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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94년 월드컵이었을 거다.

친구들이 우리집에 맥주를 사들고 와서 경기를 관람했다.
나는 축구를 비롯한 여러 스포츠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으므로 역시 그 중계를 보지 않고 내 방에 앉아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친구들은 '애국자가 아니'라는 둥, '니가 우리나라 사람 맞냐'는 둥 헛소리를 지껄여댔다.
경기가 흥미진진하게 진행되고 있는 모양인지, 내 친구들은 박자를 맞춰 박수를 치거나 큰 소리로 응원을 하곤 했지만 나는 왠지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게만 느껴졌다.
경기가 끝나고 결과는 예상대로 우리나라 국가대표팀이 졌다.
그런데 한가닥 기대를 안고 경기를 관람한 나의 친구들은 그 실망감과 상실감을 분노로 승화시키더니 어딘가에서 보상받고자 하다가 급기야 홀로 방에 앉아 있던 나에게 와서 여과 없이 쏟아내기 시작했다.
오늘 경기에 패한 원인은 바로 '내가 경기 응원을 안했기 때문'이란다.
그런 유치한 발상이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지 정말 궁금했고, 또한 나에게 그렇게 커다란 능력이 있는 줄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 후 군대에 갔는데 일요일이 되자 고참들이 축구를 하자고 했다.
뜀박질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나는 역시 '안하겠다'고 했다가 순식간에 험상궂게 변하는 고참의 얼굴을 보고는 '저 축구 진짜 좋아합니다. 단결!'이라 외치며 부리나케 운동화를 신고 달려 나갔다.
허나 마음은 열심히 뛰고 싶은데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계속 헛발질만 해댔다.
그 다음 일요일엔 안되겠구나 싶었던지 골키퍼를 시켰다.
군대 축구의 과격성을 아는 사람은 족히 알겠지만 정말 와일드한 경기방식이다.
얼마나 공을 세게 차는지 나는 공을 잡는 골키퍼가 아니라 공을 피하는 피구선수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해서 그 후부터 나는 상병 중간 호봉 때까지 응원단장을 했다.
그런데 아까 말했듯이 나에겐 놀라운 능력이 있었다.
내 친구가 일깨워준 신비롭고 놀라운 능력!
근데 그 능력이란 내가 응원을 한다해서 이기게 되는 능력이 아니라 내가 응원을 안하면 지게 되는 능력이었나보다.

문제는 대부분의 고참들이 자신들이 좋아하는 스포츠를 자기들끼리 즐기는 데만 끝나지 않고 후임병에게 동참하기를 강요하고, 꺼려하면 소대 발전의 걸림돌이라느니 이기적이라느니 하며 제멋대로 화를 낸다는 데 있었다.



최신식 무기로 무장된 현대화된 군대에서 박정희 시대 때에도 과다했던 대규모 사병 인원이 그대로 유지된다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

그러니 휴식을 위해 만들어진 공휴일날 고단한 육신을 뉘이고 싶은 쫄다구에게 축구하러 나오라고 고함을 지를 수 있는 것이다.
사실상 공격 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는 북한을 남침야욕에 불타는 괴물로 그려놓고 사람들을 겁주고 그것을 이용해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하려는 지배계급들.
한낱 공놀이에 지나지 않는 축구경기에까지 알량한 '애국심'이라는 만병통치약으로 사람들을 '국가와 민족'으로 묶어 놓아 지배계급의 지배 수단으로 삼으려는 수작과 다를 바 없다.
제도 교육 12년과 보수권 미디어를 통해 애국심을 강요 당하고 그것도 모자라 군대에 가서는 충성심까지 강요 당한다.

2002 월드컵에서 4강에 들어가려 하니 매스컴에선 이것으로 인해 앞으로 창출될 이익이 몇 십 조원이라 떠들어 댔다.
모든 것을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보는 천박한 버릇도 맘에 들지 않았지만 그 창출된 이익이 과연 우리에게 제대로 분배되었나, 아니면 SK와 삼성에게 고스란히 넘어갔나.

필요에 의해 동원되었음에도 자신이 동원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것은 정말 비참한 일이다.
억지로 끌려갔으면서도 제대하고 나서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러 갔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우리에게 국가란 반쪽짜리인 '대한민국'뿐인가?
우리가 과연 학교에서 배운대로 단일 민족인가?
만일 단일 민족이라 치더라도 단지 그 이유로만 통일이 되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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