 우리나라의 ‘흔해빠진’ 운동권 출신들에게 영화 『무방비 도시』에 나오는 고문은 그렇게 낯선 장면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7, 80년대 십수년 세월 동안 줄잡아 수만 명이 그런 고문을 당했습니다. 경찰서에서, 대공에서, 안기부에서, 보안사에서… 잡혀간 운동권들에게 가해진 가공할 고문은 그야말로 우리나라에서 ‘흔해빠진’ 일이었습니다.

영화를 보며 사람들은 “인간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가?”라고 혀를 찼지만, 인간은 충분히 그럴 수 있었습니다. 1981년, 20대 후반의 팔팔한 사내였던 내가 말로만 듣던 ‘비녀꽂기’, ‘통닭구이’를 당하며 사흘 밤 동안 거의 거꾸로 매달려 있다시피 했을 때 ‘인간의 탈을 쓴’ 수사관들은 손 털고 뒤돌아서면 딸아이의 대학입시 걱정을 했고 운전면허시험에 떨어진 마누라 걱정을 했습니다. 그들도 집에 돌아가면 여느 인자한 아빠나 자상한 남편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인간은 충분히 그럴 수 있었습니다. 나에게 그 짓을 했던 사람들 중에 한 명의 이름을 아직도 똑똑히 기억합니다.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해 여름, 장마철이 되었을 때, 나는 팔이 쑤셔서 우산조차 들 수 없었습니다. 가슴에 생긴 검은 멍 자국은 몇 개월 동안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고문을 견디어 내고 ‘죽지 않고 살았다’는 걸 깨달았을 때 우리에게 들었던 생각은 일종의 자신감이었습니다. “앞으로 남은 인생 동안 우리에게 그만큼 큰 고통은 다시 없으리... 그러니까 우리가 앞으로 이기지 못할 고통은 없다.” 과연 그랬습니다. 그날 이후, 그 고통의 절반쯤 되는 어려움도 아직까지 겪어보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남은 인생에서도 그럴 것입니다.

죽지 않고 살아났을 뿐이지, 우리가 그 고문을 이겨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문을 이기는 것은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나보다 먼저 잡혀 며칠 동안이나 고문을 당했던 후배는 “나는 모르지만 하종강 선배는 알지도 모른다.”고 말해버렸고, 그래서 잡혀간 나는 사흘 만에 아끼는 후배의 이름들을 수사관에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뒤 며칠 동안 나는 후배들이 차례차례 잡혀 들어오는 것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후배들은 내 얼굴을 보고는 “2년짜리 수련회에 왔다고 생각하지요. 뭐.”라고 말하며 오히려 나를 위로했지만, 그날 밤부터 나는 복도에 울려 퍼지는 후배들의 비명을 들어야 했습니다. 깊은 밤, 어두운 복도에서 후배들이 “종강이 형”을 부르며 질러대는 비명을 듣고 있어야 하는 절망감을 아십니까? 그 절망감은 분노가 되어 나의 무기가 되었습니다.

오늘도 결의를 다지면서 머리띠를 묶어 매야 하는 노동자들과 번화한 거리 뒷골목에서 단속반과 숨바꼭질을 벌여야 하는 노점상들과 포크레인 삽날에 무너져 내리는 삶의 터전을 지켜보아야 하는 철거민들과 썩어 문드러진 논밭을 바라보며 이를 가는 농민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진솔한 ‘우리’입니다. 최소한 그들과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내가 죽어도 손에서 놓을 수 없는 내 무기의 최저값입니다.


<버티는 쪽이 이긴다>

그때 영문도 모르고 수사기관에 잡혀간 저는 수사관들에게 따졌습니다.

“도대체 어떤 사건 때문에 내가 잡혀온 겁니까? 도대체 나를 왜 잡아온 거요?”

수사관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 이 새끼야, 여기는 니가 물어보는 곳이 아니야. 우리가 너한테 물어보는 곳이야.”

