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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08/04
    화려한 사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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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8/07/24
    나의 어린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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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8/06/30
    지금 여기의 아이들, 우리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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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7/06/02
    어린시절 아버지의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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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7/05/22
    출퇴근길 단상(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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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7/05/22
    인간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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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사춘기

 

생각해보니 우리 아이가 사용하는 걸상에 앉아본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집 청소를 하다가 문득 문에 뛴 걸상에 앉아 보았습니다. 딸아이 체격에 비해서 다소 크다 싶은 책상위에는 예쁜 사기 인형 세트, 자주색 고운 털로 둘러싸인 벽거울, 꼬마 돼지 저금통 두 개, 앙증맞은 빗, 고즈넉한 시골풍경 사진이 인쇄된 달력이 걸려 있고, 낙서로 덮여 있는 수업 시간표가 붙어 있는 여느 사춘기 소녀들과 그리 다르지 않을 중학교 3학년짜리 책상풍경입니다.


때로는 수다를 늘어놓기도 하고, 때로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사회문제에 대해서 물어오기도 하는 딸아이 걸상에 앉아서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 보았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고운 마음을 간직한 채 어른이 되어 착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지도해줘야지 하는 다짐도 같이 해보았습니다.


하루는 자기 엄마하고 외출 옷차림을 놓고 티격태격 실랑이가 벌어졌습니다. 무엇인가 오고가는 여러 말들이 제 귓전을 스쳐갔지요. 그런데 한 순간 딸아이가 엄마에게 날리는 날카로운 한마디 외침.


“엄마가 멋을 알아?”


짧은 정적이 흘렀습니다. 저는 폭발하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어요. 딸아이 항변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아내는 옷차림 참견을 계속 늘어놓더군요. 다른 날 같았으면 저도 끼어들어서 삼파전을 벌였겠지만, 이 날은 모녀가 벌이는 실랑이를 지켜보면서 흐뭇한 기분을 만끽했습니다. 그래 화려한 사춘기를 마음 놓고 보내렴…”


밝게 자라고 있어 고맙기만 한 딸아이를 격려하며 오늘도 저는 평범한 일상을 일구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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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시절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배 밭이 있었고,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돼지우리가 있었고, 신나게 뛰어 놀 수 있던 벌거숭이산이 있었습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서 배서리도 하며 또래 친구들과 어울렸던 나의 어린 시절. 누구든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그 시절이 어려웠건 행복했건 관계없이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합니다. 내게는 지금까지 강하게 남아 흐뭇한 향수를 느끼게 해주는 영화 같은 장면이 있습니다. 내가 짓궂게 보냈던 어린 시절 얘기 한 자락을 들려드릴게요.


내 고향은 한여름 밤이면 넓은 공터 한 곳에 큼지막한 평상을 펴 놓고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모여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셨어요. 나는 귀여움을 독차지 했던 터라 큰 평상 가운데를 팔다리를 쫙 펴고 밤하늘을 올려 보면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흰색의 큼직큼직한 별들이 막 쏟아져 내려오는 듯이 보였지요. 엄마냄새가 아스라이 콧잔등을 자극하는 무릎을 베고 올려 보았던 눈깔사탕만한 밤하늘의 별들은 지금생각해도 정말 멋졌어요.


  “엄마, 왜 별들은 색색깔이야?”

  “우리 아들 눈이 맑아서 색색깔이지!”


어머니는 호기심어린 내 물음에 자상하게 대답해주시면서 대견하다는 듯 반찬 내 진동하는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곤 했습니다. 어머니가 부쳐주던 부채바람은 시원했고, 여름밤 벌레소리를 들으며 잠들곤 했던 돌아가고픈 나의 어린 시절.


날로 심해지는 공기오염 때문인지 밤하늘을 제대로 느낄 수 없어 내가 어린 시절 올려 보았던 아름다운 별빛이 그리움으로 떠오릅니다. 이제 40년이 훌쩍 넘은 중년을 보내고 있는 나는 사랑스러운 우리 아이들에게 맑은 밤하늘을 찾아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름다운 추억으로 아로새겨질 오롱조롱한 별빛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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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의 아이들, 우리 아이들

 

딸아이에게 책 읽는 습관이 잘 들어 있는 것이 참 기껍다. 동화책도 솔치않게 읽어주었고, 노래도 많이 불러주었고, 신나게 같이 놀기도 했던 딸아이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니 흐뭇한 마음이 일어난다. 서점에서 이 아이가 읽으면 좋을 동화책은 어떤 것이 있을까 고민을 하면서 뒤적이기도 했었다. 이 아이가 요즘 몰입해서 읽는 책들이 있는 것 같다. 슬쩍 살펴보니 요상스런 제목이 거슬린다. 하루는 딸아이에게 물어보았다.


