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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7/03
    작은 위로를 위한 기도처럼
    우리별

작은 위로를 위한 기도처럼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는 하는 일마다 행운이 따라서 엄청난 돈을 벌었습니다. 제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평생 다 못 쓸 만큼 말이지요. 저희 가족이 필요로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옥스퍼드 대학교 근처에서 열린 한 집회에서 어떤 저명한 사업가가 강연을 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확고한 의지와 강한 성품이 배어 있었으나, 일순간의 망설임은 강렬한 외모 뒤에 숨겨진 속 깊은 감정을 노출시키고 말았다. 멋지게 그을린 그의 뺨 위로 눈물 한 방울이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가 그처럼 돈을 많이 벌려고 애쓴 동기는 단순합니다. 돈으로 사람을 사서 제가 하기 싫은 일을 맡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결코 다른 사람이 대신 해줄 수 없는 일이 한 가지 있더군요. 그것은 바로 제 인생의 목적을 발견해서 그것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저는 어떤 대가든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 개개인은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든 이 질문에 봉착하기 마련이다. 즉 어떻게 내 인생의 중심목적을 발견하고 그것을 성취할 것인가? 물론 이 질문보다 논리적으로 선행하는, 어쩌면 더 깊은 질문들도 있다. 예를 들면, 나는 누구인가, 삶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등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 첫 번째 질문만큼 큰소리로 집요하게 제기되는 것은 거의 없다. 우리는 뭔가 변화를 도모하고 싶어한다. 우리는 좋은 유산을 남기기를 원한다.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의 말처럼 우리는 "좀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놓고 떠나기를" 원한다. 우리 가슴속에는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을 성취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다.

 

우리 속에 있는 이 깊은 갈망이 충족되지 않는 한 다른 모든 성공의 척도--부, 권력, 지위, 지식, 친구 관계 등--는 하찮고도 허무한 것이 되고 만다. 어떤 사람들은 그 공허감 때문에 헨지 소로우(Henry Thoreau)가 묘사한 '조용한 자포자기의 인생'을 살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공허감과 무목적성으로 인해 더 큰 절망의 심연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초고에는 인간이 그 목적에 대해 회의할 때 영혼에 어떤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나는지를 묘사하는 대심문관의 말이 나온다.

 

"왜냐하면 인간 존재의 비밀은 그저 생존하는 것뿐 아니라...무엇인가 확실한 것을 위해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사는지 확고하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인간은 삶을 받아들일 수 없고 이 땅에 살아 남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을 파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을 최고선(summum bonum), 궁극적인 목적, 인생의 의미 등 무엇이라 불러도 좋다. 하지만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고 성취하는 문제는 우리 인생의 모든 단계에 걸쳐 무수한 방식으로 부각되기 마련이다.

 

십대들은, 가정과 학교라는 울타리 너머 어지러울 정도로 선택의 목이 넓은 자유의 세계가 손짓할 때 이것을 느낀다.

 

대학생들은, 한때 "세계는 나의 밥이다"라고 느끼던 흥분이,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엄연한 현실 앞에서 식어 갈 때 이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삼십대 초반이 되면, 한때 그들 부모가 가졌던 기대와 동년배들의 삶의 방식 그리고 연봉과 경력의 유혹 너머에 있는 잔인한 현실을 일상적인 일터에서 직면할 때 이 문제를 알게 된다.

 

중년에 접어든 사람들은 자신이 생명으로부터 부여받은 탈렌트(소질)와 일이 맞지 않아 자신이 부적격자라는 생각이 날마다 들 때 이 문제와 맞닥뜨린다. "과연 남은 생애 동안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을까?"

 

어머니들은 자식을 다 키운 후 인생의 다음 단계의 공백을 메워 줄 고상한 목적이 무엇일까 고민하면서 이것을 느끼게 된다.

 

굉장한 성공을 거둔 사십대와 오십대의 경우에는, 자신의 성취가 그 성공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그리고 더 깊은 차원에서 인생의 목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때 갑자기 이 문제에 직면한다.

 

사람들은 인생의 모든 다양한 전환기에 이 문제에 부딪힌다. 이사를 할 때, 직업을 바꿀 때, 결혼 관계가 깨어질 때, 건강에 적신호가 켜질때 등이 그러한 때다. 이러한 전환은 우리가 인식하는 개인적인 의미에 도전하기 때문에 변화 자체보다도 그 변화를 분석하고 다루는 것이 더 길고도 어렵게 느껴진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이들 역시 때로 이 문제에 다시 직면한다. 인생은 결국 무엇인가? 지금까지 성취한 것들은 진정한 성공인가? 그 성공은 다른 것들을 희생하면서까지 이룰 만한 가치가 있는가? 크든 작든 온 세상을 얻었지만 영혼을 싼 값에 팔아 넘긴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지는 않았는가? 워커 펄시(Walker Percy)가 썼듯이 "당신은 만점을 얻고도 인생에서 낙제할 수 있다."