그들이 사용하는 단어 중에 절반 이상은 욕지거리였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욕을 한꺼번에 들어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죄는 지은 놈이 가장 잘 알 거 아니야. 니 죄는 니가 가장 잘 알 거 아니야? 왜 잡혀왔는지 잘 생각해보면 알 거 아니야?.”

수사관들은 불문곡직 뚜드려 패면서 그렇게 다그쳤습니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내가 지은 죄가 한두가지가 아니니까... 그 중에서 어떤 일이 들통 난 것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유인물이 걸린 걸까? 어떤 대자보가 걸린 걸까? 어떤 집회가 문제가 된 것일까? 저도 열심히 “짱구를 굴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수사관들이 모든 범죄인들을 다루는 수법입니다. 현행범이 아닌 한, 어떤 사건 때문에 잡혀왔다고 절대로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절도범이나 강도범들이 잡히면 그 경찰서 관내의 미해결 사건들이 한꺼번에 여러 건씩 해결되는 겁니다. 절도범이나 강도범들이라고 해서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순순히 자백할 리는 없습니다. ‘도대체 어느 집에서 훔친 물건 때문에 잡혀온 것일까?’ 열심히 짱구를 굴리며 ‘혹시 그 집에서 훔친 시계 때문일까?’ 그렇게 고문을 당할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얘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관철되는 원칙이 있습니다. “버티는 쪽이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수사기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며칠 째, 수사 내용에 진전이 없으면 수사관들도 초조해합니다. 매일 아침 회의할 때마다 상관에게 혼나고 와서는 나에게 화풀이를 하기도 합니다. 때로 고문은 그들의 화풀이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고문을 직접 당하는 것 못지않게 고문을 준비하는 과정 역시 사람의 피를 말립니다. 밤이 되면 철창문을 열고 들어와 “하종강, 오늘도 우리하고 같이 고생 좀 하자.” 말하며 저를 데리고 가서 고문에 필요한 도구들을 하나씩 챙기는 과정 역시, 직접 ‘통닭구이’나 ‘비녀꽂기’ 고문을 당하는 순간 못지않게 사람을 위축시킵니다. 그, 심장이 멎고 피가 마르는 듯한 순간은 당해본 사람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3일째 되던 날, 수사관 한 명이 흘리듯 말했습니다.

“하종강, 네가 예언자야? 네가 어떻게 미리 알고 있어?”

그때 저는 감을 잡았습니다. 제가 후배들에게 미리 말했던 사건은 하나밖에 없었거든요.

“몇 월, 몇 일, 몇 시에 어느 건물 앞에 후배들 데리고 가 있어. 그날 그 건물 옥상에서 유인물이 뿌려질 거야. 하늘에 흩날리는 유인물을 보는 것, 땅에 떨어진 유인물을 직접 집어 들어서 읽어보는 것, 그것이 후배들에게는 좋은 경험이 될 거야.”

유인물 한 장을 가방 속에 넣고 다니다가 불심검문에라도 걸리면 ‘이적표현물 소지 죄’로 구속되던 살벌하고 한심한 시대였습니다. 유인물을 뿌리는 것은 물론, 그것을 집어 읽는 것조차 가슴 떨리고 용기가 필요했던, 그런 시대였습니다.

‘아, 그 사건이구나...’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됐습니다.


<구원의 끈>

공범들은 수사가 끝나야 합방이 됩니다. 저보다 며칠 먼저 잡혔다가 “하종강 선배가 알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해버린 후배를 며칠만에야 철창 안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지경까지 고문을 당하지는 않았는데, 후배는 얼마나 심하게 매달려 있었는지 양쪽 손목이 모두 새까맣게 죽어 있었습니다. 그냥 매를 맞고 있는 것이 오히려 편할 지경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때 잡혀 와서 매를 가장 많이 맞았던 한 후배는 나중에 옷을 벗겨 보니, 등에서부터 허리, 엉덩이, 다리, 발목에 이르기까지 온통 까맣게 멍이 들어 있었습니다. 군데군데 멍이 든 것이 아니라, 마치 커다란 붓으로 검은 먹을 칠하거나 들이부은 것처럼, 몸의 뒷부분이 모두 까맣게 변해 있었습니다. 제대로 살색이 남아 있는 곳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전신구타’라는 비교적 강도가 약한 고문의 결과입니다.

