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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과 김규항의 논쟁을 보다
나는 이런 문제에 꽤나 무신경하다는 생각이 났다.
아니 정확히는 무능력하다는 말이 맞다.
진보신당의 방향, 가령 정책의 향방이라든가
심상정이나 노회찬의 현실 대응방식이라든가에 꽤나 무지하다.
아니 정확히는 그닥 관심이 많지 않다.
이런 문제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자본주의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건 아니다.
어떻게 자율적인 공간과 삶을 만들어갈 것인가? 그리고 이 자율성을 어떻게 확산해 나갈 수 있을까가 고민이다.
정치적 자율성은 삶을 위한 기술일 뿐이라고도 생각한다. 삶과 정치는 별개가 아니지만 아무래도 삶에 더 무게 중심이 놓인다. 어떤 거창한 변화도 삶과 유리될 수는 없다. 말하자면 어떻 주체로 구성될 것인가의 문제다. 나를 변화의 공간 안에 정박하게 하는 것, 그리고 다시 새로운 바다를 향해 나가는게 일차적인 관심이다. 우리의 삶에 편재되어 있는 미시적 권력에 민감해지는 것이라고 할까? 이때 권력은 우리를 무명의 공간에 머무르게 하는 조건이다. 나를 동일한 패턴으로 반복하게 하는 삶의 조건들, 이 조건들을 받아들이며 친구들과 함께 길을 가는 것이 나의 일차적인 관심이다.
내 몸 밖에 있는 대의에는 시선이 쏠리지 않는다.
오히려 현재를 충실히 사는 것, 삶을 충만하게 만드는 것에 집중해 있다.
물론 이를 위해서 이웃들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가 중요하겠지만.
공정한 사랑?
친구와 만나기로 했다. 처음에는 시청역, 그러다가 다시 숙대앞으로,
왜 그랬을까? 그 친구에게 회를 사주고 싶었다. 그런데 시청 근처는 뭐가 있는지 잘 모르고
내가 익숙한 공간에서 만나서 음식점에 함께 가고 싶었다.
그런데 그 친구 왈. "형하고 통화할 때 뭔가 답답했어. 그냥 만나서 먹으면 그만인데
굳이 숙대 근처까지 올 필요가 있는가 해서. 숙대로 가는 건 상관없는데 뭐라고 할까.
형이 뭔가 벽갇은 것을 만들어 놓고 판단한다고 할까."
만남에 조건을 건다.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다.
판단할 때도.
너는 이렇게 해야 한다거나 나는 이렇게 해야만 한다 등등.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 왜 이렇게 많은지
해야만 하는 것 때문에 늘 비틀 거린다.
페어러브는
연애 영화다. 50대와 20대의 사랑이 아니라
그냥 연애 영화다.
만남이 있고, 교감이 있다.
그리고 소통하기 위한 삐그덕거림이 있다.
그것도 무겁지 않게.
사랑은 내가 가지고 있는 전제들을 내려 놓는 것.
~때문에를 말하지 않는 것,
내 한계를 넘는 것은 아픔과 기쁨을 함께 동반한다고 말한다.
내가 몸을 낮춘만큼, 발을 한 발 앞으로 내 미는 만큼
우리는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다른 길을 가게 된다는 것.
나란히 걷던 사람들이 점점 옆으로 멀어져
다른 길로 가는 경우가 요즘 부쩍 많아졌다.
그것은 아주 소소한 일에서도 감지된다.
전에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을
이제는 말로 모두 이야기해줘야 할 때 그렇다.
물론 우리가 언제 각자의 길을 가지 않은 적이 있던가?
그러나 옆에서 함께 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길로 걸어가고 있다.
지금은 조금 옆으로 난 길이지만
어쩌면 갈 수록 멀어져 버릴 지 모른다.
우리는 우리 앞에 높인 길이 어디로 향해갈까?
알 수 없다.
그,런데 다른 길을 가는 것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말로야 이해한다고 하지만
몸에 새겨진 기억이 이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친구와 유난히 다툼이 많아진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친구들과의 싸움이 아니다.
변한 관게에 적응하기 위해
내가 나 자신에게 가하는 폭력이자 싸움이다.
