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이 못 지난 일이다. 머리를 하러 갔었다. 미용실에 가면 그 날 내 담당 미용사의 조수가 나를 보살핀다. 배려심 많은 그들은 언제나 먼저 안내하고 먼저 질문한다. 나는 네네, 하고 그들을 따르는 얌전한 손님이 되어 머리를 내맡기고 책을 읽는다. 눈이 피로하여 잠깐 책을 엎어놓았을 때, 내 머리칼에 뭔지 모를 약을 바르던 조수 언니(동생이나 동갑일지도 모른다)가 잠깐 손을 멈추고 책 표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책 재밌어요?"
그녀가 왠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 그냥... 읽어야 될 일이 있어서 읽는데, 읽을 만해요."
나는 굳이 할 필요없는 거짓말을 덧붙여 대답했다.
"재밌을 거 같은데 무슨 내용이예요?"
"진보 운동 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 속에서 성차별같은 거, 그런 내용이에요."
"아직도 그런 사람들, 운동권이 있어요?"
그녀의 호기심은 천진했다.
"뭐, 있겠죠."
그 날 후로 그 책이 재밌냐고 묻던 그녀의 표정이 이따금씩 떠오른다. 그 회상은 왠지 나를 애잔하게 한다.
그녀가 책에 관해 묻는 짧은 순간, 내 머릿속에는 그녀의 깜찍한 외모나 기타 상황으로 보아 그녀가 '오빠는 필요없다'라는 둥의 책 제목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의외라는 생각이 튀어 올랐다. 이제 알겠는데, 나는 그게 매우 부끄러웠다.
그와 동시에 순간적으로 나는 '우리'가 여성이라는 데서 오는 연대감을 느끼며 홀로 찡했다. 그녀에게 혹 오빠가 필요없다고 느꼈던 경험들이 있었는지 묻고 싶었고, 이보다 더 재미있는 책들에 관해 이야기하고도 싶었다. 이제 와서 어떻게 할 수야 없는 일이지만 그 때로 돌아가도 마찬가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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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겔부처
2009/07/04 10:29 Delete Reply Permalink
으아... 정말 너무 짠해요.. 애잔하고ㅜㅜ 디게 아름답네욤;ㅁ;
Re: 어느바람
2009/07/06 12:14 Delete Permalink
헉; 이런 반응에 뭐라고 해야 할지 ㅋㅋㅋ
콰지모도
2009/07/04 12:28 Delete Reply Permalink
뭐, 아직 삶이 많이 남았는데 그런 질문을 누군가에게 던져 볼 기회는 많이 있지 않을까요? 부끄러워하지 않고 질문할 준비만 되어 있다면요.
Re: 어느바람
2009/07/06 12:15 Delete Permalink
네.. 전 부끄러움이 많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