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속에서

 

 

가만히 어둠 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내가 모르는 일이 흘러와서 내가 아는 일들로 흘러갈 때까지
잠시 떨고 있는 일
나는 잠시 떨고 있을 뿐
물살의 흐름은 바뀌지 않는 일
물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푸르던 것이 흘러와서 다시 푸르른 것으로 흘러갈 때까지
잠시 투명해져 나를 비출 뿐
물의 색은 바뀌지 않는 일

 

(그런 일이 너무 춥고 지루할 때
내 몸에 구멍이 났다고 상상해볼까?)

 

모르는 일들이 흘러와서 조금씩 젖어드는 일
내 안의 딱딱한 활자들이 젖어가며 점점 부드러워지게
점점 부플어오르게
잠이 잠처럼 풀리고
집이 집만큼 커지고 바다가 바다처럼 깊어지는 일
내가 모르는 일들이 흘러와서
내 안의 붉은 물감 풀어놓고 흘러가는 일
그 물빛에 나도 잠시 따스해지는

 

그런 상상 속에서 물속에 있는 걸 잠시 잊어버리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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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잘 믿지 못한다. 익숙하지 않고 헤아리기 어려운 것은 일단 자동적으로 믿을 수 없다 여기고, 거짓을 찾아내느라 바쁜 게 오래 습관이라 그렇다. 예전엔 일부러 믿지 말아야 한다고 자꾸 되뇌었는데, 이제는 일부러 믿어야지 자꾸 다짐하는 꼴이 됐다.

 

믿고 싶다. 믿는 일은 마음이 아니라 피부로 하는 일. 내가 점점 부드러워지게, 잠은 잠이 되고 집이 집이 되고 바다는 바다로... 내가 모르는 일들이 나를 풀어놓고 따뜻하게 해주는 일. 뭐가 진짜인지 거짓인지 따져보는 마음 따위는 아예 잊고 사는 일. 졸렬하게 남의 허위를 따져 묻기보다 마음을 크게 벌려 안아주는 일.

 

시를 읽고 쓰는 일은 믿는 일일 것이다. 남의 세계를 믿어주고, 내 세계를 믿고 내보이고, 타인이 내 세계를 믿어주리라고 믿는 일. 자꾸 더 멀어져야, 부풀어야 하는 일. 용기가 필요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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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손가락의 시

 

 

시를 쓰는 건

내 손가락을 쓰는 일이 머리를 쓰는 일보다 중요하기 때문, 내 손가락, 내 몸에서 가장 멀리 뻗어 나와 있다. 나무를 봐, 몸통에서 가장 멀리 있는 가지처럼, 나는 건드린다, 고요한 밤의 숨결, 흘러가는 물소리를, 불타는 다른 나무의 뜨거움을.

 

모두 다른 것을 가리킨다. 방향을 틀어 제 몸에 대는 것은 가지가 아니다. 가장 멀리 있는 가지는 가장 여리다. 잘 부러진다. 가지는 물을 빨아들이지도 못하고 나무를 지탱하지도 않는다. 빗방울 떨어진다. 그래도 나는 쓴다. 내게서 제일 멀리 나와 있다. 손가락 끝에서 시간의 잎들이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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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수 년간 눈팅만 하던 익명 커뮤니티에 처음 댓글을 달았다. '... 남을 못 믿어서 힘든 내 마음 때문에 남에게 상처주고 헤어지는 거나, 남을 믿었는데 믿음이 배반당해 내가 상처받는 거나 결국 비슷하게 아픈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눈 딱감고 믿어보는 게 확률적으로도 더 행복한 일 아닐까 싶어요. 내가 싫다면서 자책하지만 말고, 일부러 힘내서 믿어보세요. 저도 그러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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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8 18:54 2013/05/28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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