"아직 어떠한 사상가도 사회와 개인의 건강을, 그것이 얼만큼 많은 기생동물들을 견딜 수 있는지에 따라 평가하려는 용기를 갖지 못했다. 그리고 쟁기의 날을 저 관대하고 부드러운 연설 속에서 담긴 정신으로 이끌었던 국가 건립자는 아직 한 사람도 없다."
>>>우리는 건강한가? 흔히 우리는 우리 신체에 다른 존재들, 가령 병균이나 바이러스가 없는 상태를 건강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신체는 무수히 많은 존재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은가. 우리가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것들. 수 많은 기생동물이 우리 신체들 채우고 있다. 그렇다면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신체의 균형이 무너진 것, 기생동물들과 우리의 균형이 무너진 것이지만, 동시에 다른 존재들에 대한 맹목적인 공격으로 표현되는 것은 건강함이 무너진 것이다. 건강은 어떠한 상태가 아니라 능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 안의 존재들을 얼마나 잘 포용할 수 있는지 말이다.
사회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 사회의 건강함이란? 다른 것들, 심지어 기생하는 존재들이 그 공간에서 얼마나 즐겁게 살아가느냐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상류 사회 사람 중 4분의 3이 합법적인 사기에 몰두하고 주식 거래와 투기로 인한 양심의 가책 때문에 괴로워해야 할 때, 그들을 부추키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그들이 실제로 궁핍하기 때문은 아니다. 그들은 그렇게 심하게 형편이 나쁘지 않으며 아마 음식에 대한 걱정도 없을 것이다. 그들을 그렇게 부추키는 것은 돈이 쌓이는 속도가 너무 느리다는 초조함과 축적된 돈에 대한 끔찍한 욕망과 애정이 밤이든 낮이든 그들을 몰아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초조감과 애정 속에서의 힘에 대한 저 열광적인 욕망이 다시 나타난다. 힘에 대한 이러한 열광적인 욕망은 옛날에는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신념에 의해 불붙었고 너무나 아름다운 이름으로 자신을 가정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떳떳한 양심으로 비인간적인 일을 감행할 수 있을 정도였다."
>>>힘에 대한 욕망. 초조함과 집착은 누군가를 희생시키기를 원한다.
삶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는 것.
니체는 <아침놀> 3권에서 투키디데스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인간에 대한 사색가인 투키디데스에게서
가장 편견 없는 세계 인식의 문화가 화려하게 개화”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리스 시대의 건축은 아주 적은 양으로 숭고한 것을 표현할 수 있으며
표현하기를 좋아했다. 반면 우리는 삶을 아주 복잡하고 미로처럼 만들어 버린다.
우리들은 우리 자신에 대해 단순한 관념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니체의 말처럼 삶은 그렇게 단순한 것일까?
사실 삶은 복잡하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다.
그러나 삶이 복잡하다고해서 판단과 사유를 미궁 속으로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
판단은 명료하고 행위는 간단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문제를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지 않은 것일 뿐이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잘못된 관념 속에서, 적합하지 않은 식으로 문제를 구성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혼란스러울 때가 우리가 문제를 제대로 던지고 있는지에 대해 다시 질문해야 할 때이다. 즉 이 순간이 문제를 새롭게 고안해야할 순간이다.
그런데 삶의 고안해야 할 순간에 우리는 매일 사용되어 닳아간다.
우리들에게는 인격도, 재능도, 근면함도 부족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들 자신에게 방향을 부여할 수 있는 시간이 허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어떤 방향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도록 길들여진다.
‘노동’하는 자로서 우리는 매일 사용되어 닳아지도록 교육받고 있다.
니체는 노동에 대한 찬민 속에서 ‘모든 개인적인 것에 대한 공포’를 본다고 말한다.
우리는 일하기 위해서 삶을 방기한다. 우리는 고민하고 사유하고 살아가는 대신에,
답을 암기하고, 스펙을 갖추기 위해서 몸부림친다. 그리고 그 공간에 들러붙기 위해서 우리의 욕망, 삶에 대한 고민을 거세한다. 즉 우리는 자신을 거세하는 방식으로 노동한다.
