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는 책이든 영화든 참 안 멕힌다. 한 사람이 차지하는 자리만큼의 윤곽이 있다면 그게 흐려져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지만 타인이 이해하는 나는 어떨지 모르고, 잡다한 감정이 들고 나지만 무엇을 붙잡고 싶은지 알 수 없고...

 

  삶과 이야기. 둘 사이의 균형이 깨질 때면 그냥그냥 어떤 형태의 감이 온다. 이야기 속에서 허우적 대다 녹아버리기 전에 경고를 보내는 생존 본능의 집요함. 내 몸으로 직접 세상을 냄새맡고 부닥치고 '싶다', 보다는 '그래야만 한다'는 부류의 절실함.

 

  타인의 손에 들린 활자와 카메라를 거치지 않은 날것의 생활. 무자비하고 비참하고 신선한 삶. 정제되지 않은 문장들.

 

  연고 없는 소도시의 비열한 거리에서, 아무도 하고 싶어하지 않지만 아무라도 해야 하고 아무라도 할 수 있는 일을 해치우면서, 개성이라곤 조금도 없는 남자와 그저 그런 연애를 하면서, 한 석 삼 년 처박힌다.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것들을 모아놓은 종합선물세트를 받아들고 '기뻐', 라고 말한다. 태풍의 눈이 고요한 것처럼, 지루함의 실체랄 수 있는 일의 핵에 다가가보면 즐거운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을 것도 같은 기대.

 

  그치만 단어는 언제나 낭비될 뿐이고, 요샌 꽤 행복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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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05 13:50 2010/03/05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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