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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07/03
    보통사람들의 촛불정치가 가야할 길
    우리별
  2. 2008/07/03
    인터넷 녹색당 깃발
    우리별
  3. 2008/07/03
    [인터넷 녹색당 만화성명서] 생명이 우선입니다
    우리별
  4. 2008/07/03
    작은 위로를 위한 기도처럼
    우리별
  5. 2008/07/03
    우리는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별
  6. 2008/07/03
    인터넷 녹색당 선언
    우리별

보통사람들의 촛불정치가 가야할 길

촛불당 혹은 녹색당은 이미 있다?!?


#1 몇만명의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과 안전에 대해 경쟁위주 성장위주의 정부를 비판한다

#2 정부의 정책 기조를 변화시키고 장관급 인사의 경질에 영향을 미친다

#3 국민주권과 생명에 대한 가치와 새로운 저항문화 확산을 이루고 있다

#4 대의제적이나 다수결에 의한 수직적 대표기구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직접민주주의적이고 탈중심적인 다양한 소수의 자발성에 기초하고 있다

#5 선거제도에 기초한 제도정치에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대안문화/저항정치를 만들고있다


⇒ 이것은 한국형 녹색당을 만들겠다던 초록정치연대의 활동이 아닙니다.

   보통사람들이 만들고 있는 2008년 촛불문화제의 현실입니다.

   이런 역할을 하고 있는 집단을 ‘녹색당’ 혹은 ‘촛불당’이라고 부른다면 아전인수일까요?


지금과 같이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뒤엉켜 새로운 시대로 조금씩 바뀌고 있는 지금,

하나의 정당이 현실 제도권 정치영역과 비제도권 정치영역의 조화로 이루어진다면

2008년의 촛불정치는 적어도 녹색당의 비제도적인 영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기존에 정치꾼들이 하던 방식으로 민심을 “대변‘한다고 떠드는 정당이,

하다못해 진보신당 만큼의 수준으로 만들어진다고 가정한다면, 이런 정당이 창당 후 몇 년 내에

2008년 촛불문화제가 만들고 있는 ‘촛불정치’의 영향력을 가질 수 있을까요?


즉, 국민주권 생명정치의 녹색정치는 이미 몇십만 명의 주체가 형성되고 있고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그동안 초록정당 창당세력이 주장하였던 가치들과 2008년 촛불정치의

현실을 비교하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 표1 > 한국형 녹색당 창당세력인 초록정치연대의 초록당창당특별위원회 제안서(2007. 2)

근대정당

대안정당

당원(세력) 확대가 목표

가치-문화 확산이 목표

폐쇄적

개방적. 비당원도 의사결정 공직후보 가능

대의제적 운영, 다수결민주주의

직접민주주의, 생명대표성, 소수의견의 존중

수직적

수평적

중앙당 중심

탈중심, 풀뿌리의 자율성

정당 관료주의, 방대한 중앙당조직

네트워크형 사업, 정책연구소, 연수원 등 외부기관에 아웃소싱(?)

인물 중심

가치-문화, 아젠다 중심

선거에 올인

선거+대안문화/저항의 정치


< 표 2 > 촛불문화제에서 보이는 여섯가지 새로운 탈현대적 정치적 흐름 (민운연 촛불토론회,2008.6)

 

현대적 정치

탈현대적 정치

성  격

대의정치

참여정치

영  역

제도정치

생활정치

형  태

권위정치

인정정치

이  슈

계급정치

위험정치

수  단

아날로그 정치

디지털 정치

동  력

욕망의 정치

가치의 정치



녹색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없다!?!


그러나 이런 촛불정치가, 참여연대, 환경연합, 녹색평론이나 진보신당, 사회당과 같은

정당‘적’인 영향력을 갖는다하더라도(실제는 더 클수도 있지만) 예를들면 2010년 지자체

선거에서 이런 ‘촛불당’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어떤 후보에 대한 낙선운동이나 지지운동

정도입니다. 비제도정치 영역에서는 문화를 바꾸고 대통령과 정부를 쥐락펴락하고 대한민국

전체를 흔들고 있는데, 제도정치에서는 저들만의 잔치로 돌아가는 도로아미타불입니다.