그 경우 노동은 ‘최고의 경찰’이 된다. “그것이 모든 사람을 억제하고 이성, 열망, 독립욕의 발전을 강력히 저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안전’을 위해 우리는 ‘삶’을 내버려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편에서 안전한 공간에서 좋은 행위란 타인에 대한 ‘동정’으로 표현된다.
말하자면 ‘너는 왜 그렇게 사니?’라는 질문.
‘왜 정해진 직장도, 가족도, 집도 절도 없이 살아가니?’
그러나 이 동정의 말 속에서 우리는 위험에 대한 공포를 볼 수 있다.
‘안전’에 위협적인 것을 제거하기.
이때의 “공공의 안전과 사회의 안정감을 목표로 하는 행위들만 ‘선한’ 행위로 평가된다.”
라이히 식으로 말하면 이러한 시선은 타자에 대한 감시의 시선이자 억압의 욕망을 내면화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사유는 ‘수요와 공급’ 이라는 평가기준과 결부되어 있다.
즉 우리는 화폐가 순환하는 규칙에 맞도록 삶을 조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는 ‘노동하는 사람’ 속에서 하나의 ‘위험’을 발견한다.
“이 안전이 현재는 최고의 신성으로서 숭배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 가공할 일이다.
바로 ‘노동자’가 위험한 존재가 된 것이다! ‘위험한 개인’들이 우글거리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의 배후에는 위험 중의 위험, 즉 개인이 있다.”
자본이나 권력에 기가 질리거나 압도되거나 부끄러워하거나 숨이 막히지 않은 삶의 가능성.
자기 본위의 삶. 예외적인 시간과 불복종의 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 우리를 가로지르고 있는 삶의 양식들을 넘어 우리 자신을 고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삶에 대한 고양은 어디에서 만들어질 수 있을까?
니체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자신들이 지금 이 ‘비루한 일상’에 느끼는 소소한 불만족에. 바로 지금 이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소소하고 반관습적인 행위’들. 그러나 사실 ‘소소’한 행위가 우리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習을 깨트린다는 점에서 그것은 집합적으로 작용하는 힘이다.
니체는 권력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저항한다. 그가 잠언처럼 자신의 사유를 전개하는 것도 구체적인 저항과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니체에게 삶의 문제로 다가오지 않는 것, 삶의 전환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은 모두 망상이 아닐까. 그리고 니체가 부여잡은 투창은 이런 망상을 향해 던져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침놀] 1부를 읽었다.
니체는 이 책과 만나는 사람들은
'지하에서 작업하고 있는 한 사람'을 보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리고 그가 '서서히. 신중하게, 부드럽지만 가차없이 전진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자신의 아침, 구원, 아침놀도.
니체는 우리가 당연시하는 것,
우리에게 당위로써 명령되는 것들의 지층 속으로 들어가
지층의 어떻게 형성되고 어떤 방식으로 쌓여가는지를 세심하게 파헤친다.
그는 이것을 위해 세심하게 말들의 가치를 분류하고 그 의미를 파고들어간다,
그것은 신중한 작업이다. 그 말들은 천천히 읽혀지고, 천천히, 세심하게 해체된다.
당연히 강한 인내심은 필수적이다.
지층을 탐사하고 그것을 뚫고 나오기 위해서
우리는 강한 뚝심과 예리한 안목, 섬세한 손을 가져야 한다.
그러고 나서여 우리의 충혈된 눈은 아침놀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아침놀] 의 니체는 '지하생활자'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가 설사 지층들을 탐사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에게 놀라웠던 것은 니체가 탐사과정에서 서 있는 위치였다.
그는 때로는 자연의 시선에서, 때로는 우주적 관점에서
인간들이 만들어온 지층들을 바라다 본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상대화해서 바라다보지 않는다.
인간은 동물과 다른 특권적 존재이며,
당연히 그들이 지구라는 자연이 만들어낸 최고의 산물이다.
그러나 "어떤 작은 별과 그곳에 살고 있는 작은 종인 인류에게
하나의 예외가 허용되어야 하는가!"
벌레가 자연의 일부이듯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다.
이 최후의 인간들 속으로, 이 먼지 속으로 들어가
그 속에 또아리 트고 있는 세계를 해체해야 한다.
