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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8/18
    고사신편에 대하여
    유마
  2. 2008/10/28
    루쉰과 추억
    유마
  3. 2008/10/05
    루쉰-생생하게 보는 자.(2)
    유마

고사신편에 대하여

고사신편을 이해하는 키워드

 

첫째 범속 혹은 일상

신화를 범속의 영역으로 끌어오다

 

둘째 주체화의 새로운 형식들.

고전에서 끌어낸 새로운 주체들.

 

>>>혁명과 존재의 변신. 루쉰이 구성해낸 새로운 주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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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과 추억

 

 

������朝花夕拾������에서는 루쉰을 오랫동안 감싸고 있던 적막감이 잘 들어나지 않는다. ������납함������에서 루쉰이 보였던 추억에 대한 태도를 생각한다면 의외다. 그 시절 그에게 추억은 ‘마음속의 실 한 가닥으로 쓸쓸하게 시간을 매어두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조화석습������에서 루쉰의 ‘추억’ 혹은 ‘기억’에 대한 태도는 다르다.


 물론 ������조화석습������ 역시 기억이나 추억의 허망함에서 시작한다. “나는 전에, 마름시, 누에콩, 줄의 새싹, 참외 등등 어렸을 때 고향에서 먹었던 채소류가 줄곧 생각나서, 그게 얼마나 맛있었던지 입맛을 다실 정도로 심한 망향의 정서에 사로잡힌 일도 있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정작 그것을 먹어 보니 별게 아니었다. 단지 기억 속에서는 지금도 옛날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추억의 허망함.  우리에게 추억의 허망하다는 말은 진부하게 된지 오래다.  그러나 동시에 ‘추억이 허망하다’는 말 또한 허망하게 생각된다. 좀 더 분명히 말하자면 ‘허망하다’는 말이 실감나지 않는다. ‘그래 추억은 허망한 거야. 기억․추억이란 우리가 만들어낸 가공에 지나지 않지’라는 말로 끝나지 않는 문제가 남는다. 즉 허망하다는 말과 내가 실감하는 것 사이에 너무나 큰 구멍이 존재한다. 허망하지. 그런데 ‘허망하다’는 말은 도대체 뭐야?


많은 경우 기억이 허망하다는 것은 관용구에 가깝다. 여전히 우리는 기억과 추억의 허망함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허망함을 인정하는 순간, 그것에 대해 어떤 지적, 예술적 노력을 쏟으려고 하지 않는다. 반면 루쉰은 추억의 허망함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 허망한 말을 집요하게 탐구하는 듯하다. 물론 그에게 역시 추억은 허망하다. 본래적인 기억, 변하지 않는 기억, 단단하게 굳어진 기억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점에서. 그러나 어릴 적 기억 속으로 깊게 잠수해 들어가, 더 이상 상세하게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까지 자신의 추억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조화석습」은 루쉰의 과거가 어떻다는 것을 보여주기 보다는 루쉰이 과거나 추억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그는 허망한 과거에 어떻게 접근하고 있는가?


루쉰은 과거나 추억은 하나의 사건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하는 듯 하다. 즉 추억은 하나의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의 것이 치유되지 않은 채로 억눌려 있다가 특별한 계기에 폭력적으로 표출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말 그대로 과거는 과거다. 가령 「개․고양이․쥐」에서 루쉰의 고양이에 대한 증오는 얼릴 적 상처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고양이를 싫어하는 이유는 루쉰의 일상을 좀 먹기 때문이다. 그가 고양이를 미워하는 것은 ‘正人君子’라고 거드름을 피우는 이들을 증오하는 것과 동일한 수준이다. 이것은 이들의 타자에 대한 태도라든가, 권력 지향적 욕망이 작용하는 현재적 증오지, 과거의 유산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혹은 추억의 시간은 종종 삶에 던져진 그물로써 작동한다. 그렇다면 이런 ‘거슬러 올라간 생각(追憶)’의 무게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루쉰은 관찰을 통해서 문제를 벗어난다. 24효도에서 어린 루쉰은 과거의 것을 일단 그대로 받아들인다. ‘효’ ‘정절’과 같은 말의 무게 속에 갇히는 대신, 그 말이 그대로 받아들여 본다.


