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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라

 

<이 영화를 보라 >(고미숙, 그린비)


소리가 들리는 글.

글을 읽다 저자의 카랑카랑하고 또렷한 목소리를 듣게 되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저자가 영화와 같은 비문자적인 것을 책 속의 문자로 풀어 쓴 것처럼, 글을 읽다보면 문자는 사라지고 그녀의 입담과 시선이 오롯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지금 여기’의 소리와 풍경을 만나게 된다.


문체는 소리를 그대로 받아 적어 놓은 듯 경쾌하고 선명하다. 한 번의 호흡으로 끝까지 갈 만큼, 리듬감 있게 읽힌다. 다른 영화 소개서들처럼 알기 어려운 누군가의 목소리가 무겁게 주렁주렁 달려 있지 않다. 자신이 잘 알고 있거나, 자신 가까이에 있는 이들의 목소리를 빌려 스스럼없이 이야기 한다. 그녀의 삶과 글이 밀착되어 있다고 느껴지는 것도 이런 태도에서 기인할 터.  그렇다고 내용이 가벼운 것은 아니다. 저자의 말처럼 ‘위생 권력, 민족과 역사, 그리고 언어, 연애와 성, 한의 미학적 장치, 가족과 신, 이동과 접속’등 근대의 풍경과 지금의 이야기가 스케치된다. 내용의 무게로 치자면 무엇 하나 가볍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근대라는 미로를 빠져 나와 있다. 저자는 눈 밝은 안내자인 셈.


그러나 방심은 금물. 사실 저자는 유람 관광단의 안내자가 아니다. 우리를 미로로부터 편안하게 빠져나오게만 하지 않는다. 곧 우리의 삶, 즉 우리의 일상이 미로임을 직시하게 만든다. 나는 이 보게 하는 행위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본다는 것은 무엇이었던가? 우리는 늘 보지만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것을 염두 해 두자. (나의 경우 이 영화들에서 이런 모습을 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환상 혹은 망상을 통해 무엇인가를 바라보지 않은가. 그리고 이 환상에 맞춰 또 새로운 환상을 만들어내지 않은가. 이런 점에서 잘 본다는 것은 이 환상을 눈꺼플에서 떼어 놓음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사실 뭔가를 보고 배운다는 것은 이 환상과 대상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여섯 가지의 길을 안내하면서 우리들이 갖고 있는 환상과 삶의 거리를 좁히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 역시 눈 밝은 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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