그렇게 붓고 멍이 들었을 때는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수사관들은 그 후배의 퉁퉁 부은 몸에 쇠고기 로스 조각을 갖다 붙였습니다. 손바닥만한 쇠고기 조각들을 후배의 몸에 붙이고 미이라처럼 붕대로 둘둘 감싸 맸습니다. “피는 피로 풀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우리들은 그 와중에도 “먹기에도 귀한 소고기 로스를 살에다 붙이냐?”고 후배를 놀리며 농담을 했습니다.

더 웃기는 건, 그 후배를 나중에 수사관들이 위로한답시고, 그 무렵 여의도에서 열리고 있던 ‘국풍81’ 축제에 데리고 간 것입니다. 기억하십니까? 국민들을 수백명씩이나 죽이고 집권했던 전두환 정권이 자신들의 죄를 감추고 젊은이들의 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해 마련한 행사가 바로 ‘국풍81’이었습니다. 그 행사의 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은 사람이 바로 가수 이 용씨입니다. 그 가수의 노래 ‘바람이려오’를 들을 때마다 저는 그 무렵이 생각나 목이 메입니다.

양쪽 손목이 새까맣에 죽어버린 후배에게 저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내 이름을 얘기했냐?”

후배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며칠 동안, 고문을 당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 ‘하종강 선배는 지금쯤 징역 가는 게 어쩌면 인생에 보탬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팍 드는 거야. 최소한... 형 인생에 마이너스는... 안 될 거라고 봤어.”

그 말이 맞습니다. 그 경험은 저의 인생에 결코 손해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 후배를 원망해 본 적은 없습니다. 지난 겨울, 충청권에 폭설이 내려 고속도로가 며칠이나 막혔을 때, 제가 바로 그곳에 갇혀 있었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몇 시간이면 길이 뚫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몇 시간이 지나도 길은 뚫리지 않았습니다. ‘아, 이건 며칠 걸리겠다. 하루 이틀만에 길이 뚫리지는 않겠다.’라고 판단했을 때, 바로 떠오른 생각이 20여년 전에 당한 고문의 기억이었습니다. ‘그래. 그때 내가 사흘 밤 동안 거의 거꾸로 매달려있다시피 고문을 당하고도 살아났는데, 여기서 사흘을 못 버티냐.’ 그런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차에서 내려, 막힌 고속도로에서 눈사람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보더니 내 차 앞에 서 있는 대형 트럭의 운전기사 청년도 자기 트럭 짐칸에 쌓인 눈으로 눈사람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우리 주변에는 어려 개의 커다란 눈사람들이 세워졌습니다. 고문의 경험은 그렇게 저의 인생에 도움이 됐습니다.

고통스러운 상황에 빠져본 사람은 압니다. 자기가 그 고통으로부터 도망쳐도 욕먹지 않을 수 있는 이유를 자기도 모르게 열심히 찾게 된다는 것을... 자기에게 언제 그렇게 풍부한 상상력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수 많은 생각들이 교차한다는 것을... 열심히 활동해온 노동자들이 고통에 빠졌을 때 우선 그 노동자를 유혹하는 함정은 이를테면 이런 것입니다.

“나 지금까지 해 볼만큼 해 본 거야. 내가 지금 여기에서 포기한다고 욕할 놈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그런 생각부터 시작해서 자기가 그 상황으로부터 도망쳐도 욕먹지 않을 수 있는 이유를 자기도 모르게 찾게 됩니다. 후배가 그런 생각을 한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내가 지금 하종강 선배의 이름을 말해도, 하종강 선배에게는 손해가 안 될 거야. 오히려 인생에 보탬이 될지도 몰라.’ 오죽했으면 후배가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그 생각이 후배에는 고문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구원의 끈’이었던 것입니다.