“지금도 잊지 못하거니와 부모 앞에 누워 있는 노인과 어미니 팔에 안겨 있는 아이(곽거가 아이를 묻다), 그것이 나에게는 매우 이상스럽게 느껴졌던 것이다.”


추억 혹은 과거에 붙들리는 것은 개인의 정신적이고 육체적 무기력함과 결부되어 있다. 그리고 이런 무기력함은 관찰력 부족에 유래한다. 실재의 삶이 이루어지는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에 대한 무감각, 생각 없음이 일종의 재앙으로 작동한다. 즉 추억과 같은 시간의 무게를 벗어나는 것은 일상 혹은 익숙한 것에 대한 거리두기와 관찰을 통해서이다. 사람들이 추억이나 과거의 무게를 짊어지는 것은 그것에 대해서 무지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 사람들 속에서 특정한 의지가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현재를 미래로 미루며, 보이지 않는 심판자에게 삶을 의탁한다. 그들은 어떤 순간에도 그리고 어떤 장소에서도 자신의 삶을 살지 않는다. 루쉰은 이런 삶의 방식에 대해 ‘아 구제할 길 없구나’하고 탄식한 바 있다. 기억이나 추억의 굴레에 갇혀 있는 한, 현재의 삶, 지금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루쉰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현재의 삶이다. 가장 가까이 있는 것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에 의하면 잘못 이해되고 있으며 심지어 관심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삶을 둘러싼 것들에 대한 세심한 관찰이 필요하다. 추억도 이러한 세심한 관찰의 대상이다. 즉 현재의 상태를 상대화하기 위해 사람들은 ‘자신의 역사‘를 상대화해야한다. 루쉰은 자신의 추억․기억을 관찰하고 분해하며 재조합한다. 이런 점에서 ������조화석습������은 루쉰이 자신에 대해 행한 계보학의 결과물이다. 계보학이 그 기원을 드러내면서 ’말‘의 굴레에서 벗어난 삶의 길을 열어 주는 것처럼, 재조합된 추억은 삶을 위한 무기로 전환되고 있다. 이것이 후지노 선생의 가르침에 대한 기억이 ‘정인군자’들이 싫어하고 미워할 문장을 다시 쓰게 하는 전환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조화석습������에서 기억․추억되는 대상은 그렇게 비애에 차 있지 않다. 오히려 추억은 살아가는 데 추동력으로 작용한다. 말하자면 루쉰은 추억을 허망한 비애의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삶을 위한 힘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그에게 추억은 삶을 위한 활용되어야 할 기술을 배우고 연마하는 장이다. 아침 꽃을 저녁에 줍는 것, 이 시간의 활용술이 ‘기괴함’과 ‘공막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루쉰의 ‘시간-전투술’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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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생생하게 보는 자.

친구들과 함께 읽고 있는 루쉰의 글.

우리의 주제는 루쉰의 미소와 루쉰의 검이다.
그것은 루쉰과  함께 웃고,  함께 검을 벼리고 겨루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그의 글은 그가 어떻게 웃고, 어떻게 검을 벼리는지를 알기 위한 무수한 통로의 하나다. 그렇데 막상 우리는 통로를 발견하기 보다는 글 속의 환상 혹은 미로 속에 빠져들고 만다.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가 그 환상과 미로를 만들어내는 것이겠지만.

그렇다면 '통로'를 찾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방법은 간단하다(말하긴 쉽다^^).  먼저 잘 보면 된다!! 그런데 잘 본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우리의 언어는 무수한 망상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가령 우리는 루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나? 우리는 그를 '위대하고 탁월하며 창작력이 풍부한 정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나? 물론 루쉰의 글은 강렬하다. 그러나 루쉰을 그렇게 '위대한 정신'으로 숭배하는 건 나 자신의 특별한 욕망의 표현이 아닐까?

