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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의 아이들, 우리 아이들

 

딸아이에게 책 읽는 습관이 잘 들어 있는 것이 참 기껍다. 동화책도 솔치않게 읽어주었고, 노래도 많이 불러주었고, 신나게 같이 놀기도 했던 딸아이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니 흐뭇한 마음이 일어난다. 서점에서 이 아이가 읽으면 좋을 동화책은 어떤 것이 있을까 고민을 하면서 뒤적이기도 했었다. 이 아이가 요즘 몰입해서 읽는 책들이 있는 것 같다. 슬쩍 살펴보니 요상스런 제목이 거슬린다. 하루는 딸아이에게 물어보았다.


“몇 일전 책방에 갔었다며? 무슨 책 샀는데?”

“이 책”

“친구도 같이 갔었다며? 친구는 무슨 책 샀는데?”

“이웃집 살인마!”


세상에, 뭔 그런 책 제목이 다 있냐며 핀잔하는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딸아이는 아빠는 참 딱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바로 그 순간 번뜩이며 강렬하게 스쳐지나가는 한 생각이 있었다. ‘아! 얘는 엄마 아빠가 골라주는 그리고 어른들이 골라 주는 책만 접했었구나…’


나는 지금 얼마 전 딸아이가 하루 만에 읽어치운 어떤 책을 삼일이나 걸려 읽어냈다. 부모라는 이름으로 억지로 짜 맞추려 했던 ‘모든 것들’을 모조리 뒤집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게 도와준다. 그 책에서 작가는 아이들을 대하는 우리들의 마음을 되짚어 보라는 주문을 하고 있다.


“지금 여기의 아이들, 우리 아이들은 어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어진 모습이지, 그들 스스로 만들어낸 모습이 아니다…”


그들만의 세계를 우리는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아니 얼마나 이해하려 했을까? ‘야단칠 일이 생기면 줄을 서 있던 어른들이, 도움을 청하려 하면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는 한 청소년 주인공의 절망스런 독백. 여전히 우리는 청소년을 ‘지도의 대상’ 쯤으로 여기면서 아이들의 감성을 짓누르고 있나보다. 청소년 성장소설 ‘벼랑’을 쓴 작가 이금이님의 사려 깊은 작품은 어른들이, 아니 부모라는 이름으로 우리들이 아이들을 어떻게 짓누르고 있는지 정확하게 들어내 주고 있다.


우리 아이들이 이해 받지 못하는 동안 얼마나 외롭고 서러웠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니 마음이 아려온다. 그래서인지 예전의 나도 ‘선도’라는 표현을 무척 싫어했다는 기억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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