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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순이와 이별

양순이가 우리 집에 함께 살면서 이제 내게는 또다른 집착의 대상이 존재하게 됐다.

양순이는 너무 어려서 사료를 불려서 이유식처럼 만들어먹였는데

멸치, 버섯가루를 내서 섞어 주면 잘 먹었다.

어디를 가든 양순이를 데리고 다니고 언제든 부비며 살았다.

단, 그건 주말휴일이나 저녁시간에.

양순이는 외로웠나보다.

우리가 없을 때 혼자 남겨진 양순이는 주인집 아주머니가 우리집 옆을 지날 때마다

엄청 짖고 누군가 오기만 하면 크아~앙 이빨을 드러내며 적의를 드러냈다.

 

때로는 남편이, 때로는 내가 사는게 힘이 든다고 술을 마시고 와서는

양순이를 붙잡고 울곤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부터 내게 우울증이 시작된 듯하다.

그땐 남편이 내 술마시는 모양을 수상히 여겨 술먹지 말라고 고작 닥달을 해대었다.

 

성명서를 쓰거나 피켓을 만들거나 선전전에 나가거나 인터넷을 뒤지는게

대부분인 일이 끝나기 무섭게 집에 들어온 나는, 집 앞 수퍼에서

소주 한병 또는 두병을 사들고 와서 컵에 따라 단숨에 마시고 나서 저녁을 지었다.

괜히 무서웠고 괜히 슬펐고 눈물이 났고 가슴이 아렸다.

 

그때 양순이는 나의 이 우울한 모습을 모두 보았고

순전히 나의 생각이겠지만 나를 어느 정도 동정하는 것 같았다.

때로는 가여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양순이는 나보다는 남편을 아주 잘 따랐다.

그게 참 서운했다.

내가 술독과 우울의 늪에 빠져있을 때 남편은 노동조합 일로

내게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그는 나를 더욱 지치게 했다.

그러다가 이렇게는 못살겠다, 싶어 일을 그만두고 영성수련원을 가고

결혼을 하자고 맘을 먹었고...결혼을 하고 이젠 다르게 활동을 해보자

그렇게 다짐하면서 살아가다가...

사건이 터졌다.

그 전부터 진행되던 재판이 거의 일년을 끌었는데

내가 법정구속된 거였다.

남편과 양순이는 뭘 먹고 사는지, 똥오줌은 잘 치우고 사는지,

그 모든 잡스러운, 생의 대부분인 것들에 대해

걱정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때로 남편보다 양순이가 더 눈에 밟혔다. 작고 힘없으니까.

그렇게 우리가 길들였으니까...

마당에서 노는 양순이의 사진을 독방 한면에 붙여놓고..

우리가 함께 있던 시간이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양순이와 남편, 내가 그렇게 무의미하게 살지는 않았구나, 느꼈다.

만약에 자식이 생긴다면 대략 이런 모습이겠구나...생각했다.

 

만기 일주일을 남겨놓고 가석방으로 나와서 만난 양순이는 누구보다 더 반가웠고

양순이도 나를 바로 아침에 만난 듯이 그저 좋아했다.

보드라운 털과 커다란 눈, 가냘픈 다리..

역시나 예전처럼 내 손을 잘근잘근 아프게 깨무는 양순이..

 

남편은 내 출소와 함께 회사를 정리했다.

동시에 그의 노동운동도 그렇게 정리되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그걸 원했는지 원하지 않았는지 잘 모르겠다...피하고 싶었던걸까)

삶에서, 운동에서 커다란 성벽을 쌓아갔다.

 

우리 셋은 날마다 낚시터로 휴양림으로 바다로 도시락을 싸서 놀러다녔다.

그렇게 다닌 적은 처음이었다.

그러다 낚시터에서 만난 발바리와 양순이는 눈이 맞았다.

2004년 가을 내내 우리는 지치도록, 돈이 떨어질때까지 놀았고 양순이는

임신을 하고 강아지를 낳았다.