“몇 일전 책방에 갔었다며? 무슨 책 샀는데?”

“이 책”

“친구도 같이 갔었다며? 친구는 무슨 책 샀는데?”

“이웃집 살인마!”


세상에, 뭔 그런 책 제목이 다 있냐며 핀잔하는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딸아이는 아빠는 참 딱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바로 그 순간 번뜩이며 강렬하게 스쳐지나가는 한 생각이 있었다. ‘아! 얘는 엄마 아빠가 골라주는 그리고 어른들이 골라 주는 책만 접했었구나…’


나는 지금 얼마 전 딸아이가 하루 만에 읽어치운 어떤 책을 삼일이나 걸려 읽어냈다. 부모라는 이름으로 억지로 짜 맞추려 했던 ‘모든 것들’을 모조리 뒤집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게 도와준다. 그 책에서 작가는 아이들을 대하는 우리들의 마음을 되짚어 보라는 주문을 하고 있다.


“지금 여기의 아이들, 우리 아이들은 어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어진 모습이지, 그들 스스로 만들어낸 모습이 아니다…”


그들만의 세계를 우리는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아니 얼마나 이해하려 했을까? ‘야단칠 일이 생기면 줄을 서 있던 어른들이, 도움을 청하려 하면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는 한 청소년 주인공의 절망스런 독백. 여전히 우리는 청소년을 ‘지도의 대상’ 쯤으로 여기면서 아이들의 감성을 짓누르고 있나보다. 청소년 성장소설 ‘벼랑’을 쓴 작가 이금이님의 사려 깊은 작품은 어른들이, 아니 부모라는 이름으로 우리들이 아이들을 어떻게 짓누르고 있는지 정확하게 들어내 주고 있다.


우리 아이들이 이해 받지 못하는 동안 얼마나 외롭고 서러웠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니 마음이 아려온다. 그래서인지 예전의 나도 ‘선도’라는 표현을 무척 싫어했다는 기억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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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아버지의 뒷모습

'난쏘공'드라마 

지난 3월 3일 TV문학관 방송을 알린 한겨레 신문기사 사진.



신문에서 소설가 조세희씨 원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드라마로 방영한다는 기사를 발견한다.


무심히 지나치려는 순간, 드라마의 한 장면인 듯한

기사사진 속 난장이 가족의 모습이 나의 눈길을 붙잡았다.

빈곤문제에 대해 큰 문제의식을 지니고 실천하려는 나는 이 사진을 보고

‘빈곤해소’라는 보편적 가치를 되새긴 것이 아니라, 저 깊은 곳에서 짠하게

올라오는 또 다른 느낌을 쫓아 아득하고 아련한 어린시절로 접어든다.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무기력한 가장이

가족을 위해 어떤 행동을 하고 또 어떤 생각을 했었을까?

고단함과 좌절감이 그대로 드러나는 사진 속 난장이 얼굴에서

어린시절 내 아버지의 얼굴이 겹쳐진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김 보따리를 어깨에 메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니셨을 아버지.

큼직한 김보따리를 메고 팔러나가시는 당시

아버지의 뒷모습이 한 컷 남아 있다.

얼마나 많은 모욕과 분노와 노여움을 삭이며 살아오셨을까.

어린시절 무섭도록 두려웠던 아버지의 모습이 안타까움으로 떠오른다.


“얼마나 힘드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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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퇴근길 단상