인간들은 수 많은 것들이 마치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아마 인간들이 사물에 부여해 왔던 그 의미들을 해부하게 된다면
그것이 한낯 인간들의 자기 망상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결국 이 사물에 대한 인식은 '인간' 자신에 대한 인식이 될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들 속에 우리 자신이 모습이 들어가 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 모습을 때로는 멀리 때로는 아주 가깝게
바라다보고 있다.
만약 니체의 언어에 '선명한' 언어 혹은 과학의 언어라는 말이 허용된다면
그것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 다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만들어낸 말의 연계고리를 깨트리는 것.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 또한 지층으로 잠수해야 한다.
니체의 우정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니체.
그는 모든 ‘인간적인 것’들을 떠나보내려고 작심한 듯,
자신을 둘러싼 모든 관계와 배치들을 물어뜯는다.
‘모든 것’을 향해 달려가고 그 모든 것들을 몰락시키고자 한다.
형이상학, 도덕, 종교, 예술, 문화, 국가에 등등.
이 시기의 니체는 인간을 구성하는 모든 힘들과 맞서 싸우는 듯하다.
교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교제, 그 쇠락한 힘들에 메스를 가한다.
이 해체 작업은 아주 섬세하다. 그는 인간의 심리에 초정밀 현미경을 가져다 댄다.
가령 그 해체 속에서 인간의 ‘사려 깊음’이란 두려움의 표시임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아무도 기분 상하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상처 받지 않고 상처주지 않으려는 태도,
즉 상처에 대한 두려움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적인 동정은 어떠한가?
불행한 사람을 돕기를 좋아하는 이 ‘인간적’인 성질은
동정하는 자들이 우월함을 가지고 있음을 느끼도록 하는 행위이다.
그래서 일까?
이들은 “그들이 다른 사람이 행복할 때 한 일이 없어지고
불필요한 존재가 된다고” 느낀다.
이런 점에서 니체에게 ‘인간’은 가장 추한 것 중의 하나다.
“가장 추한-여행을 많이 한 사람이 인간의 얼굴보다 더 추한 곳을
세상 어디에서라도 발견한 적이 있는지 의심스럽다.(320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니체의 해부도 속에서
‘세인’적인 것 저편의 새로운 인간관계를 상상할 수 있으며, 해야만 한다.
이 새로운 인간은 ‘논쟁적’이다. 그렇다면 논쟁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그것은 “자신의 사상을 얼음 위에 놓는” 것에서 출발한다.
열정적으로 상대방에게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사상을 영도의 얼음 위에 놓아야 한다.
이 냉정한 열정의 소유자는 자신의 과거를 장식하거나 꾸미지 않는다.
이 냉정함 속에서 그는 ‘과거’의 것과 대면한다.
그는 때로는 ‘훌륭한 적’을 만들어내고 그와 대결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그에게 ‘적이 존재한다’ ‘그가 나와 대결하고 있다’는 감정.
그리고 쉽사리 ‘화해’의 제단에도 오르지 않는 것.
그는 화를 내고 다른 사람을 욕하면서
그들이 자신을 나쁘지 않게 여기지 않게 바랄 정도로 자만심이 강하지 않다.
그는 논쟁을 사랑하는 만큼 “감사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즐겁게 느끼고
의무를 가질 기회들을 소심하게 피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오버’하지 않는다.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짊어지기 때문이다.
그는 좋은 친구가 되는 것만큼 좋은 친구를 가지는 재능을 가진다.
그는 “전혀 다른 성격과 재능을 가진 사람들에게 매력을 발휘하여
(이들을) 하나의 완정한 동아리”로 만들어낸다.
이 친구들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친구가 되게 한다.
물론 친구들 사이에 ‘오해’는 필연적이다.
친구를 유혹하는 어떤 ‘미끼’
이 오해와 착각이 친구들을 그에게 이끌어오기 때문이다.
세상의 가장 위대한 사람도 어떤 경시할 만한 이유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 ‘오류와 착각’ 속에서 친구의 변신의 가능성을 찾아낸다.
완벽한 친구를 찾아내고자 했던 현자들이
“친구들이여, 친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외쳤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 오류와 착각이라는 인연의 장을 가로지르며 다음과 같이 외쳐야 한다.
