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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06/18
    탈매체화?
    유마
  2. 2008/06/16
    이 영화를 보라(1)
    유마
  3. 2008/06/16
    공간의 범람
    유마

탈매체화?

가타리는 <세 가지 생태학>에서 좋은 삶의 문제와 결부시켜

자본주의적 매체의 탈매체화를 촉구한 바 있다.

사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매체는 우리를 모방-동일화의 방향으로 이끈다.

매체의 수용자로서  우리는 대중 매체에 등장하는 이야기에 쉽게 빠져 든다.

즉 대중 매체는 우리의 욕망을 막고 그 공간에 욕망을 포획시킨다.

욕망을 자극하는 동시에 가로막기. 소비의 욕망을 자극하되 탈주의 욕망을 저지하는 것.

이것이 대중 매체 아닐까?

이렇게 갇혀진 욕망의 정치를 벗어나 매체를 새롭게 전유하는 것, 이것을 탈 매체화라고 하자.

 

탈매체화는 사람들의 탈정치화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제 의회가 더 이상 사람들을 '대의'하지 않는 것처럼,

매체 역시 사람들의 다양한 뜻을  하나의 여론으로 생산할 수 없다,

오늘날과 같이 매체 자체가 확대되어 버린 상황에서 여론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미디어 액션을 하기가 쉽지 않았던 조건. 이 조건을 반영하는 것이 여론이라고 생각한다.

글의 울림과 자신을 동일시화함으로써 공명하고 이 공명을 통해 하나의 생산하는 문제. 

이런 점에서 이 하나의 소리는 희소성을 조건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미디어의 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다.

누군가의 소리에 자신을 겹치는 것보다 자신의 소리를 내는게 더 편하고 수월해지고 있다,

사람들은 신문의 소리에 자신을 겹치는  주체로 생산되지 않는다,. 훈육 시대의 종말이라고 할까?

 

미디어의 과잉이라는 조건 하에서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말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관심을 받을가에 관심을 둔다. 댓글이 달리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큰 두려움 아닐까? 내 의견을 말하지 못하는 것보다도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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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라

 

<이 영화를 보라 >(고미숙, 그린비)


소리가 들리는 글.

글을 읽다 저자의 카랑카랑하고 또렷한 목소리를 듣게 되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저자가 영화와 같은 비문자적인 것을 책 속의 문자로 풀어 쓴 것처럼, 글을 읽다보면 문자는 사라지고 그녀의 입담과 시선이 오롯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지금 여기’의 소리와 풍경을 만나게 된다.


문체는 소리를 그대로 받아 적어 놓은 듯 경쾌하고 선명하다. 한 번의 호흡으로 끝까지 갈 만큼, 리듬감 있게 읽힌다. 다른 영화 소개서들처럼 알기 어려운 누군가의 목소리가 무겁게 주렁주렁 달려 있지 않다. 자신이 잘 알고 있거나, 자신 가까이에 있는 이들의 목소리를 빌려 스스럼없이 이야기 한다. 그녀의 삶과 글이 밀착되어 있다고 느껴지는 것도 이런 태도에서 기인할 터.  그렇다고 내용이 가벼운 것은 아니다. 저자의 말처럼 ‘위생 권력, 민족과 역사, 그리고 언어, 연애와 성, 한의 미학적 장치, 가족과 신, 이동과 접속’등 근대의 풍경과 지금의 이야기가 스케치된다. 내용의 무게로 치자면 무엇 하나 가볍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근대라는 미로를 빠져 나와 있다. 저자는 눈 밝은 안내자인 셈.


