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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을 부르러 온 예수"

당신이 예수다.

 

"이번 사건은 이례적으로 외국인이 한국인을 잔인하게 살해한 점이 특히 눈에 띈다....불법체류 외국인이 급증하는 추세에서 이번처럼 치정이 아닌 불특정인을 대상으로 한 강력범죄를 저지를 경우 사건해결에 큰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이번에 벌어진 어느 미등록 외국인(중국인)의 치정살해사건에 대한 경찰측 의견이라고 한다. 이들은 미등록 외국인들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취급하고 있다. 공익근무하는 학교에서도 이 뉴스를 통해 얼마나 평범한 주변 사람들이 이주자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반응들은 별로 영성에 도움이 안 되기에 옮기지 않도록 하고...ㅡㅡ;;

 

마가복음 2장 17절에 보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예수의 말이 나온다. 흔히 죄인들 하면 우리는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비기독교인인 사람들이 들으면 매우 기분이 나쁘겠지만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죄인"을 "비기독교인"과 같은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 말씀에 나오는 죄인은 오늘날 우리들의 생각이나, 기독교 이데올로기로 포장된 죄인론과는 다른 존재다.

 

예수 당시의 유대 사회는 철저하게 죄인과 의인, 불결한자와 정결한자를 가르는 이분법 적인 사회였다. 이러한 이분법은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이후 민족의 순수성과 정체성을 보존하려는 민족갱신운동의 산물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민족운동이란게 그렇듯이 이 운동 역시 예수 당시에 이르면 엄청난 수의 비-민중, 비-인간 혹은 위의 말씀에 나오는 "죄인"을 조직적으로 생산했다.

 

즉, 죄인들이란 가난하고 무식해서 유대의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이들이나, 장애인, 성매매 여성, 세리(민족반역자), 귀신들린 사람들 같은 이들이었다. 물론 여기엔 생리중인 여성도 들어간다.ㅡㅡ;; 그러니까 "죄인"이란 사회적으로 규정된 정체성이었던 것이다. 바리새인들이나 유대 지배층들은 이들 죄인들을 배제한 채 그들만의 하느님나라를 구가하였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체제유지를 위해서라면 "죄인"들이 생산한 것이라도 세금으로 강탈해갔다. 괜히 이 넘들이 "독사 새끼들"이란 비난을 들은 게 아닐 게다.


아무튼 예수가 "내는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이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카이." 한 건 이들 죄인들에 대한 당파적 지지의 선언이라 할 수 있다.(예수는 아마도 갈릴리 사투리를 썼겠지? ㅡㅡ;;)"의인"들은 독사 새끼들이고, "죄인"들이야 말로 하느님 나라의 백성인 것이다. 예수가 선언한 이 하느님 나라는 주로 이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가운데 일어났다. 동네 방네 다니면서 파괴된 농촌 공동체의 연대성을 회복하고, 배제당한 이들을 공동 식사의 자리로 불러 배불리 먹이고, 병자와 귀신들린 이들을 치유하고, 이들보다 더 병든 공동체와 사회를 치유하는 일이 예수 생전의 일이었다. 이러한 사건을 통해 예수는 죄인들이 되고 죄인들은 예수가 되었다. 아쉽게도 이러한 민중의 사회운동으로서의 예수운동은 어느새 사라지고 로마의 비호 아래 권위주의적인 교회만 남아 2000여년이 흘러버렸다.ㅜㅜ

 

아무튼, 오늘 이주자들, 특히 미등록 외국인에 대한 경찰과 주변사람들의 강한 거부감을 보면서 이들이 우리 시대의 "죄인들"로 여겨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반복해 말하지만 "죄인"은 철저히 사회적으로 규정된 이름이며 예수는 이들을 위해 왔다. 아니, 이들이 불의와 차별에 저항할 때 이들은 예수가 된다. 이주자들 뿐만 아니라 모든 배제된 자들이 밥상을 함께 할 때(예수 시대에 밥상을 함께 한다는 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삶을 함께 나누는 걸 의미했다. 뭐, 요즘도 크게 다르진 않을 듯 하다.), 즉 공통-되기를 수행할 때 이들에게서 우리는 예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부활한 예수란 기실 이러한 민중사건에 다름 아니다.

 

썅. 그건 그렇고 저런 말 한 경찰. 여기가 한국인걸 천만 다행으로 알아야 한다. 유럽이었으면 벌써 인종차별로 모가지야 모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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