어찌보면 그러한 절망감이 2008년 촛불정치의 불꽃을 비바람에도 온갖 언론의 악선동에도

꺼지지 않게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는 결코 2008년 촛불정치의 한계를 핑계로 그 자체의 의미가 없다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촛불정치를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비제도적 정치영역에서 보통사람들

스스로 주인공이 되는 축제로 자리잡도록 하고, 촛불정치가 제도정치 영역에서 어떻게

열매를 맺을 수 있고 그것이 소수의 정치가들이 아니라 보통사람들 자신의 입으로 들어가게

할 것인가의 문제, 2008년 대한민국이 넘어야할 봉우리입니다)


새로운 정치의 반쪽에서 국민들은 이미 한국의 최대 다수 정당을 만들고 있는데

나머지 반쪽에서는 그 결실을 보통사람들의 입에 들어가도록 하는 정치가나 정당은

눈씻고 보아도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새 술은 넘치고 있는데 담을 그릇이 없는 것입니다.


촛불을 들고 이렇게 거리로 나온 우리가 가야할 길은 단순하고 명쾌합니다.

1. 꺼지지 않는 마음속에 굳게 다짐한 하나의 촛불이 됩시다

   : 촛불정치를 기성 정치인들의 출세에 갖다 바칠 수는 없습니다.

     앞으로 벌어질 촛불행진에서 뜻을 함께하는 보통사람들을 모아 봅시다


2. 촛불정치가 결국은 보통사람들 스스로 만드는 국민주권 생명정치의 새로운 정치로,

   더디가도 결국 그리로 갈 수 밖에 없음을, 그 어느 누구도 우리 대신 우리의 삶을

   결정하도록 내맡길 수 는 없다는 것을 끈질기게 설득하고 서로서로를 격려합시다


3. 촛불의 광장에서 보통사람들이 만드는 새로운 정치가 현실 정당정치 속에서 어떻게

   가능한지를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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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녹색당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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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녹색당 만화성명서] 생명이 우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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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위로를 위한 기도처럼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는 하는 일마다 행운이 따라서 엄청난 돈을 벌었습니다. 제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평생 다 못 쓸 만큼 말이지요. 저희 가족이 필요로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옥스퍼드 대학교 근처에서 열린 한 집회에서 어떤 저명한 사업가가 강연을 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확고한 의지와 강한 성품이 배어 있었으나, 일순간의 망설임은 강렬한 외모 뒤에 숨겨진 속 깊은 감정을 노출시키고 말았다. 멋지게 그을린 그의 뺨 위로 눈물 한 방울이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가 그처럼 돈을 많이 벌려고 애쓴 동기는 단순합니다. 돈으로 사람을 사서 제가 하기 싫은 일을 맡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결코 다른 사람이 대신 해줄 수 없는 일이 한 가지 있더군요. 그것은 바로 제 인생의 목적을 발견해서 그것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저는 어떤 대가든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 개개인은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든 이 질문에 봉착하기 마련이다. 즉 어떻게 내 인생의 중심목적을 발견하고 그것을 성취할 것인가? 물론 이 질문보다 논리적으로 선행하는, 어쩌면 더 깊은 질문들도 있다. 예를 들면, 나는 누구인가, 삶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등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 첫 번째 질문만큼 큰소리로 집요하게 제기되는 것은 거의 없다. 우리는 뭔가 변화를 도모하고 싶어한다. 우리는 좋은 유산을 남기기를 원한다.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의 말처럼 우리는 "좀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놓고 떠나기를" 원한다. 우리 가슴속에는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을 성취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다.

 

우리 속에 있는 이 깊은 갈망이 충족되지 않는 한 다른 모든 성공의 척도--부, 권력, 지위, 지식, 친구 관계 등--는 하찮고도 허무한 것이 되고 만다. 어떤 사람들은 그 공허감 때문에 헨지 소로우(Henry Thoreau)가 묘사한 '조용한 자포자기의 인생'을 살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공허감과 무목적성으로 인해 더 큰 절망의 심연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초고에는 인간이 그 목적에 대해 회의할 때 영혼에 어떤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나는지를 묘사하는 대심문관의 말이 나온다.

 

"왜냐하면 인간 존재의 비밀은 그저 생존하는 것뿐 아니라...무엇인가 확실한 것을 위해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사는지 확고하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인간은 삶을 받아들일 수 없고 이 땅에 살아 남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을 파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을 최고선(summum bonum), 궁극적인 목적, 인생의 의미 등 무엇이라 불러도 좋다. 하지만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고 성취하는 문제는 우리 인생의 모든 단계에 걸쳐 무수한 방식으로 부각되기 마련이다.