“친구들이여, 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부님들이 서울광장을 가로질러 갈 때
그들의 하얀 미사복에서
나는 전사들의 몸에 밴 화약 냄새를 살짝 맡을 수 있었다.
그들이 전하는 비폭력의 외침.
그 파동은 다른 누군가에게 무엇보다도 강력한 물리적 힘으로 다가갔으리라.
'존재 한다는 것'만으로 물질적 폭력 이상을 만들어내는 이들.
비폭력이 '힘의 부재'가 아님을 이들이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폭력 내부에 어떤 구분의 선을 귿고 있다.
사카이 다카시는 폭력과 비폭력의 구분 불가능성이라는 전제 하에서 글을 시작한다.
폭력은 안 된다는 막연한 '도덕 감정'이 폭력을 용인하며, 폭력의 압도적 비대칭성 속에
폭력에 대한 무감감을 확대시키는 하나의 동력이라는 것이다.
가령 비폭력에 동의하는 이들이 갖고 있는 경찰 폭력에 대한 수용 같은 것이다.
동시에 폭력은 안 된다는 말이 폭력에 대한 사람들의 반감이나 거부감을 반영한 것이 아니다.
비폭력은 하나의 역설을 잉태하고 있다.
폭력은 안된다-그러니까 폭력을 증오한다-폭력을 행사하는 자를 증오한다-폭력을 행사하는 자에게 폭력을. 사실 폭력을 행사하는 권력은 언제나 비폭력을 전제로 행사되고 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폭력이나 비폭력이 아니라 새로운 지대를 만들고 생성해내는 것,
폭력 내부를 가로질러 새로운 생성의 공간을 구성하는 문제다.
사카이 다카시는 폭력과 비폭력을 둘러싼 일종의 계보학을 그려낸다. 킹 목사의 비폭력 노선, 말컴X, 파농등의 자기 증오로부터 해방을 위한 폭력 등등. 그는 이들의 논의가 포력과 비폭력의 이분법에 갇히기 보다는 새로운 적대성의 형성이었음에 주목한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창조해내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의 폭력은 이전의 폭력의 문제와 어떻게 구분되는가?
근대국가를 규정하는 요소는 주권, 폭력, 안정의 특이한 배치였다. 말하자면 국가는 폭력을 배타적으로 독덤하는 한편, 그 내부에 살고 있는 국민들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체제.
그런데, 신자유주의 확산과 함께 국가는 더 이상 자국민들의 삶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비정규직법의 확산, 농민의 배제와 같은 정책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가 만들어내는
대중의 배제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난민'이라고 표현되는 배제된 대중의 삶.
사센은 자본이 글로벌 시티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고
글로벌 시티는소수의 엘리트와 다수의 배제된 자들로 분해된다고 말한다.
마크 데이비스 식으로 말하면 초고층 빌딩과 슬럼으로의 분해라고 할까.
사카이 다카시 역시 '난민'은 이제 사람들이 필할 수 없는 운명으로 다가왔다고 말한다.
이들의 삶을 지배하는 정조는 '불안'이다. 불안한 만큼, 안정장치(security, 보장 보험)에 더더욱 매달리게 된다.
그러난 사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국가는 안정장치로 작동할 수 없다. 오히려 국가는 배제의 장치가 아닐까. 말하자면 신자유주의 체제의 국민국가는 경찰국가에 가까워지고 있지 않은가. 내부에서 발생하는 난민들을 관리하는 자. 성의 문턱을 관리하는 자로 전환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삶은 폭력에 노골적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것.
더욱이 신자유주의 체제는 대중들의 고립을 부축기고, 자신의 삶을 자신 스스로 돌봐야 한다는 생각을 부추기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안전을 위해 쏟아지는 무수히 많은 '보장보험'에 눈길을 돌린다.
일종의 폭력에 노출된 상황. 이에 대해 사카이는 '고립과 복종'이라는 나쁜 안전 대신
"이동과 유동성'을 전재로 각각의 특이성을 서로 승인하는 일종의 집단성의 형성에 주목한다.
물론 이동의 흐름을 어떻게 전유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은 아직 과제로 남아 있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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