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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필요한 것은 성노동을 긍정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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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A_ 글로컬액티비즘센터_ 경제와노동공방_ 성노동포럼(2011.7.22) 후기

 

지금 필요한 것은 성노동을 긍정하는 것

 

아로미(경제와노동공방 현장포럼팀)

 

성노동 포럼을 앞두고 뭐라고 할까 창자 한구석에 작은 돌멩이가 있는 기분이 계속되었다. 그냥 무시하기에는 가끔씩 아파오고 그렇다고 수술을 통해 꺼내는 것이 더 아플 것 같은 두려움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성노동자를 직접 대면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성노동자 지지 단체를 만난 적도 없다. 성노동에 관련된 모든 것은 글로써 접했고 내 나름의 머리 속생각이 있을 뿐이었다. 성노동이 노동인가? 물론이다. 성노동자가 노동자인가? 물론이다. 이론적으로는 당연히 물론이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이 난무했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는 노동자. 내 머리 속에서만 존재하는 노동자. 그들과 직접 만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말을 건넬지 막막했다. 지나치게 친절해서도, 지나치게 냉정해서도 실례일 것 같고. 무엇을 어느 정도 어떻게 질문할지는 더 막막했다.

 

오늘이다. 사무실에 도착했더니 시끌벅적하다. ‘지지’분들, ‘소설’을 쓰고 싶은 분, NGA 분들, 그리고 발제를 하실 두 분 포함 세 분이 오셨다. 다들 안면이 있는 분들 같았다. 나는 처음 만나는 분들이 거의 다인데. 참 어색했다. 조용히 분위기를 살피고 있었다. 드디어 발제가 시작되었다.

 

처음 분은 성노동자가 된 과정과 현재 한국의 성노동 현황을 이야기했다. 뭔가 독특한 혹은 피치 못할 개인의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했지만 돈을 벌기 위해 직장을 얻는 과정과 다를 바가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음 돈 번 곳을 평생의 업으로 생각하지 않듯이 성노동도 마찬가지로 보였다. 어찌 하다 보니 계속하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면 자기의 적성과 꿈에 맞는 일을 구하는 청춘이 얼마나 있겠는가? 다들 돈을 좀 더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을 구하고자 한다. 정말 돈이 필요하니까.

 

성노동 현황, 그리고 성특법의 폭력성

 

한국의 성노동 현황은 정말 다양하고 복잡했다. 성산업이 다양하다는 것은 성서비스를 구매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이야기인데 누가 왜 무엇 때문에 성서비스를 구매하고자 하는지 궁금했다. 성노동자가 답할 문제가 아니었기에 같이 사는 남성에게 물었다. 답은 ‘좋아서’였다. 최신형 스마트 폰을 사고 싶어 하는 것과 같은 욕망이라고 했다. 남성 일반의 견해로 보기에는 객관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고려해 주길 바란다. 다만 모든 남성이 구매자가 되지 않는 이유는 ‘도덕관념’ 이라기보다는 ‘배우자에게 걸릴까봐’ 란다. 나는 윤리라는 포대기에 쌓여 허우적거리고 성노동을 노동으로 정리하고도 풀지 못하는 혹은 풀기 어려운 문제들이 너무 많은데 남성은 인정이후에 별다른 고민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여성들의 고민이 깊은 이유가 성적 억압과 착취라고 생각으로 발전되니 화가 났다. ‘참으로 편하구나! 너희들은’. 다시 본 이야기로 돌아가자.

 

발제자의 말에 의하면 성특법은 구매자, 판매자, 업주, 관계자들을 모두 처벌하지만 주로 구매자에 대한 처벌은 교육 등의 방식이지만 판매자에게는 100여만원 이상의 벌금을 부과한다고 한다. 따라서 성노동자들이 구매자의 부당한 요구(콘돔 미사용 요구 등)에 노출되어 건강권 및 인권이 침해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성특법은 성노동을 사회악으로 보기 때문에 성노동자들은 가련한 피해자 혹은 구제 불능의 타락한 존재일 뿐이다. 구원해주거나 박멸해야 할 존재이기에 생존권, 건강권, 인권은 고려가 되지 않는다. 성특법이 성노동자들을 도리어 고통에 몰아넣는 주범인 것이다.