 

십대들은, 가정과 학교라는 울타리 너머 어지러울 정도로 선택의 목이 넓은 자유의 세계가 손짓할 때 이것을 느낀다.

 

대학생들은, 한때 "세계는 나의 밥이다"라고 느끼던 흥분이,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엄연한 현실 앞에서 식어 갈 때 이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삼십대 초반이 되면, 한때 그들 부모가 가졌던 기대와 동년배들의 삶의 방식 그리고 연봉과 경력의 유혹 너머에 있는 잔인한 현실을 일상적인 일터에서 직면할 때 이 문제를 알게 된다.

 

중년에 접어든 사람들은 자신이 생명으로부터 부여받은 탈렌트(소질)와 일이 맞지 않아 자신이 부적격자라는 생각이 날마다 들 때 이 문제와 맞닥뜨린다. "과연 남은 생애 동안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을까?"

 

어머니들은 자식을 다 키운 후 인생의 다음 단계의 공백을 메워 줄 고상한 목적이 무엇일까 고민하면서 이것을 느끼게 된다.

 

굉장한 성공을 거둔 사십대와 오십대의 경우에는, 자신의 성취가 그 성공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그리고 더 깊은 차원에서 인생의 목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때 갑자기 이 문제에 직면한다.

 

사람들은 인생의 모든 다양한 전환기에 이 문제에 부딪힌다. 이사를 할 때, 직업을 바꿀 때, 결혼 관계가 깨어질 때, 건강에 적신호가 켜질때 등이 그러한 때다. 이러한 전환은 우리가 인식하는 개인적인 의미에 도전하기 때문에 변화 자체보다도 그 변화를 분석하고 다루는 것이 더 길고도 어렵게 느껴진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이들 역시 때로 이 문제에 다시 직면한다. 인생은 결국 무엇인가? 지금까지 성취한 것들은 진정한 성공인가? 그 성공은 다른 것들을 희생하면서까지 이룰 만한 가치가 있는가? 크든 작든 온 세상을 얻었지만 영혼을 싼 값에 팔아 넘긴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지는 않았는가? 워커 펄시(Walker Percy)가 썼듯이 "당신은 만점을 얻고도 인생에서 낙제할 수 있다."

 

바로 이 문제, 곧 자신의 인생 목적에 관한 의문이 19세기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를 사로잡았다. 그가 잘 알고 있었듯이 개인적인 목적은 철학이나 이론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순전치 객관적인 문제도 아니고 유산처럼 상속되는 것도 아니다. 많은 과학자들은 이 세계에 대한 박식한 지식을 갖고 있고, 많은 철학자들은 거대한 사상 체계를 섭렵할 수 있고, 많은 신학자들은 종교의 심오한 경제를 파헤칠 수 있으며, 많은 저널리스트들은 어떤 주제든 그럴듯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이론에 불과하며 개인적인 목적 의식이 없다면 그저 허망한 것이다.

 

우리는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우리 자신보다 더 큰 목적을 발견하고 그것을 성취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처럼 좀더 큰 목적만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스스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높은 곳까지 이르도록 이끌 수 있다. 우리 각자에게 진정한 존재 목적은 참으로 개인적인 것이요 열정의 대상이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기 위해 그리고 왜 여기에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그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그것은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진정 내가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참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며, 내가 그것을 위하여 살기도 하고 죽을 수도 있는  사상을 찾는 것이다"

 

오늘날 고도로 현대화된 세상에서 이 질문은 매우 절박한 것인데 이유는 간단하다. 오늘날 인생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열망이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을 정도로 강렬한 데는 세 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 인생의 목적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경험 가운데 가장 깊은 차원의 문제다.

둘째, 현대 사회가 모든 영역에 걸쳐 선택과 변화의 기회를 최대로 제공하게 되면서, 우리 모두가 목적 지향적인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기대감을 한층 드높였다.