예술가, 천재에 대한 망상이 어디에서 기인하는가에 대해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들은 분명 위대한 지성이 끼치는 영향이 가장 기분 좋게 느껴져서 자신이 질투를 느끼지 않을 만한 곳에서만 천재에 대하여 말하게 된다. 누군가를 '신과 같다'고 하는 것은 여기에서는 우리가 경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들어진 모든 것, 완전한 것은 경탄의 대상이며, 생성 중인 모든 것은 경시된다."

'위대한' 루쉰이라는 표상은 우리가 더 이상 그와 경쟁하지 않겠다는 것, 그와 칼을 벼리고 겨루는 친구가 되기를 포기하겠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나 루쉰의 활동이나 글만이 뭔가 '특별한'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또한 놀랄 만큼 복잡하고 생생한 것이 아닌가? 물론 우리 자신만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 어느 것도 기적이 아니라 '生生'한 것이다.

루쉰 역시 삶의 주춧돌을 놓고, 그 다음에 무엇인가를 세우는 것을 배웠을 것이며 부단히 소재를 구하고, 이리저리 만들어 보는 일을 했을 터이다. 즉 그 역시 자신을 둘러싼 조건들을 '선명'하고 '가감' 없이 보고자 하지 않았을까. '있는 그대로' '생성하는 그대로' 보고 그것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것.

이런 글쓰기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쉽게 간과된다. 가령 예리하고 명확한 글을 우리는 너무 평범하다고 간주해 그것을 이해하려고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생사의 경계, 복수-포옹의 경계, 얼음과 불꽃의 경계, 원수와 친구, 산 자와 죽은 자 등 충돌하는 양상들은  접근 못할 부분이 아니었다. 그런데 <가을밤>이나 <아름다운 사연>과 같이 부분은 매우 난감했다.  뭐지 이건. 가까이 있지만 그래서 잘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할까. 시각의 사각지대 같은 부분.

이에 대해 곰숙씨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자연을 다루는 부분. 이 부분은 루쉰이 바란 본 세계가 아닐까. 인간들만의 세계가 아니라 천지인의 세계. 하늘과 인간은 상관 관계를 갖고 있다. 즉 천지와 인간은 함께 살아간다. 우리 존재 안에 그런 모든 것이 들어 있다. 루쉰이 그것을 포착해 드러낸 것은 전혀 은유가 아니다. 그가 실감하고 있는 시공간을 드러내고 있다고 본다. 우리가 수사나 표상을 통해서 만들어내는 세계가 아니라, 그 표상들을 걷어내는 순간, 보게 되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소용돌이를 본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일까. 루쉰은 인간의 사멸이나 부후에 대해서 허황함 없이 바라보고 있는 듯 하다. 우리가 폐허 위에 또 폐허를 어떻게 쌓아가는지를. 우리에게 한 조각 '고철'에 불과한 것을 그는 숨겨진 보고의 열쇠로 만들어내고 있다.

다시 한 번더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위대한 루쉰이 존재하지는 않았지만 루쉰이 훌륭해지 것은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 과정은 어떤 것인가? 사실 우리는 그의 글을 통해서 알고 있지 않나?

그의 방법은 지극히 간단했다. 언어나 표상으로 눈코입을 가로막는 대신, 눈으로 '그대로 보고' 코로 생생하게 냄새 맡고, 입으로 가감 없이 드러냈을 뿐이다.그것은 그가 우리가 범접하지 못할 재능과 능력을 타고난 것 때문이 아닌 것이다. 말하자면 위대한 루쉰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실함'과 집요함 속에서 언어의 표상과 그물을 비켜나가는 루쉰만이 존재했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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