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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비가 오는 탓인지 왠지 센치해져서는 사촌이 독일로 돌아가면서 나에게 주고 갔던 커피포트를 꺼내 물을 올리고, 이런 상황에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을까 책장을 뒤적거리다가 얼마 전 헌책방에서 2000원을 주고 산 <상실의 시대>를 펼쳤다. 어차피 이 책은 너무 뻔해서 쪽팔리게 들고 다니면서는 읽지 못한다는 것도 있었고, 내 책장에 꽂힌 책 중에 이런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책이 얼마 되지 않았다는 점도 이 책을 선택하는 데에 일조했다. 내가 중3때인가 한창 tv광고에 나와서 주가를 올릴 즈음에 친구 집에서 그 친구의 형이 읽던 것을 호기심 반 겉 멋 반으로 빌려서 읽게 되었는데, 그때는 뭔지도 모르면서 그래도 나름 진지하게 읽었었던 것 같은데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아마 그때 나로서는 ‘젖었다’, ‘펠라티오’ 등등의 성적인 용어들을 잘 이해 할 수 없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 당시 나에겐 그저 소설 초반부 ‘나’와 나오코가 초원을 걸어가며 얘기했던 깊은 우물의 이미지만이 강렬하게 남아있었다. 나름대로 센치하게 저녁을 해먹고 다시 책을 펼쳐서 새벽 5시 즈음까지 단숨에 일독했다. 중간 중간에 남아있던 담배 몇 까치를 다 피웠고, 비틀즈의 를 내가 좋아하는 <미쉘>과 <헤이 쥬드>를 곁들여 몇 번씩 반복해서 들었다. 여전히 이 소설이 왜 그러한 사회적 지위(?)를 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때는 전혜린이 혹은 헤세의 <데미안>이나 까뮈와 니체가, 또 어떤 의미에서는 체게바라 평전이 ‘유행’했던 맥락을 생각해보니 아 그렇구나 싶기도 했다. 책을 읽고 나서 나는 그저 작년에 들었던 철학수업 -수업을 들으면 들을수록 교수의 말장난과 논의 수준의 유치한 현학성으로 수업시간 내내 나의 인내심을 테스트해야만 했던-에서 누군가가 이 책을 가지고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정의해보겠다던, 주제는 거창했으나 그 내용은 차마 참고 봐주기 힘들었던 발표가 떠올라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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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멈추질 않는다. 네이버에서 수재피해 뉴스를 보면서 문득, ‘계급투쟁’이라는 것도 이러한 종류의 것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위치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이 비 또한 누군가에게는 재앙으로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저 조금의 귀찮음이거나 혹은 멜랑꼴리한 배경으로 다르게 다가오는 것처럼.
수재민들은 매년 이 지역이 침수가 된다는 걸 알아도 돈이 없어서 이사를 못가는 거라고 생각해보면 이것도 계급투쟁이군 싶기도 하다만은.

 

*

 

대구에 있는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전화는 물론이고, 꼭 필요한 용건 말고는 대화가 거의 없는 아버지와 나 사이이기에 어색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요즈음 뉴스 보니까 비 때문에 난리라고, 저번에 보았을 때 나의 집 뒤편에 있는 축대의 경사가 꽤 높으니, 혹시 이번 비로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비가 많이 오면 근처 친구 집에서 자고 오라는 내용이었다. 순간 훗 하면서도, 진지하게 꼭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물론, 절대 그러진 않겠지만ㅋ) 김규항이었나, 부모가 늙으면 그저 자식 걱정만 하며 남은 인생을 버티는 도인이 된다고 얘기 했었던게...

 

“...잘 지내니?”

 

“네...

 

...아버지도 건강하시죠?”

 

“응...

 

...끊을께"

 

"네..."

 

 어색한 대화들과 더 어색한 공백들로 채워진 짧은 전화통화가 끝나고, 나는 아버지가 늙었구나...생각했다. 예전엔 그렇게 미워하고 싫어했던, 절대로 아버지처럼 살진 않겠노라고 그의 얼굴을 보며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그렇게 싫어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나에게서 보았을 때 그 밀려오는 자기혐오들... 지금은 그저 미안함만이 남아있다. 통화하느라 몇 번 빨지도 못한 채 필터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비벼 끄면서, 더 이상 이 사람에게 상처주지는 말아야지 하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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