셋째, 현대 사회의 특징은 목적을 찾는 데 크게 방해가 되고 있다. 인류 역사상 있었던 수많은 문명 중 현대 서구 문명은 인생의 목적에 관해 합의된 대답이 없는 최초의 문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은 역사상 그 어떤 시기보다도 이 문제를 둘러싼 무지와 혼돈과 갈망이 크다고 하겠다. 현대인의 고민은 우리가 이러저러한 것을 소유하고 있지만 삶의 목적은 너무나 빈약하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시간은 있지만 돈이 별로 없다고 느끼고, 또 어떤 이들은 돈은 있지만 시간이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에게 공통적인 것은 이전보다 더욱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혼으로는 더욱 빈곤한 상태에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사회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대답들이 부적합하다는 것은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자본주의는 창의성과 유용성을 다 발휘해도 '왜'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만족스러운 답을 줄 수 없다. 그것은 자체만으로는 문자 그대로 의미 없는 것으로서, 단지 하나의 메커니즘에 불과할뿐 의미의 근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밖에 정치, 과학, 심리학, 경영, 기술, 수많은 현대 이론도 마찬가지다. 톨스토이가 과학에 관해 말한 바는 다른 모든 것에도 적용된다.

 

"과학이 무의미한 이유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질문, 즉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이며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 아무런 대답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목적을 찾는 노력을 벗어나서는 어떤 대답도 있을 수 없으며, 그 노력에 대한 대답 가운데 소명에 응답하는 것보다 더 깊고 만족스러운 대답은 없다,

 

그러면 '내가 이 세상에 난 소명(calling)이란 무엇인가?'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해 보겠다.

 

소명이란, 하나님 혹은 절대자 아니면 대우주나 대자연 또는 부모님(뭐라고 해도 좋다.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믿음의 크기만큼, 우리 생명의 근원을 가리키는 것이라면)이 우리를 이 세상에 부르셨기에, 그 부르심과 은혜에 응답하여 우리의 모든 존재, 우리의 모든 존재, 우리의 모든 행위, 우리의 모든 소유가 헌신적이고 역동적으로 그 의미에 조심스럽게 다가간다는 진리이다.

 

이 때문에 소명이야말로 인간 경험 중 가장 포괄적인 방향 전환이요 가장 심오한 동기 부여, 곧 모든 역사에서 삶의 궁극적인 이유가 된다.

 

자 다시한번 스스로에게 묻자.

당신은 존재 이유, 곧 인생의 뚜렷한 목적 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혹은 당신의 인생은 변화무쌍한 결심의 산물이거나 당신 외부에 있는 무수한 힘들이 작용한 결과인가? 당신은 성공 지향적인 삶을 넘어 진정 의미 있는 인생을 살기 원하는가? 자기를 의미하는 인생은 항상 기대에 못미치며, 세상을 부정하는 해결책은 결국 진정한 해답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는가?

 

 

오스 기니스의 < 소명 :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고 성취하는 길 > 중에서

(Os Guinness, The Call : FINDING AND FULFILLING THE CENTRAL PURPOSE OF YOUR LIF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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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여러가지 경우에 있어서 (우리가 처한) 이 문제들은 세계 곳곳의 엘리트 사회가 영위하고 있는,

자연환경을 파괴하지 않고는 유지할 수 없는 생활방식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생활방식은 서구 세계에서 시작되어 그들의 가치 (또는 무가치함) 및 그들의 기술과 함께

개발도상에 있는 여러 나라에 수출되어 왔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지구를 파괴하는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60억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으며 그들 모두가 먹을 것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거대한 다국적 기업들이 힘을 행사하며 세계 시작에서 막대한 이익을 쟁취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는 것을 보아 왔습니다. 굶주린 사람들의 배를 채워 주기 위해, 또는 오늘날의

물질주의적인 도시 엘리트들의 요구(수요가 아니라)를 만족시키기 위해 농사짓는 방법이

달라졌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큰 힘을 지닌 기업들(권력 쟁취 과정에서 이들의 지지와

후원을 받은 정부의 도움으로 더욱 그 힘은 커졌습니다)의 목표는 가능한 많이, 가능한 값싸게

먹을거리를 생산해서 주주들에게 최대의 수익을 안겨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농업용 화학 물질로 오염된 땅과 물, 공기 때문에 사람과 동물, 그리고 환경이 병들고

있는, 심지어는 새로운 병이 생겨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열대 우림은 소에게 먹일 옥수수를

