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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오아시스'의 공주

공주는 손과 발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중증 뇌성마비 여성 장애인이다. 임대아파트 입주권을 가졌지만 가족들에게 빼앗기고 자신은 가족들이 살던 낡은 집에서 혼자 산다. 옆집에 사는 여성이 가족으로부터 돈을 받고 가사도우미로 집에 들르지만, 공주에게 밥상만 차려 주는 정도이다. 공주는 주로 방 안에서 깨진 거울을 보는 것으로 시간을 보낸다. 옆집 여성은 공주의 집으로 종종 낯선 이들을 데려와 지내곤 해서 공주를 늘 불안하게 만든다. 어느 날 공주는 아버지를 뺑소니 교통사고로 숨지게 한 범인 대신 실형을 살다 나온 종두를 만나고, 그에게 성폭행을 당하지만, 점차 그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공주가 빈곤하다고 할 수 있어?


                                                         


그 정도면... 뭐... 살만한 거지..
낡아빠지긴 했어도 집 있겠다, 물, 전기 다 들어오겠다, 끼니 꼬박꼬박 챙겨 먹겠다, 안 그래?

라고 말한다면, 이 말이 목구멍을 간지럽힐 것 같아.
너 그렇게 살 수 있어?

걘 아무 일도 안 하잖아. 돈 쓸 데도 없고
라고 맞받아친다면, 그땐 우리 어디 조용한 데로 가서 차분히 얘기 좀 할까?


공주는 일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라고. 한국에서 공주에게 돈 벌게 해 줄 일자리가 얼마나 있을까? 아무 교육도 받지 못한 공주가 일할 수 있는 곳. 더구나 장애인 이동권의 열악한 현실을 감안할 때, 그 일자리는 공주 집 근처여야 할 텐데? 아무래도 힘들겠지? 공주는 억울하지 않을까? 일 할 수 없는 사람한테 ‘당신은 일을 안 하니 기본 의식주 선에서 만족하고 사시오’ 하니까.

그녀는 그림을 그리고 싶을 지도 모르고, 책을 읽고 싶을 지도 모르고, 대학에 가서 공부를
해 보고 싶을 지도 모르고, 여행을 떠나고 싶을 지도 모르는데. 장애인이라는 것이, 돈을 못 번다는 것이 그런 욕구들을 모두 죽이며 살아야 하는 정당한 이유는 아무래도 아니지 싶어.

빈곤의 경계는 어디에 있을까? 생명을 이어가는데 필요한 식량, 물,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집 같은 것을 공급받고 있다면 빈곤의 경계 너머에 있다고 할 수 있나? 뭔가 비인간적이야.
적어도 모든 인간은 자신의 삶의 형태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누려야 하지 않을까? 물론 환경파괴나 자원 남용처럼 다른 사람들과의 공동의 삶을 해치지 않는다는 전제를 깔고 말이야. 난 그 자유의 부당한 박탈, 그러니까 장애나 재산 같은 것들에 따른 차별로 인한 박탈이 빈곤인 것 같아.

이를 테면, 공주가 옆집 아줌마가 데려오는 낯선 사람들의 침입을 불안해하면서, 사생활도 없이 사는 것을 ‘빈곤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거야. 공주에겐 분명 불안에 떨지 않고, 사생활을 보장 받으면서 살 자유가 있는데, 맘 편하게 히 살 수 있는 집이 없고, 믿을 수 있는 활동보조인이 없는 셈이니까.

분명 누구나 여행을 갈 자유가 있는데 공주는 바깥세상의 높은 계단과 턱 때문에 이동할 수가 없다면, 그것이 바로 빈곤하다는 증거라고 생각해.

누구나 배워서 사회생활을 할 자유가 있는데 교육을 제공받지 못한다면, 그것도 역시 빈곤한 증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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