<송영수를 살립시다>

그로부터, 정확하게 20년이 지난 2001년 가을, 다른 후배가 나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선배님, 송영수 살립시다. 그 놈이 신부전증으로 다 죽게 생겼소. 그런데 81년 5월에 선배가 송영수랑 같이 잡혀서 고문당했을 때, 그 놈이 피오줌을 쌌던 걸 선배님이 봤다고 하지 않았소. 우리가 송영수 민주화운동보상신청 해주려고 하는데, 선배가 증인 좀 해 주시오.”

20여년 전에, 고문을 당하다가 “하종강 선배는 알지도 모른다”고 말했던, 그 후배의 이름이 바로 송영수입니다. 그때 얼마나 심하게 고문을 당했는지 콩팥의 핏줄이 다 터져서 오줌 속에 씨뻘겋게 피가 섞어 나왔습니다. 20년 전에 콩팥의 핏줄이 다 터지도록 고문을 당한 것이 그의 신부전증과 어떤 의학적 관계가 있는지 나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에서 활동하는 한 의사의 말로는 “의학적 상관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습니다.

신부전증을 앓는 후배 송영수는 하루에 피를 네 번씩 투석하면서 삽니다. 그런데 얼마나 열심히 활동하는지 어떤 노동운동가도 그의 앞에 서면 자신이 부끄러워집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지역일반노조’를 창안하고 조직한 사람이 바로 송영수입니다.

‘일반노조’란 역설적이게도 ‘일반적인 노동조합에 가입하기 어려운’ 노동자들이 주로 모인 조직입니다. 환경미화원, 마을버스 기사, 금융기관이나 호텔의 계약직 노동자, 사회복지시설의 사회복지사, 정화업체 종사자, 용역회사의 파견 노동자, 규모가 작은 공장이나 개인병원에 근무하는 사람 등 “기업단위 노동조합을 간신히 만들어도 어용이 되어 살아남거나, 맞서 싸우다가 박살나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될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이 업종과 기업 구별 없이 모여 서로 돕고 살자는 것이 바로 ‘지역일반노조’입니다. 그와 같은 형태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2000. 4. 1. 부산에 설립되었고, 송영수는 ‘부산지역일반노조’의 사무국장과 공동대표를 역임했습니다.

송영수가 ‘일반노조’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것은 그 속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동운동 단체에서 경험을 쌓는 동안 그는 우리 노동운동이 가지는 문제점을 보았고 그때마다 끊임없이 문제제기를 해대는 통에 ‘운동권 내의 운동권’으로 불리면서 스스로 많이 괴로워하기도 했습니다.

신부전증을 앓는 사람들은 투석하기 직전에는 온 몸이 거의 ‘그로기’ 상태가 되어, 손 하나 들어 올릴 힘도 없어집니다. 송영수는 사무실에 투석 장치를 갖다 놓고 활동했습니다. 내가 한번 가서 보니까 사무실 한 쪽 구석에서 피곤에 지친 얼굴로 자신의 몸에 달린 파이프에 투석 장치를 연결해 놓고 투석 작업을 하는 40분 내내 거의 끊임없이 전화가 왔습니다. 송영수는 투병하느라고 머리카락이 다 빠져버린 얼굴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면서 상담 전화를 받았습니다. 전화기 저쪽의 상대방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껄껄 웃기도 하면서 노동조합 활동과 단체교섭에 대한 설명을 했습니다.

송영수가 첫 번째 징역을 살고 83년 년 출옥한 뒤, 공장에 취업하기 위해서 건강진단을 받으면서 신장이 안 좋다는 진단을 처음 받았지만, 그 뒤 현장 활동하랴, 수배기간 동안 도망다니랴, 87년 노동자대투쟁 치르랴, 이래저래 건강을 챙길 여유가 없었습니다. 87년 6월 항쟁 무렵부터 부산지역에서 거의 모든 노동자집회의 ‘판을 짠 사람’이 바로 송영수였고 그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노동조합이 100여개가 족히 넘는다는 건 자타가 모두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자기 몸 돌 볼 여유도 없이 뛰어 다니던 그에게 “건강진단이라도 좀 제대로 받아보라”고 채근을 했던 대동병원노동조합 부위원장이 바로 현재 그의 부인 최애심(38) 씨입니다. 89년 그가 두 번째 징역을 살았을 때에는 징역을 산 날짜 수와 그 기간 동안 최애심 씨가 보낸 편지의 수가 같았다던가... 두 사람은 91년에 결혼했고 아들에게는 승혁(勝革)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혁명을 계승할 것도 없이, 너는 승리하라”는 뜻입니다.