기르기 위해 잘려 나갑니다. 우리의 식탁에 올려지는 동물들은 가장 짧은 시간 안에 동물

한 마리당 하루 수익을 최대로 끌어올리기 위해 몸을 움직일 공간도 없이, 생명으로서의

존엄성도 지키지 못한채 사육됩니다. 몸무게를 최대한으로 불리기 위해, 최대한 많은 젖을

생산하기 위해, 가능한 많은 알을 낳도록 자연스럽지 못한 먹이을 먹으며 자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기업들이 세계 곳곳의 농토와 우리가 먹을 식량으로 자라게 될 씨앗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들은 씨앗이 자라는 방법까지 통제하고 있습니다. 오염된

광대한 논밭에서 단일 경작으로 농사를 짓게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기업들이

육류의 생산까지 거머쥐고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또 전통적인 방식으로 농사를 짓는 소규모의

자작농들을 마지막 한 사람까지 완전히 몰아내려 하고 있다는 것도 모릅니다.

한때는 그 지역에서 나는 농산물을 주로 팔던 지역 식료품점까지 이러한 다국적 기업들이

매우 빠른 속도로 장악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각 지역에서

생산되는 많은 먹을거리들, 곡물의 풍부한 다양성 등이 우리의 먹을거리와 문화까지 지배하려는

기업들 때문에 점차 심각한 위기에 몰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들이 우리와 우리의 땅, 그리고 우리의 먹을거리 사이에 장벽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

장벽은 우리가 음식을  한 입 먹을 때마다 땅이 점점 더 황폐화되고 사람은 점점 더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오늘날 세계 곳곳의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식료품점에서 반(半)조리된 냉동식품을 사다 먹거나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합니다. 그

먹을거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어떻게 키워지거나 재배되었으며 어떻게 조리되었는지, 어디서

나는 재료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도 없이 그 음식물을 먹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먹는 음식이 그 동네의 식료품점에 진열되기 위해 얼마나 먼 거리를

이동해 왔는지, 그것이 그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에너지와 자원이 투입되었는지 궁금해

하지도 않습니다.

 

재정적 수익을 올리는데 혈안이 되어 과물같이 변해버린 기없들의 탈취를 중단시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건강과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갈 이 지구의 건강이

주주총회에서의 결정(그것은 당연히 기업의 수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결정일 것입니다)에

좌우되는 이런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거대 기업의 탐욕 앞에서

인간과 동물이 고통을 당하고 환경은 파괴되어 가능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이런 상황들은 정말 우리의 통제권 밖에 있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너무나 많은 복잡한 문제들 앞에서 그만 무기력증에 빠져 버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를 인식하고서도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그저 현상을 되는 대로 인정해 버리려는 태도에서 벗어나라고 큰 소리로 말하고

싶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차이를 만든다"는 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나는 여러분도 자신이 할 바를 깨닫게 되리라는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할 바를

선택하게 되리라는 것도!

 

골리앗에게 맞섰던 다윗처럼 선두에 나서서 거대 기업과 맞서 싸운 아름다운 몇몇의 사람들이

있습니다...세계 곳곳에서 실망과 불안을 느낀 소비자들이 패스트푸드 체인점의 음식을 거부하고

유기농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매일의 생활 속에서 우리가 사들이고 먹는 음식에 대해, 누구로부터

먹을거리를 살 것인가에 대해 윤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실제로 윤리적인 선택을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먹을거리가 길러지고 준비되는 과정을 총체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나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슈들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가 높아지기를 희망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중요한 이슈란 지구의 자연 자원이 고갈되지 않고 유지되도록 하기 위해서, 동물들의 복지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 인간들의 건강을 위해서 중요한 문제들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예전처럼 다시 우리가 먹는 먹을거리와 가까운 관계를 맺고

먹을거리의 본질과 역사를 이해하며 자연에 가까운 식단을 꾸릴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

그래야만 합니다. 우리는 인류역사에서 매우 중대한 시점에 서 있습니다. 기업들이 우리의

먹을거리의 공급을 좌우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우리는 앞으로 반세기 안에 우리를 먹여 살릴

모든 식량 자원을 다 먹어 치우거나 아니면 독성 물질에 오염되도록 만들고 말 것입니다.

 

내게는 손자가 셋이 있습니다. 내가 손자들 또래의 나이였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 지구에

얼마나 해를 끼쳐 왔는가를 생각하면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아픔이 느껴집니다.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파괴로만 치닫던 지금까지의 흐름을 바꾸어 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진정한 변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우리의 식습관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리는 결정(무엇을 사고 무엇을 먹을 것인지) 하나 하나가 지국의 환경과

동물들의 편안한 삶, 그리고 그보다 더욱 중요한 우리 인간들의 건강에 영향을 미칩니다.