 

두 번째 발제자는 성노동자들의 감내해야 하는 낙인과 억압을 ‘되어 보기(성노동)’를 통해 이해해보고 싶었고 그 과정을 일지로 기록하고 온라인에 공개함으로써 벌어진 공방을 소개했다. 성노동자 되기라~! 이건 뭘까요? 트위터나 페이스북 및 인터넷 공간에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나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이다.

 

‘되어보기’ - 경계를 넘어 낙인과 억압 체험

 

충격이었지만 내가 왜? 충격을 받았을까 따져보았다. 내가 되어보기를 시도한 것은 20여 년 전 대학을 다닐 때 한 달 간의 ‘노동자 되어보기’였다. 개인적으로는 완전 실패한 경험이었다. 나의 되어 보기는 출발부터 노동자들의 삶에 대한 고민은 없었고 혁명의 주체로서의 위대한 노동자만 있었다. 한 달 여의 공장 생활을 거치면서 나는 노동자 되기에 영 자신이 없었다. 평생 육체노동에 시달려야 하는 것도 두려웠고 사회적 멸시를 받고 영원히 마이너 리그로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이 우울했다. 노동자는 나에게 되고 싶지 않은 존재였다.

 

되어보기는 경계를 넘는 것이다. 경계란 무엇인가? 너머의 세상과 안의 세상이 사실 같지만 그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공포와 두려움을 동원해서 넘을 수 없도록 만들어 놓은 선이다. 경계는 누가 감시하거나 통제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넘지 않을 때 완벽히 성공적이다. 그 앞에 서면 두려움과 공포심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하기는커녕 속수무책 경계 안으로 돌아오게끔 만드는 힘. 20여 년 전 나는 그 경계에 섰던 것 같다. 밀사님의 실험은 아무렇지도 않게 좀 더 정확하게는 경계가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으면서 넘었다는 점에서 충격이었다. 어떻게 경계를 두려워하지 않을까?

 

성노동자들의 고통은 경계 안쪽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동안 여러 부분에서 많은 ‘되기’가 있었지만 경계의 핵심을 무너뜨리는 ‘되기’, 온갖 위선의 그물로 둘러싸여 제대로 들여다 볼 수조차 없었고 온갖 가지 추측과 왜곡이 난무하는 영역으로 발을 들여 놓고 ‘되어보고, 되어서 이야기하기’가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만 밀사님의 실천에 대해서는 기회가 되면 더 알고 싶다.

 

숭고한 사랑? 타락한 범죄?

 

밀사님의 발제문에는 정곡을 찌르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기회가 되면 여러분들도 꼭 읽어 보았으면 좋겠다. 그중 꽂힌 부분을 느낀대로 옮겨 본다. 성노동은 사람에게 해를 가하지 않기에 ‘범죄’라는 말과 연결될 수 없다는 밀사님의 주장에 동감한다. ‘성매매’를 불특정인을 대상으로 대가를 바탕으로 성교/유사성행위를 하는 것으로 규정하는데 이를 뒤집어 ‘특정인을 대상으로 대가 없이 하는 성교/유사성행위’가 무엇이냐는 물음에는 통쾌함을 느꼈다. 즉 이성애 중심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안에 있는 성교/유사성행위는 ‘사랑’이라는 고귀한 가치이고 그 밖에 있는 성교/유사성행위는 엄청 타락한 짓거리 또는 범죄가 되어 버리는 현실. 위대하며 숭고하기 까지 한 ‘사랑’과 ‘착취’ ‘비도덕’에 근거한 ‘성거래’는 본질에서는 똑같다. 같은 본질을 다르게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성거래에 ‘착취’라는 낙인을 찍음으로써 실제 이성애 중심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에 의한 여성의 성적 착취라는 구조적 폭력을 감추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또한 자본주의 라는 착취 구조를 감추기 위해 본질적으로는 같은 노동이면서도 가치를 위계화하고 노동과 비노동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닐까? ‘사랑’과 ‘성매매’라는 남성 중심 사회가 만들어 놓은 경계를 넘어 두 노동의 본질적으로 같음을 주장할 때 성노동에 동반되는 도덕적 낙인을 지울 수 있지 않을까?