<인간에 대한 예의>

송영수는 작년에 기어이 피를 토하며 쓰러져 병원 응급실로 실려갔습니다. 주차장 바닥이 그가 토한 피로 흥건했다고 합니다. 담당 의사가 “오늘을 넘기기가 힘들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식구들에게 말했을 정도로 그의 상태는 위중했습니다. 송영수가 피를 토하며 쓰러져 동아대병원으로 실려 갔을 때, 그 소식 듣고 응급실로 달려온 노동자들이 순식간에 150여명이나 되었습니다. 동아대병원 응급실 역사상 그런 일은 처음이었답니다.

송영수가 46시간만에 깨어났을 때, 온 몸이 멍 투성이였습니다. 노동자들이 교대로 지켜서서 송영수 깨어나라고 이틀 동안 몸을 계속 꼬집었기 때문입니다. 송영수에게 자신의 간과 콩팥을 주겠다고 줄 선 사람도 아마 150명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은 수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송영수도 웃으며 말하더군요. "그동안 많이 뿌렸으니까, 이제 좀 거둬야지..." 그 말이 전혀 교만하게 들리지 않을 만큼 송영수는 성실한(이것보다 열배쯤 더 강한 표현 없나?) 활동가입니다.

송영수는 21시간이나 걸리는 대수술을 받고 살아났습니다. 지금 그의 몸 안에는 부인 최애심시의 간 가운데 65%가 이식돼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그의 부인 최애심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답답하고 막막하죠. 그래도 수술을 받아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거 아세요? 남편이 10년만에 오줌을 누게 됐어요. 그동안 하루 4번식 반복되는 복막투석 때문에 소변으로 나올 액이 없었거든요. 가슴이 뭉클합니다.”

어느새 그녀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수술을 받으러 서울아산병원에 올라와 있는 송영수를 방문했을 때, 죽음의 문턱에까지 갔다온 사람이 나를 만난 짧은 시간에도 온통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한계를 극복하는 일에 대해서만 얘기했습니다. 열심히 설명하는 그의 말을 듣다가 나는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너는 일찍 죽으면 안 되겠다.”라고 했습니다. 송영수가 나의 후배라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2년쯤 전, 부산에서 송영수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헤어질 무렵 그가 나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하 선배나 나나 모두 비슷한 종류의 인간이라고 생각하는데, 형은 그 일을 20년 넘도록 계속하고 있는 이유가 뭐요?”

나는 조금 생각해 보고 진지하게 그러나 폼 나게 답했습니다.

“나는 아직 세계관이 바뀌지 않았거든. 나는 내 철학을 바꾸지 않았거든.”

그는 내 말을 듣고 픽 웃더니, 잠시 시간을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것들 때문이었다면 나는 운동을 벌써 포기했을 거예요. 나는... 하 선배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어요. 그거 아세요? 그때 나 때문에 고문당했던 사람들, 나 때문에 징역 산 사람들, 그 사람들과의 인연이 나를 이 일에서 떠나지 못하게 한다는 것... 내가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자꾸 형 생각이 나는 거야. 그런 사람들의 얼굴이 자꾸 나를 붙드는 거야. 그동안 내가 만났던 노동자들의 얼굴이 나를 이 일에서 떠나지 못하게 만드는 거야.”

송영수는 자타가 공인하는 이론가였습니다. 후배지만 사상적으로는 저를 지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던 후배가 자신을 20년 세월 동안 지켜온 원칙이 ‘인간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송영수와의 인연이 나를 이 바닥에서 떠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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