지하철을 타고 다니다 보면, 역사마다 명언(?)이 담겨 있는 액자가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액자를 읽고 있노라면, 선생님이 될 수 있고, 철학자가 될 수 있고, 그리고 때로는 큰 깨달음에 이른 스님이 될 수 있었습니다. 다양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깨달은 내용들을 읽어가며 그들의 삶에 나를 겹쳐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글들은 고단하고 힘겨운 사람들의 삶은 말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약한 마음을 잘 다스려 용감무쌍한 마음으로 무장한 용기 있는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글. 시기심과 질투심을 극복해서 타인을 위해 공헌해야 한다고 설교하는 글. 혹한과 사나운 바람, 부족한 공기, 그리고 적은 강수량 등 지구상의 가장 나쁜 생존 조건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강인한 소나무를 빗대어 ‘강인한 인간형’을 구현하자는 저 이들의 말에는 '온기가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말 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세상은 액자에 쓰인 말처럼 자신을 갈고 닦아서 승리한 사람들만 원한다는 것을 느끼게 했습니다. 그 말들은 역설적으로, 굳건한 ‘용기’를 갖고 모진 바람을 이겨내서 부러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강인한 소나무가 되지 않으면 살기 힘든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선전하는 문구들 속에서 좌절한 삶들을 감싸려는 마음은 느낄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항상 경쟁을 해야 했고, 경쟁에서 승리하려면 강인한 용기와 필요한 도덕성을 끊임없이 습득해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낙오자라는 딱지를 붙이기에 주저하지 않았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용기와 자비로 무장한 강인한 사람들만이 살아갈 수 있는 사회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 소위 말하는 ‘액자 속 따뜻한 말들’에서 온기는 느낄 수 없고, 오히려 경쟁 질서를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선전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왜 우리는 그런 생각에 딴죽 걸어야 한다는 생각을 못했을까? 왜 지하철 역사마다 걸려 있는 심오한(?) 글들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여야 했을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래야만 ‘생존경쟁’논리가 공공연히 조장되는 사회구조 속에서 살아남아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혹독한 훈련을 거쳐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숨쉴 틈조차 없는 치열한 경쟁사회인가요. 우리 한번 살펴봅시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훌륭하고 완벽하지 않다고 합니다. 시기심과 질투심 그리고 나약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이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넘어서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선, 바로 그 선에서 모진 고난을 이겨낸 사람들이 한 말이 하루가 힘겨운 이들을 도울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 글들이 ‘생존경쟁’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패배를 모르는 전사가 될 것을 글쓴이 자신도 모르게 강요한다면 나는 진정 그 글들이 내세우는 삶의 태도에 냉정할 것입니다.


나는 사람들이 그 글들을 읽으면서 자신의 마음속에 담고 있을 못난 감정을 다독이기보다는 억누르며 사회가 요구하는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 하지 않아도 될 애틋한 노력을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웬만해서는 도달하기 힘든 그 높은 가치들을 접하면서 자기 자신을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얼마나 자책할까 걱정하게 됩니다. 힘든 환경을 애써 살아가보려는 사람들이 안고 있는 ‘내안의 못난 감정’을 어루만져 주기에는 그 명언들이 요구하는, 아니 이 사회가 요구하는 강인함과 도덕적 삶은 시기하기도 하고 질투하기도 하고 투정부리기도 하며 살아가는 우리들 삶의 방식과는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용기를 배우지 못하고 획일화된 윤리를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실패한 사람들 마음속에 폭력이 자라지 않을까 염려가 됩니다. 용기가 없어도, 높은 윤리의식과 도덕적 가치를 깨닫지 못했어도 ‘당신은 존중받을 수 있는 사람이야’라고 다독여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최고가 돼야 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승리자만 살아 갈 수 있는 자본주의적 경쟁 질서를 끊임없이 요구하는 각박한 사회질서에 도전이라도 하듯 ‘모자라지만 괜찮다’는 따사로운 글이 역사마다 걸린다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감하며 위로 받고 격려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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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예수

권력자와 장사꾼의 요새가 돼 버린 예루살렘의 성전을 파괴한 예수가 현대 교회를 보게 된다면 어떤 행동을 하게 될까? 또 자신만의 행복과 안위를 위해 기도하는, 또 이슬람 근본주의에 맞선답시고 21세기 ‘십자군 전쟁’을 벌인 조지 부시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에게 무엇이라 말할까? 내가 아는 예수라면 그는 반드시 다음과 같이 성토하고 행동했을 것이다.


   “당장 기도하기를 멈춰라”

   “휘항 찬란한 네온사인 뒤편에는 고달픈 노동과 고단한 삶,

    비통한 눈물이 있는 곳이 있다. 지금 당장 기도하기를

    멈추고 나와 함께 그런 곳을 찾아가지 않겠는가?”


예수의 신성은 동정녀 수태나 부활로써 입증되는 것이 아니다. 나병환자의 움막에 들어가 그의 몸을 손수 닦아 주고, 열병에 걸려 죽어가는 아이의 마지막 순간을 고통에 찬 얼굴로 지켜보는 예수의 모습에서 험난한 길을 마다하지 걸어갔던 위대한 인간의 모습을 본다. 신이 있다면 그와 같은 모습은 아닐까. 부활하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사랑의 관념’이라는 것이 내가 본 예수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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