그러나 방심은 금물. 사실 저자는 유람 관광단의 안내자가 아니다. 우리를 미로로부터 편안하게 빠져나오게만 하지 않는다. 곧 우리의 삶, 즉 우리의 일상이 미로임을 직시하게 만든다. 나는 이 보게 하는 행위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본다는 것은 무엇이었던가? 우리는 늘 보지만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것을 염두 해 두자. (나의 경우 이 영화들에서 이런 모습을 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환상 혹은 망상을 통해 무엇인가를 바라보지 않은가. 그리고 이 환상에 맞춰 또 새로운 환상을 만들어내지 않은가. 이런 점에서 잘 본다는 것은 이 환상을 눈꺼플에서 떼어 놓음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사실 뭔가를 보고 배운다는 것은 이 환상과 대상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여섯 가지의 길을 안내하면서 우리들이 갖고 있는 환상과 삶의 거리를 좁히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 역시 눈 밝은 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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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범람

 새로운 정치적 공간이 열렸다. 이 공간이 카오스 상태임은 모두가 동의하고 있을 듯하다. 좌파에게든 우파에게든. 홈패이고 구획지어 졌던 공간에 사람들과 그들의 욕망이 넘쳐 흐르고 있다. 이런 흐름은 하나의 방향으로 흐르기보다는 골목과 샛길로 흘러가고 있다.

이런 카오스적 공간에 대한 태도가 엇갈리면서 각자들의 입장이 선명해지고 있다. 어떤 이들은  사람들의 흐름을 아예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니들의 길을 가라, 곧 사그라들겠지라는 태토. 명박식으로 말하면 소통의 단절. 그러나 이들은 사람들의 흐름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태도는 이들 자신의 소통 능력의 부재를 의미한다.

다른 한편에서 제도권에 대한 욕망. 카오스 상태는 지금으로 충분하다. 문제를 제도화시키자는 태도일 것. “정부는 무능력하고 잘못했다. 그렇다고 제도권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제도화하자. 이제 촛불을 끄자.” 새롭게 펼쳐진 정치적 공간을 이쯤에서 접고 사람들의 뜻을 대의하는 사람들에게 맡기자는 의견. 아침에 경향신문에 실린 대담을 보고 놀랬다. 제도화가 결국 어떤 우호적인 결과를 산출하지 못했음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실제적으로 범 여당이 2/3 이상의 의석을 차지한 상황에서 제도권이 사람들의 뜻을 대신해서 문제를 풀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 더욱이 야당은 이번 운동에서 그 무엇하나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정당이 아닌가? 그리고 촛불을 끄고 제도화된 공간으로 문제를 전환하려는 이들에게서 나는 이상한 냄새가 참을 수 없다. 꽉 막힌 밀실의 쾌쾌한 냄새. 그들은 우리의 촛불이 충분히 타올랐다고 생각한다. 촛불의 광장 대신 밀폐된 공간으로 들어가서 그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 협상. 누구를 위해 그리고 무엇을 위해. 수입 쇠고기 재협상?

우리는 쇠고기 문제 때문에만 촛불을 들지 않았다. 권력의 삶과 생명에 대한 위협과 침해, 권력의 무능, 소수자에 대한 배제..... 촛불은 이런 무수한 힘들이 하나로 응결되어 나타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쇠고기 재협상과 같은 식으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일단 새롭게 열린 정치적 공간에 대한 섣부른 예상을 멈춰야 하지 않을까? 그보다도 새롭게 열린 공간에서 우리는 공간의 자유를 더 즐겨야 한다. 우리는 아직도 새로 열린 공간을 충분히 사유하지 못했다. 대운하 문제라든가, 교육의 문제, 그리고 비정규직․이주노동자, 성적소수자, 장애인 등등.... 함께 이야기하고 고민해야 할 문제들이 아직도  많다. 우리는 이 정치적 공간에서 우리의 일상을 잠식하고 있던 문제들에 대해서 소통해야 한다. 우리는 이 공간의 이질성, 카오스를 아직도 충분히 경험해보지 못했다. 우리는 더 많이 모이고 더 많이 충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공간의 문을 폐쇄하기에 시간은 너무 이르다. 촛불을 아직 꺼트리고 싶지 않다.


ps.물에 빠진 개를 섣불리 건져주는 우를 범해서도 안된다. 물에 빠진 개는 위험할 때는 뭐든지 다할 것 거첨 아양을 떨지만 물에서 건져지만 다시 사람을 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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