 

각자가 할 일을 나누어서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저질러 놓은

해악들이 자못 심각하기 떄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 일들이 즐거운 일이 되리라는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미래를 위한 희망을 가져다 주리라고 믿습니다.

 

함께 손을 맞잡고 가슴을 열면 우리 아이들을 위해 지금보타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조그만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아이들이 거두어들일 수확물은 진정으로

"희망을 위한 수확"이 될 것입니다.

 

제인구달의 <희망의 밥상> 중에서

( Harvest for Hope : A Guide to Mindful Eating, 제인 구달, 게리 매커보이, 게일 허드슨,

사이언스북스2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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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녹색당 선언

 

우리는 어디서와서 어디로가고 있으며

지금 어디까지 와있습니까

-- 2008년 5월, 이렇게 좋은 날

인터넷 녹색당 출범을 알립니다

 

 

 

우리는 모두 안전하고 생명을 귀하게 여길줄 아는

상식이 통하는 세상에서 살고싶습니다.

 

촛불문화제를 보며 생각했습니다.

거리로 나오는 사람들의 좋은 생각들과

우리나라의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나 정부와는 

왜 이렇게 다른 생각을 하는 걸까요?

 

촛불문화제에 많은 국민들이 참여를 하면서

그 성과는 또 왜 민주당 손학규님과 대통령과의 회담이 되고

손학규님이 이명박대통령에게 '팅기는' 힘이 되는 걸까요?

그리고 촛불문화제가 몇몇 정당이나 국회의원들이 사람들에게 광고되는 자리로 이용되고

그런게 정치라고 언론에서 가르쳐주는대로 믿고

우리같은 사람들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나요?

 

요즈음 농수산물 직거래가 유행인데,

그냥 이런 노력들이 곧장 촛불문화제를 실제로 만드는

보통사람들의 한마디가 정치가 되고 정부가 되는,

실제로 우리같은 사람들의 생활이 정말 조금씩 바뀌면 안되는 건가요?

'유통마진'을 빼고 군사독재시절부터 많은 국민들이 노력해서 얻은

민주주의를 그냥 보통사람들이 가져가면 안되나 하는 생각에서

이런 카페를 열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무슨무슨 정당을 만들 힘도 우리는 없습니다.

새벽같이 출근해서 퇴근해서 돌아오면 밥쑤셔 먹고

친구라도 만나면 독한 술 몇잔에 즐거운 마음도 되었다가

시체처럼 쓰러져 잠들기에도 빠듯한 우리에게

거창한 무엇을 할 시간이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근데 왜 이렇게 국가는, 정부는, 정치하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가르치려만 들고

자꾸 우리들의 인생을 좌지우지 하려는 걸까요?

 

촛불문화제에서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하지만

이런 주장이 나오는 것을 보면

역설적으로 현실은 그렇지 않은건가 봅니다.

 

잘은 모르지만 독일에서는 녹색당이라는 정당이 있어

환경파괴나 지구나 생명에 대한 생각을 하고

정치를 한다고 합니다.

 

남의 나라에서 무언가를 베끼고 싶지는 않지만

정말 국민 스스로가 만드는, 보통사람들이 시위나 해서

무슨무슨 선거때 기성정치인 표나 늘려 주는게 아니라

정말 아무 보잘것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를 살기좋은 곳으로 만드는 주인공이 되는

그런 정치를 보고 싶습니다.

 

보잘것 없는 한 아이 아빠이지만

우리 모두의 아이들을 위해

가난하고 배운것은 많지 않지만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는 한 사람이 되고 싶은 소박한 마음으로

무슨무슨 직책이나 명함이 없다고 무슨무슨 교수나 박사가 아니라고 무시당하지 않고

그 사람이 갖고있는 뜻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로 존중되는 그런

조그만 대화의 마당을 열어보고자

정치가들이 뭐라고 하든

우리가 주인이 되어 주인공이 되어

이웃들과 함께 만드는 우리 동네, 우리 마을, 우리가 함께 사는 세상을

지금부터 말없이 시작해 보려고

거창한 간판을 걸고 한번 달려봅니다.

 

2008년 5월 22일

 

인터넷 녹색당

http://cafe.naver.com/greencomm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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