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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 migrant union^^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의 "방패", "가나가와 시티 유니온" (1)
"모래 위의 노조"에서 "반석 위의 노조"로
 
동경에서 전철로 40분 정도 거리에 있는 가와사키에 위치한 "가나가와 시티 유니온" 사무실 외부 모습.

지난 1988년 경 일본의 외국인 노동자 문제가 사회문제로 크게 부각되기 시작했을 무렵이다. 일용직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전세계 80개국에서 일본을 찾아오게 된다.

이주노동자의 숫자가 늘어나니 당연히 여러가지 노동문제나 건강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들을 지원하는 NGO단체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요꼬하마 지역에도 이전 부터 이주노동자를 받아들이던 "가라바우가이 NGO" 가 있었는데 이들이 한국인 이주노동자를 지원하기 위해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찾았다.

이때 마침 89년 부터 한국 마산의 스미다 노조의 일본 투쟁을 지원하던 방마리아(본명 방정옥, 68세)라는 한국계 일본인 여성을 알게 된다. 90년 6월 스미다노조의 일본 투쟁이 승리하면서 마리아씨가 NGO단체에 결합, 이주노동자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의헤하라 신부님과 함께 고도부지조 인력 노동자 시장에 찾아가게 된다.

요꼬하마 고도부지조는 오사카 가마가사끼조, 동경 사이아 지역 과 함께 일본 전체에서 일용직 인력 노동자가 많이 살고 있는 지역으로 손 꼽힌다.

고도부지 지역에는 특히 한국인 일용직 노동자가 많았다. 한국인 일용직 노동자는 88년과 89년에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이들 대부분은 무비자로 입국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인들은 산재나 다른 피해를 봐도 이상하게 NGO단체를 찾아오지 않았는데, 마리아씨가 한 사람씩 만나서 물어보니 당시 재일교포 조총련과는 접촉하면 안된다는 한국 정부의 위협이 원인이었다. 한국인 이주노동자들은 정부의 감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피해를 입어도 주변에 도움을 청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조총련과 접촉하면 귀국하고 나서 자신과 가족이 큰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에 손가락이 잘리는 큰 산업재해를 입어도 NGO단체를 찾지 않았다고 한다.
이곳에서 마리아 어머니로 불리는 한국계 일본인 방정옥(68세)씨는 가나가와 시티 유니온이 처음 이주노동자를 받아들이도록 공헌했고 지금 까지도 한국인 상담 등을 해오며 이주노동자들의 어머니 역할을 하고 있다.

마리아씨는 처음에는 봉고차에서 이들의 상담을 시작했고 사람이 늘어나자 수에요시초 성당을 빌려서 매주 일요일 의료와 육아, 노동문제를 상담했다. 계속해서 노동상담을 원하는 이주노동자의 숫자가 더욱 늘어나자 마리아씨는 당시 가나가와 시티 유니온(지역 일반노동조합)의 무라야마 사토시 위원장(56세, 일본인)에게 이들의 문제를 의논했다.

당시 무라야마 위원장은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들을 돕고 싶어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마리아씨가 이주노동자를 조합에 가입시키자고 제안 했을때 무라야마 위원장은 "예, 예 알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가 일본어로 두번 대답하는 것의 의미는 " 꼭 함께 하고 싶다"는 뜻이라고 한다.

가나가와 시티 유니온은 1984년 전국 조선업 관동지역 가나가와 시티 노동조합으로 처음 설립됐고 1994년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노동조합원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일본의 경우 노조가입은 개인이 자유의지에 따라 누구나 가입할 수 있다고 한다. 비록 체류 비자가 없는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라도 노조에 가입할 수 있다.

일본에서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를 노조원으로 받아들이는 노조가 더 있다. 일본 전체에 개별 노동조합이 2만 개 정도 있다. 이중에서 개별노조로 한사람씩 조합원을 받아들이는 곳이 500개 정도 있는데 그 중 30개 정도의 노조가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를 조합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한다. 직종별로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받아들이는 곳이 처음에는 가나가와 시티 유니온과 같은 조선업 위주였으나 지금은 기계금속과 자동차 등 일반 직종에서도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조합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무라야마 위원장이 처음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조합원으로 받아들이자고 제안했을 때 반대가 70% 였다고 한다. 반대하는 조합원 중에는 "사람이 곤란할 때 살린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이 노조가 짊어져야할 짐은 아니다."라는 의견이 많았다고 한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살린다고 해도 이것이 직접적으로 노조조직과 연결되서는 안된다는 비판도 있었다.

