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한 초국적 기업의 한국지사에서 잠깐 아르바이트를 했다. 화이트데이를 앞둔 금요일에는 눈 파란 외국인 사장이 사무실을 돌며 여직원들에게 초콜릿을 나눠 주었다. 내가 일하던 스캐닝센터에도 그와 수행원들이 들어왔다. 담당자는 잠깐 화장실에 갔는지 나가고 없었는데, 사장은 내가 그녀인 줄 알고 내게 웃으며 초콜릿을 건넸다. 나는 말했다.

 

  "감사합니다. 근데 전 그냥 알바생이구요. 여기 스캐닝 센터에 근무하는 분한텐 이런 이벤트보단 다른 게 더 필요할 것 같은데요. 여기 전체 사무실 위아래 층에 스캐닝 센터 하나 뿐인데다, 근무자도 달랑 한 명이니 업무 강도가 얼마나 세겠어요.

   이제껏 사장님 얼굴 뵌 적도 없다던데, 이 분한테 주는 임금이 얼만지는 아시나요. 경비 내역서들, 그런 거 중요한 거 아닌가요? 그런 거 다루는 사람을 아웃소싱해서 고용하는 거 회사 입장에서도 불안하지 않나요? 

   매월 마감 때 너무 바빠서 아르바이트 생 쓰는 것도 사흘 정도는 필요한걸 이틀만 쓰라고 눈치 준다는 거 아세요? 알바생 일급이 45,000원이에요. 접대비 내역 보니까 직원 한명당 한달에 4~500만원씩은 어느 분들 접대하면서 좋은 거 먹고 술 마시고 대리운전비에 자기 계발비에.. 펑펑 잘도 쓰던데. 이거 어떻게 생각하세요?"

 

  으하하... 이랬더라면 통쾌했을까? 사장이 가고 난 후에, 나는 시트콤의 한 장면처럼 저런 말을 하는 나를 핑크빛 테두리에 집어놓고 상상해보았다. 꽤 달콤했다. 허허... 그치만 상상은 상상. 나는 절대 말할 수 없었다. 그럴 깡도 없고 이틀 일한 주제에 뭐라 말할 처지도 못되거니와 가장 크게는 저런 말을 어떻게 영어로 한단 말인가? ㅋㅋㅋㅋㅋㅋㅋㅋ

 

  사실 내가 한 말은 이게 전부였더랬다.

  " I'm a just part time... job.. She's not here..."

  그래도 외국인 앞에서 한마디라도 꺼냈다는 게 내심 뿌듯했고, 그 뿌듯함이 또 부끄럽고 하핫.

 

   무튼 그대로다. 이틀간 경비 서류더미들에 싸여 일하면서 말로만 듣던 대기업의 접대의 실상을 생생히 보았다. 흥미로운 일이었다. 쉽게 확인할 수 없게 처리된 영수증들 또한 얼마나 많을 것이며, 대체 이 엄청난 경비들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리고 대체 이런 일을 아웃소싱 회사에서 고용한 이에게 맡겨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걸까?

  한끼 식사에 접대로 백만원 씩 쓰면서,  업무량이 많아 정말 쉴틈없이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정직원으로 고용할 돈은 아깝고, 아르바이트 생 일급 몇 만원은 아까운 걸까? 내가 모르는 다른 계산법이 있는 걸까. 대체 이놈의......

 

  며칠 전 현대차 전주공장에서 비정규직-정규직 연대 투쟁을 하고 있다는 기사를 봤다. 인턴이나 알바를 하면서 여기저기 회사를 가보면 언제나 한 사무실 내에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있다. 비정규직에 대한 처우가 분명 비합리적이고, 그들이 계약 기간에 따라 일자리를 잃는 것을 다들 안타깝게 생각하더라. 그치만 그 문제에 대해 정규직이 나서서 어떻게 해결해야겠다는 식의 움직임까지 이야기하는 건 본 적이 없고 나 또한 잠깐 들르는 입장에서 뭐라고 말할 깡은 없었다. 그냥 그들에게 그것까지 요구하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이번 현대차 투쟁을 보면, 어렵다거나 안될 것 같은 일은 사실 없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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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0 13:20 2010/03/20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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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앙겔부처
    2010/03/22 12:22 Delete Reply Permalink

    상상만도 멋있어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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