 

바로 이 문제, 곧 자신의 인생 목적에 관한 의문이 19세기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를 사로잡았다. 그가 잘 알고 있었듯이 개인적인 목적은 철학이나 이론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순전치 객관적인 문제도 아니고 유산처럼 상속되는 것도 아니다. 많은 과학자들은 이 세계에 대한 박식한 지식을 갖고 있고, 많은 철학자들은 거대한 사상 체계를 섭렵할 수 있고, 많은 신학자들은 종교의 심오한 경제를 파헤칠 수 있으며, 많은 저널리스트들은 어떤 주제든 그럴듯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이론에 불과하며 개인적인 목적 의식이 없다면 그저 허망한 것이다.

 

우리는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우리 자신보다 더 큰 목적을 발견하고 그것을 성취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처럼 좀더 큰 목적만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스스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높은 곳까지 이르도록 이끌 수 있다. 우리 각자에게 진정한 존재 목적은 참으로 개인적인 것이요 열정의 대상이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기 위해 그리고 왜 여기에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그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그것은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진정 내가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참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며, 내가 그것을 위하여 살기도 하고 죽을 수도 있는  사상을 찾는 것이다"

 

오늘날 고도로 현대화된 세상에서 이 질문은 매우 절박한 것인데 이유는 간단하다. 오늘날 인생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열망이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을 정도로 강렬한 데는 세 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 인생의 목적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경험 가운데 가장 깊은 차원의 문제다.

둘째, 현대 사회가 모든 영역에 걸쳐 선택과 변화의 기회를 최대로 제공하게 되면서, 우리 모두가 목적 지향적인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기대감을 한층 드높였다.

셋째, 현대 사회의 특징은 목적을 찾는 데 크게 방해가 되고 있다. 인류 역사상 있었던 수많은 문명 중 현대 서구 문명은 인생의 목적에 관해 합의된 대답이 없는 최초의 문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은 역사상 그 어떤 시기보다도 이 문제를 둘러싼 무지와 혼돈과 갈망이 크다고 하겠다. 현대인의 고민은 우리가 이러저러한 것을 소유하고 있지만 삶의 목적은 너무나 빈약하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시간은 있지만 돈이 별로 없다고 느끼고, 또 어떤 이들은 돈은 있지만 시간이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에게 공통적인 것은 이전보다 더욱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혼으로는 더욱 빈곤한 상태에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사회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대답들이 부적합하다는 것은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자본주의는 창의성과 유용성을 다 발휘해도 '왜'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만족스러운 답을 줄 수 없다. 그것은 자체만으로는 문자 그대로 의미 없는 것으로서, 단지 하나의 메커니즘에 불과할뿐 의미의 근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밖에 정치, 과학, 심리학, 경영, 기술, 수많은 현대 이론도 마찬가지다. 톨스토이가 과학에 관해 말한 바는 다른 모든 것에도 적용된다.

 

"과학이 무의미한 이유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질문, 즉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이며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 아무런 대답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목적을 찾는 노력을 벗어나서는 어떤 대답도 있을 수 없으며, 그 노력에 대한 대답 가운데 소명에 응답하는 것보다 더 깊고 만족스러운 대답은 없다,

 

그러면 '내가 이 세상에 난 소명(calling)이란 무엇인가?'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해 보겠다.

 

소명이란, 하나님 혹은 절대자 아니면 대우주나 대자연 또는 부모님(뭐라고 해도 좋다.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믿음의 크기만큼, 우리 생명의 근원을 가리키는 것이라면)이 우리를 이 세상에 부르셨기에, 그 부르심과 은혜에 응답하여 우리의 모든 존재, 우리의 모든 존재, 우리의 모든 행위, 우리의 모든 소유가 헌신적이고 역동적으로 그 의미에 조심스럽게 다가간다는 진리이다.

 

이 때문에 소명이야말로 인간 경험 중 가장 포괄적인 방향 전환이요 가장 심오한 동기 부여, 곧 모든 역사에서 삶의 궁극적인 이유가 된다.

 

자 다시한번 스스로에게 묻자.

당신은 존재 이유, 곧 인생의 뚜렷한 목적 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혹은 당신의 인생은 변화무쌍한 결심의 산물이거나 당신 외부에 있는 무수한 힘들이 작용한 결과인가? 당신은 성공 지향적인 삶을 넘어 진정 의미 있는 인생을 살기 원하는가? 자기를 의미하는 인생은 항상 기대에 못미치며, 세상을 부정하는 해결책은 결국 진정한 해답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는가?

 

 

오스 기니스의 < 소명 :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고 성취하는 길 > 중에서

(Os Guinness, The Call : FINDING AND FULFILLING THE CENTRAL PURPOSE OF YOUR LIF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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