그러나 무라야마 위원장은 "꼭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받아들이겠다. 안그러면 내가 노조에서 나가 새로운 노조를 만들겠다"고 하면서 까지 조합원들을 설득했고 결국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받아들이게 됐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조합원으로 처음 받아들이기 시작한 10년전에는 다른 노조에서 가나가와 시티 유니온을 "모래 위에 세운 노조다. 너무 어려운 실험을 하고 있다"며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 노조로 평가했었다. 무라야마 위원장도 그 당시에는 자신이 없어서 이에 대해 반론하지 않고 꾹 참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실험 결과는 좋았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사람들이 가나가와 시티 유니온을 " 반석위에 있는 노조" 라며 성공한 노조로 평가하고 있다.
남미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이 상담을 받으러 사무실에 왔다. 전체 조합원 800 여명 중 이들이 차지하는 숫자는 60% 라고 한다.

최근에는 일본 경제가 위축되면서 일본 정부나 노동운동계의 움직임이 이주노동자가 필요하다는 의견으로 돌아오고 있다고 한다. 노동시장에서 이주노동자를 확대하려는 계획이 늘어나고 있다. 고령자가 늘어나면서 경제적으로 노동인력이 부족해서 외국인노동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 노동계에선 비정규직 노동자를 조직화하는 과정에서 외국인 노동자가 고용 불안정 , 하청 노동자, 단기간 고용 노동자이기 때문에 비정규직 문제와 맞물리는 점이 많아, 전노련과 전노협 모두 이주노동자의 문제를 큰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있다. 여러가지 면에서 외국인 노동자와 함께 일한다는 것이 지금의 시대에 맞다는 것이 무라야마 위원장의 주장이다.

그가 노동조합을 이끌어 오면서 제일 어려웠던 점은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조합원의 다수를 차지하다 보니 경영자들이 용역이나 폭력배를 부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이주노조가 "1일 행동"을 할 때면 경찰도 자주 찾아와서 신경이 많이 쓰였다고 한다. 이주노동자 조합원들의 신분이 불안정하고 일본에 대해서도 잘 모르기 때문에 노조를 신용하지 못했고, 경영자와 장기간 투쟁하는 경험도 없어서 장기간 투쟁할 힘이 부족한 경우가 많았다. 이런 처지의 조합원들을 짊어지고 일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고 한다.

무라야마 위원장은 "시티 유니온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서 좋았던 점은 조합원의 수가 많다보니 상담률도 높고 '1일 행동'을 할 때도 함께 힘을 모으기 쉬웠던 것"이라고 한다. 가나가와 시티 유니온은 2년 전까지 1년에 200번이 넘는 "1일 행동"을 했다고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일본 전체에서 1년에 200번이 넘는 행동을 할 수 있는 노조는 가나가와 시티 유니온 뿐이라고 한다. 만약 동경 가스미까 지역 일본 중앙 정부청사가 있는 곳에서 "1일 행동"을 해야 하면 가나가와 시티 유니온이 제일 먼저 달려왔다고 한다. 시티 유니온 사무실이 중앙청사까지 지하철로 40분 거리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일본 노조에서는 산업별, 기업별로 만명 정도의 조합원이 있다고 한다. 이들이 년 2회에서 3회의 행동을 하며, 거기에 1,000명 정도의 조합원을 동원하면 그것이 최대 치수다. 그러나 만약 조합원이 50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해도 년간 200회의 행동을 하게 되면 1,000명을 동원한 년 3회의 행동 보다 훨씬 높은 효과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무라야마 위원장의 의견이다.

일본 기업 내의 노조는 행동을 해도 노동조건 교섭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러나 가나가와 시티 유니온은 자기의 문제 뿌만 아니라 다른 노동조합의 노동쟁의를 지원하고 전쟁반대 집회와 같은 반정부 집회에도 참가해 왔다. 이런 일을 기존의 기업 노조가 하려면 기업의 제정과 조합원들의 의식 모두를 재정비해야 하기 때문에 실행하기 어렵다고 한다. 무엇보다 조합원들의 의식을 개선하는 것이 힘들다고 한다. 그러나 가나가와 시티 유니온은 이런 일을 10년 동안 해내고 있다.

비록 사회적 약자인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중심이지만 년간 200회의 행동을 10년 이상 유지한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다. 이들이 비록 돈을 벌러 일본에 오는 것이지만 경영자들의 억압을 당하고 사회의 바닥까지 떨어지는 것을 경험하고 나면 그것에 대항할 용기가 생긴다. 그래서 다른 노조에서는 하기 힘든 행동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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