 

다음은 발제 후 나온 이야기들이다. 어디까지가 질문과 답변이고 어디까지가 내 생각인지는 불분명하다. 성노동자를 ‘피해자’로 형상화 하는데 일조하고 있는 ‘선불금’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고 한다. 보통 사회에서 일수를 쓰고 갚지 않으면 고초를 겪는 것과 마찬가지 정도라고 한다. 성노동자가 노동자로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점에는 완전 동의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성매매가 확대 되고 성의 상품화가 강화되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혹은 불편함을 이야기한 참가자도 있었다. 비슷한 관점에서 남성 구매자들이 상품을 소비하듯이 성적 서비스를 구매하는 것을 정당화하거나 당연시 하게 될 수도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을 했다. 미안함, 죄책감 없이 구매하게 되는 상황이 오게 될 거 같고 그 꼴이 너무 싫다. 다른 참가자는 우리들의 질문이 누구에게 하는 질문인가? 누가 책임져야 하는 것인가를 잘 구별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위의 문제의식도 사실 성노동자들에게 물을 것이 아니다. 비성노동자들, 혹은 구매자들에게 던져야 할 질문들이다.

 

성노동의 인정은 예를 들어 가사노동이 노동임을 인정받는 것과 가사노동자들의 노동자성을 인정받는 것은 다른 과정인 것처럼 지금은 담론상의 인정이 당면 과제라는 이야기도 나누었다. 비범죄화냐? 합법화냐?를 둘러싼 논쟁도 있었다. 성노동자들은 성특법 이후 변화 중 콘돔 미착용이 가장 심각함을 제기하며 최소한 콘돔 착용 의무화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부일처제 자체가 문제임을 지적한 분도 있었다. 성노동과 관련된 모든 두려움의 근원에는 일부일처제가 있으며 이 두려움의 대부분도 학습에 의한 것이며 두려움이란 자기 안의 공포를 극복하는 것으로 비성노동자들이 넘어서야 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그 두려움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하지 않으면 진전은 없다고 주장하면서 더 많은 솔직함이 필요하다고 이야기 했다.

 

낙인을 딛고 귀환한 성노동자들을 환대한다

 

노동 운동이 ‘노동자’에게 존엄성을 부여하고 주체화했듯이 지금 필요한 것은 성노동자가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이고 성노동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들이 판매하는 것은 몸이 아닌 단지 성적 서비스이다. 현실에서 구매자들은 돈을 주고 성노동자의 몸을 산다고 생각하기에 그 시간 동안 성노동자를 온전히 자신의 소유로 여기고 함부로 대하지만 성적 서비스를 사게 된다면 구매자의 태도는 완전히 다르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걸그룹과 짐승돌을 성적으로 소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몸을 산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도 그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엔터테이너로 인정받고 환호성을 받는다.

 

가사 노동을 발견하고 돌봄 노동을 발견한 것처럼 성노동은 발견되었다. 성노동이 발견되는 순간 거대한 성적 착취를 감추기 위한 목적 때문에 낙인이 찍혀 사회 밖으로 쫓겨났던 사람들이 당당히 귀환 선언을 했다. 나는 오늘 그 사람들을 만났다. 성노동자들이 진짜 내 눈앞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현실을 직시하고 세상이 만들어 놓은 덫과 그물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있다. 출발을 진심으로 환대하고 싶다.(201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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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10 12:36 2011/08/10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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