 

행운과 행복이 가득하라고 운이 복이 그렇게 이름지었다.

전세 기간이 다되고 아파트에서 살고 싶어서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양순이는 더 신경질적이게 되었다. 내 우울증이 깊어갈수록 양순이는

더욱 신경질적이었다.

나는 화가 나면 양순이를 때리다가 또 화가 가라앉으면 미안하다고 했다가

남편이 보기 싫으면 또 양순이를 째려보다가 저것들이 똑같아 똑같아...

그렇게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운이 복이는 낚시터 자기 아빠의 집에 다시 보내졌고, 그 뒤로 누군가의 집으로

보내졌다고 했다.  그 눈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 사랑스러운 새끼들을...

 

그렇게 한 해가 지나고 새해가 오고

남편은 막노동을 하고 나는 새로운 일을 찾아보기 위해

여기 저기 어슬렁댔다. 그러다 미술치료를 공부하게 되었다.

평생교육원과 연구실을 다니며 정말 신나게 공부했다.

그러면서 내가 왜 이렇게 아픈지, 왜 이렇게 알 수 없는 기운에 휘말려 살고 있는지

조금씩 보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기운차리지 못했다.

 

익산에 있는 한 단체에서 이주여성의 자녀들을 위한 공부방에서

잠깐 자원봉사도 했다. 애초 그 일을 '일'로 하고 싶었지만

그 곳 사정이 여의치 않았고 나를 받아들이기 껄끄러워해서

잠깐 아이들 공부를 봐주고 미술지도를 해주고(사실 두세차례밖에 못했으니

지도를 해줬다는 것은 참 미안하고 어정쩡한 말이다.)

같이 놀아주었다.

남편은 전국 이곳 저곳으로 일을 하러 다녔고

나는 낮에는 그나마 인간답게 살았지만

저녁이 되면 철저히 혼자가 되었고 술에 만취하면 아파트 복도에서 저 아래

1층을 보며 '여기서 떨어지면 죽을 수 있을까, 한 십층은 넘어야 되겠구나'

날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지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술김에 몇번은 죽을 뻔 했다.

 

그러다가 덜컥,

아기가 생겼다.

양순이와 우리들의 행복하고 슬프고 가여운 시간은 여기까지 였다.

아기가 생기자마자 나는 그동안 양순이와의 모든 시간은 뒤로한 채

양순이를 시댁에 보내자고 남편에게 제안했다.

시댁에서는 양순이를 싫어했고 양순이를 키울 누군가에게 보낸다고 했다.

 

아기도 생명이고 양순이도 생명인데...

아기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양순이를 그렇게 버렸다.

 

나중에 시아버지에게 들으니 양순이는 모악산 뒷자락에 사는

어떤 농부의 집에 보내져서 다른 숫컷 발바리 두마리와 함께

살게 되었다고 했다.

 

핸드폰에 찍힌 양순이의 사진을 지울 수가 없다.

핸드폰 화면이 고장나서 폴더를 열면 화면이 어두워지지만

핸드폰을 바꿀 수가 없다.

아기 때문이 아니었다.

우울한, 잊고 싶은, 가엽고 불쌍한 내 기억을

그렇게 버리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좀 위안이 된다.

 

피부병때문에 비싼 사료를 먹고 특이한 샴푸를 썼다.

귓속에 약을 발라야 해서 목도리처럼 넓게 두르는 챙(?)과 입마개와

약, 샴푸, 가위, 임신했을 때 먹었던 칼슘제, 양순이가 좋아했던

과자 ... 아직도 서랍에 그냥 있다.

고물고물 기어다니고 뽈짝뽈짝 뛰는 사랑이를 보면

양순이 생각이 더욱 난다.

이제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기억들..

 

양순이가 살아있다면 아프지 않고 잘 먹고 친구들과 잘 어울려서

넓고 넓은 산에서 맘껏 자유롭게 다니며 살기를.

죽었다면 다시 우리가 어디에선가,  꼭 이세상 아니어도

만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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