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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오아시스'의 종두

 

 

종두는 뺑소니 교통사고를 낸 친형을 대신해 교도소에서 2년 6개월 동안 살아야 했다. 형이 뺑소니 사고를 냈을 때, 가족들은 별다른 벌이도 없는 눈엣가시 종두가 형을 대신해서 교도소로 가길 암묵적으로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가족들은 종두가 교도소에 있는 종두 몰래 이사를 갔고 출소 후 어렵게 가족들을 찾은 종두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종두는 지금 형이 운영하는 카센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숙식을 해결하고 한달에 30만원 정도를 용돈 식으로 받는다. 어느 날 뺑소니 교통사고 희생자의 집에 찾아간 종두는 중증 뇌성마비 장애인인 피해자의 딸이 혼자 있는 것을 보고 결혼까지 생각하게 되지만, 이러한 종두의 생각을 가족들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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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두의 가족은 형이 카센터를 운영하면서 부족하지 않게 살아가는 편입니다. 하지만 가족이 부유하다고 해서, 종두도 빈곤하지 않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요? 종두가 가족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지 아닌지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또한 종두가 원하더라도 가족으로부터의 지원이 적절히 보장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가족들이 종두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상황에서 적절한 지원이 보장되기는 만무할 테니까요. 꼭 가족이 지원해야 하는 것은 더욱 아닐 테구요. 그러니까 종두라는 개인의 삶에서 빈곤을 찾아보자구요~

종두는 형이 운영하는 카센터에 살고 있지만 카센터는 통풍과 난방 등의 기본설비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가족들의 냉대로 언제 쫓겨날지 모릅니다. 주거권의 중요한 요소인 점유의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는 것이죠. 그 곳에서 사생활의 자유를 기대하기도 힘들죠. 독립적인 주거공간을 마련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카센터에서 아르바이트로 받는 월 30만원이 전부다 보니 고시원에 들어가기도 어려운 지경입니다.

게다가 종두는 ‘전과자’입니다. 그 낙인이 이력서에 항상 따라다니는 한,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종두가 적절하고 안정된 노동을 하기 힘들다는 것은 실업이나 저임금의 불안정한 생활을 하게 된다는 의미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가 하고 싶은, 그리고 의미 있는 노동을 통해 공동체 구성원들과 관계를 맺어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종두에게는 그런 기회조차 박탈되기 쉽습니다. 이런 기회의 박탈은 다시 종두를 항상적인 빈곤의 경계에 머무르도록 할 것입니다. 사회가 빈곤을 강제하는 것이죠.

전과자에 대한 낙인이 왜 생겼을까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임금노동으로 자신의 생계를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정상이라고 몰아갑니다. 전과자 역시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간이라 이윤을 높이는 데에 도움되지 않는 부산물 정도로 여겨집니다. 임금노동을 통해 상품을 만들어내고 소비할 수 있는 사람들만 걸러내게 되죠. 모든 생산물이 이윤을 창출하기 위한 ‘상품’으로 팔리는 사회에서는 노동력마저도 상품으로 취급됩니다. 한때, 가난하다는 것은 게으름의 증거일 뿐이라며, 심지어 범죄자로 취급되기도 했었죠. 노동력을 팔지 못하는 사람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충족할 수 없는 배제의 삶, 빈곤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과자라는 낙인과 자본주의 사회의 상품생산 논리가 종두를 빈곤한 상황으로 내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억압의 사회구조와 이데올로기가 변하지 않는다면, 안정화된 물질적 생활 조건에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하고 행동할 종두의 자유 의지가 빈곤의 늪에서 녹아내리는 악순환의 반복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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